<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나 모임요. 지금 정신없어요. 나중에 해요.]
[아, 그래.]
아. 그. 래.
딱 세 글자를 말할 수 있었을 뿐인 통화에 현준은 당황했다.
미주로부터 외면당하는 기분은 지난 6개월에 걸쳐 몇 번을 겪고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릴없이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짧게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급한 일 아니면 진료 보는 날 얘기해요. 짧게 할 수 있는 얘기면 진료 때 하고.]
급한 일은 아니었고, 굳이 길게 이야기할 일도 아니었다.
형석이가 장기간에 걸쳐 관리가 필요한 어머님의 진료를 미주에게 맡기고 싶어 한단 이야기가 다였다.
그러니까 잘 좀 살펴봐 달라고.
직접 뵙고 상태를 살핀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심장내과 의사가 아니니 어머님의 상태에 대해선 특별히 전할 말도 없었다.
[그러지.]
이번에도 세 글자면 충분했다.
외면해 놓고는 못내 마음을 쓰는 듯한 미주의 메시지에 소심한 복수라도 하듯 현준은 최소한의 글자만을 적어 답신을 보냈다.
그러다가 항암을 진행하는 최근 6개월 동안 더욱 드물어진 미주의 연락에 전에 없던 갈증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현준은 어이없어했다.
얼굴 쪽으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낀 현준의 뇌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또 석 달이 지났군.”
부끄러움을 상쇄시켜 줄 생각거리를 찾기 위해 애쓰던 현준의 머릿속이 자연스럽게 미주의 지난 치료 경과를 떠올렸다.
첫 번째 파루틸 복용기간을 마친 미주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었다.
파루틸은 복용 3개월 만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주었고, 이어받은 소파술도 깔끔히 진행되었다.
현준은 휴대전화를 열어 입력해 두었던 주요 일정을 확인했다.
[미주]
파루틸 복용을 3개월 더 연장했던 미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진료가 사흘 뒤에 잡혀 있었다.
“벌써라니! 피 말리는 석 달을 내가 어떻게 보냈는데요.”
환자석에 앉아 있던 미주가 뾰루퉁히 한마디를 쏘아댔다.
“간단히 살펴본 거지만 초음파 상으론 상태가 좋아 보여. 2주 후에 한번 더 소파술 진행한 뒤에 좀 더 정확한 결과를 확인할 거야. 날짜 잡고 가.”
미주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전화로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아, 그거 말이지.”
현준이 미주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형석의 어머님 이야기를 꺼냈다.
“형석 씨 어머님이라면 얼마든지 봐 드려야지요. 그냥 바로 외래 예약했으면 진즉에 진료받으셨을 텐데.”
“혹시 우리가 껄끄러워할까 봐 일부러 물은 것 같아. 보기보다 세심한 녀석이잖아.”
“그러게요. 그렇지만 형석 씨가 괜한 걱정을 했어요. 환자 가리고 그러는 의사 아니에요, 나. 전남편 친구 어머님인 게 뭐가 어때서.”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맙네. 형석이한테도 전할게.”
“별 걸 다 전한대. 어서 예약 잡으시라고나 해요. 원무과에 얘기는 해둘게요.”
미주의 대답에선 흔쾌함이 묻어나고 있었고, 경쾌한 미주의 태도에 현준은 안심을 했다.
“일은 어때?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그러지 않아?”
“아주 없지는 않죠.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며 쉬는 것보단 나아요. 아무래도 내가 울컥울컥 차오르는 화를 일로 풀어내는 거 같아. 전에 없이 의욕적으로 하고 있어요.”
미주가 쓴웃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환자 보는 것 말고도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라 바쁘다 들었어.”
“소문 빨라, 참. 우리 전남편님이 이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아주 관심이 없지는 않으신가 보네.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아니. 왜?”
“일 얘기 더 듣고 싶으면 같이 저녁 먹어요. 퇴근 시간 다 되었네? 내 차로 와요. 차에서 기다릴게.”
“아, 어.”
미주의 페이스에 휘말린 현준이 부지불식간에 미주와 저녁 약속을 하고 말았다.
현준을 기다리고 있는 차 안에서 미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메시지 한번 더 넣을게요.]
[네. 감사해요.]
마담의 목소리는 세련되고 교양이 있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들어온 마담의 메시지를 무심한 표정의 미주가 확인했다.
[토요일 3시입니다. 블루리버호텔 1층 카페 ‘고우’]
석 달 전부터 미주가 특별히 부탁했던 맞선 자리였다.
“듣고 전해드릴게요.”
첫 시작은 이러했다.
연이은 해외일정을 무리하게 소화하느라 단단히 몸살이 난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경영진 회의에 참석하겠다며 미주가 먼저 나섰던 날.
한진웅 이사장은 그런 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됐다. 김 사무장에게 들으면 돼.”
“김인철 사무장님을 백 퍼센트 신뢰하시는 거예요?”
“······.”
“아버지랑 김 사무장님, 두 분 언젠가부터 각자 다른 노선으로 가고 계셨던 거 아니었어요?”
“······.”
“저는 아버지가 추진하려 하시는 방향이 맞다고 생각해요.”
“반대하는 거 아니었냐?”
“그것 때문에 저를 엄한 자리로 시집보내려는 걸 반대하죠.”
“······.”
“제가 듣고 와서 전해드릴 게요.”
“그래라.”
난데없는 미주의 등장에 회의장 안의 적잖은 경영진이 당황을 했다.
한진웅 이사장 쪽의 사람들은 언젠간 일어날 일이 예상치 못한 시기에 좀 앞당겨 진행되었다는 듯 곧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노선이 다른 이사진들은 다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장 기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김인철 사무장 측이었다.
“오오, 미주 왔구나. 코흘리개 아가씨가 이제 아버지 대신 회의도 들으러 오고 세월이 참 무상해.”
김 사무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미주를 맞이하면서도 ‘너는 그저 네 아버지의 대리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선을 분명히 그으려 했다.
이곳은 아직 너에겐 어림도 없는 자리라는 듯이.
‘그러라지, 흥. 나는 더 무서울 것이 없어.’
내막암 판정을 받은 얼마 후부터 미주의 뇌리에 울리던 주문이었다.
미주가 한번 더 주문을 외운 뒤 김 사무장 못지않게 당당한 목소리로 그의 인사에 응대했다.
“그러게요. 아저씬 건강하시죠? 아버지 보니까 좀 무리하시니 한순간에 ‘훅’하시더라고요. 건강을 너무 과신하지 마시고 바쁘시더라도 꼭꼭 잘 챙겨 쉬셔야 해요."
"······."
"나이 드실수록 더요. 두 분 다 정년을 훌쩍 넘기셨잖아요”
김 사무장의 눈썹이 미묘하게 비틀어졌다.
아직 무리하게 기싸움을 할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이 살짝 도를 넘어버린 것을 알아챈 미주가,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곧 부드러운 말투로 김 사무장을 추켜 세웠다.
“저한테는 제2의 아버지나 다름없으신데, 아저씨도 과로 때문에 앓고 그러시면 저 속상해요."
"걱정해 주니 고맙구나. 역시 우리 미주밖에 없어."
"아빠도 부재중이나 다름없으신데 누구 믿고 병원 생활 하라고요. 어머, 이제 회의 시작하려나 봐요. 이제 자리에 앉아야겠어요. 가실까요, 사무장님?”
한진웅 이사장의 부재 속에 진행된 회의는 김인철 사무장의 의중대로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사장 없이 진행된 회의 임이 분명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병원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결국 회의는 김인철 사무장의 원맨쇼 관람과 청중의 박수 크기를 체크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회의장에서 나온 미주는 곧바로 한진웅 이사장의 심복인 박영길 부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 네. 괜찮아요. 저 맞선 자리 알아봐 주시는 분 있죠? 그분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