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아니. 따지려는 게 아니라요.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알아요, 삼촌하고 아주 가까운 지인분이신 거. 예의 없게 안 그래요.]
밀린 진료로 정신없이 오전 시간을 보내고 나니 부원장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미주는 점심 약속을 핑계로 주변을 물리고 메시지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쯤 울렸을 때, 완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한미주예요. 박영길 부원장님께 연락처 여쭤보고 전화드렸습니다.]
[아, 네.]
[자세히는 말씀 안 드리고 연락처만 여쭤봤었어요.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한 이사장님 영애께서 제게 무슨 일로 직접 연락을 하셨을까요?]
마담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우려가 동시에 우러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꼭 만나 뵙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혹시 자리를 좀 마련해 주실 수 있으신가 싶어 전화드렸습니다. 전에도 두 차례 추진해 주셨던 분이에요.]
마담은 길게 고민하지 않는 스타일의 사람인 듯했다.
[네, 그럼 알아봐 주시고 연락 주세요.]
담백한 인사로 통화를 마무리한 미주의 입가에선 기쁨이 묻어나는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두 번.
인연이 틀어진 적이 있었던 강기훈이었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는 있지만 모두 마담을 통해 주선이 된 자리였다.
이번에도 만남이 가능할 거란 미주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마담과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미주는 생애 처음 해 보았던 맞선 자리에서의 강기훈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기억이 잘 안 나네. 만나면 분명히 그때 얘기를 꺼낼 텐데. 뭐라도 생각이 나야 대꾸를 하지.'
현준을 사귀기도 더 전의 일이었고, 일도 공부도 너무 벅차서 선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때에 만났던 터라 그런지 그의 생김새조차 잘 떠오르질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호텔 커피숍 어딘가에서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끝인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가물거리는 기억 때문에 스멀스멀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강기훈의 이름을 다시 들은 것은 서로의 재혼 상대로 한 번 더 소개받았었을 때였다.
선자리가 구체적으로 추진될 무렵 자궁내막암인 것을 알았다.
그때, 마담은 아직은 이혼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딸을 위해 한 이사장 측에서 선자리를 물렸다는 훈훈한 이야기로 상황을 마무리해 주었었다.
맞선 자리가 최종적으로 없던 일이 된 날, 암투병 중인 딸 앞에서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미주는 적잖이 실망을 했었다.
"귀한 선자리가 틀어져 버렸구나."
"대신 다정한 아버지로 이미지메이킹 하셨잖아요."
"쓸데없는. 의학 분야와는 구체적인 관련을 두지 않고 있던 재계 쪽 집안이었어, 이 녀석아. "
병원이 한창 규모를 확장하고 있는 시기였다.
JK그룹의 잉여자금을 끌어올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한 회장이 미주의 손틈 새로 사라져 버린 기회를 몹시도 아까워했다.
그리고 미주는 우선순위가 자신의 기대와 너무도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적잖은 실망을 했다.
그날의 기억을 씁쓸히 떠올리던 미주가 머리를 살짝 흔들며 자신의 의식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그때 실망한 건 건 실망했던 거고, 강기훈이 내가 놓치면 안 될 사람인 건 지금 닥친 현실인 거고.”
그날, 퇴근 후 본가에 들른 미주는 곧장 한진웅 이사장의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앉아 이런저런 서류들을 살피고 있었던 한 이사장이 미주를 보자마자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아비 대신 회의에 참석을 했으면, 보고 들은 걸 보고하는 게 우선 아니냐.”
“죄송해요. 진료가 밀린 환자들이 많아서 회의 후에 정신없이 바빴어요.”
“밥을 거르고서라도 보고는 했어야지.”
“밥을 걸렀는데도 보고 드릴 시간이 없었어요, 정리해서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생각을 좀 하느라.”
“밥을 왜 걸러? 어느 때보다도 신경 써서 잘 먹어야 하는 사람이.”
“좀 전엔 밥을 거르고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하시더니.”
한진웅 회장이 ‘경영인’과 ‘아버지’ 사이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서 버린 줄타기를 했다.
아픈 아버지의 여린 모습에 미주는 마음이 ‘애증’에서 ‘애틋’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미간은 여전히 찌푸리고 있었지만 눈에는 화가 아닌 미소를 담은 채로, 미주가 아버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침대 한편에 걸터앉았다.
“그러시는 아버지는 뭘 좀 드시긴 하신 거예요?”
“보면 몰라?”
미주가 침대 협탁 옆에 놓여있는 죽 쟁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 반 밖에 안 드셨네. 안 실장님한테 말해놨어요. 바로 차려주신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아마 다 준비해 놓았을 거예요."
"됐다."
"같이 가서 밥 먹어요, 아빠. 체하신 것도 아닌데 죽만 드시면 기운 더 빠져서 안 돼요.”
한진웅 이사장이 마지못해 따르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래, 회의에선 무슨 얘길 들었길래 생각을 정리할 시간씩이나 가진 게냐?”
“우선은 밥부터 먹고요. 안 드시면 안 해드려요, 얘기.”
“요 녀석이······.”
한진웅 회장이 진심 없이 진노했고, 미주는 못 들은 체를 하며 한진웅 회장의 팔짱을 끼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밥상을 물린 후 거실에서 받은 과일 디저트 앞에서 이루어졌다.
“우담대학교라고 양평 쪽에 신설된 대학 아시죠?”
미주가 예쁘게 깎여있는 사과 한쪽을 포크로 찍어 한 이사장에게 내밀며 말했다.
“김 사무장 집안에서 세운 학교 아니냐.”
미주에게서 건네받은 사과를 가만히 들고서 한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거기 의대 설립에 투자하려는 가 봐요.”
“김 사무장 의중은 알고 있던 거고.”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세요?”
“명망 있는 병원에서 후학양성에도 힘을 쓰는 것은 도의적으로 옳은 일이야. 병원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지.”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이야기를 하며 한 이사장이 들고 있던 사과를 우걱였다.
“그게 하필 우담대학교인 게 마음에 걸려요.”
“어째서?”
“우담 중학교, 우담종합고, 우담정보고, 우담여고, 우담 유치원. 규모가 작은 학교법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학을 세울 만큼은 전혀 아니거든요. 재단이 믿을만한지 모르겠어요. 김 사무장님은 학교를 인수해서 명칭을 아예 우리 병원 이름하고 같은 이산대학교로 바꾸는 것까지 얘기를 하더라고요. 장차 우리 병원을 이산대학교병원으로 개칭하자고까지.”
“그 사람, 회의에서 너무 앞선 얘기를 던졌구만.”
“분위기를 자기 쪽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였겠죠.”
“네 생각은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