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미주의 의중을 묻는 한 이사장의 질문에 미주가 들고 있던 과일을 내려놓고 자세를 차분히 가다듬은 채로 말을 이었다.
“더 알아볼 것이 많아 보여요. 시간은 좀 걸릴 것 같고요. 뭐 그쪽도 아버지가 계속 부재중이시면 당분간은 무얼 어떻게 진행하긴 어렵겠지만요.”
“좀 더 앓아달라는 얘기냐?”
“잠시만 더요. 너무 오래 걸리면 아예 아버지 자리를 노릴 테니까 그렇게는 말고.”
“알겠다.”
“메디케어센터 얘긴 제가 꺼냈어요.”
미주가 다시 무심히 과일이 꽂혀 있는 포크를 들며 말했고, 한 이사장은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먹으려고 입에 넣었던 배를 도로 꺼내었다.
“네가 뭘 알고?”
“현지 병원과 조인트 해서 해외 분원 운영하는 것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어떻게 니가 그걸 알아.”
“집에서도 듣고, 이사장실에서도 듣고. 그렇게 큰소리로 통화하시면서 남이 모르길 바라신 거예요?"
"······."
"다 알아요. 김인철 이사장도 알고. 원래 모르는 사람 없다고요. 어차피 비밀 아니잖아요, 그거. 최근에 해외 다녀오신 것도 다 그것 때문 아녔어요?”
한진웅 이사장이 멋쩍은 지 손바닥으로 눈을 한 번 쓸어 비비며 말했다.
“네가 애비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얼마 안 됐어요, 관심 가진지는."
미주가 쑥스러운 듯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암튼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추진해보고 싶어 하신단 말 전했어요."
"알았다."
"그리고 사전조사 차원의 출장이 몇 차례 더 필요할 텐데 그것도 아버지 대신 제가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어요. 다들 이견 없이 수용했고요.”
"니가 다녀올 거라고?"
"왜요? 싫으세요?"
“동남아 쪽 몇 군데를 네가 다녀오도록 해. 반응들이 어떻더냐.”
“알아보다 말겠지 하는 분위기 같았어요.”
“그럴 리가······.”
예상치 못한 미주의 말에 한진웅 회장이 다소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 비위 맞출 필요가 없으니 다들 진심이 나왔나 봐요.”
미주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한 이사장을 놀렸다.
“그렇지만 전 아버지 계획이 꽤나 비전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미주가 테이블 밑에 숨겨 두었던 두툼한 서류봉투를 꺼내었다.
“메디케어센터 해외 분원 사업제안서를 한번 만들어 봤어요. 물론 지금도 아주 잘 만들어진 제안서 몇 개를 가지고 계시겠지만.”
예상치 못한 미주의 제안에 한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 녀석. 공부나 할 줄 알고 진료 보는 거 말곤 관심도 없는 줄 알았더니만.”
“저 아버지 딸이잖아요.”
미주가 당연한 걸 뭘 놀래고 그러냐는 듯이 말했다.
2장 분량의 요약서와 15장 분량의 제안서, 그리고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넘을 관련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미주의 사업제안서를 훑어 넘겨보던 한진웅 이사장이 제안서의 종잇장을 넘기다 말고 미주에게 소리쳤다.
“류현준? 이 놈 이름이 여기엔 왜 들어가 있는 거냐?”
“꼭 필요한 사람이라서요.”
꼭 필요한 사람 ‘류현준’을 만나기 위한 자리였다.
현준을 차에 태우고 미주는 제법 근사한 분위기의 중식당으로 향했다.
“선배가 중식을 아주 썩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오늘은 이런 데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좀 더 그럴듯할 것 같아서 말이죠.”
미주가 설레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미주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식성을 떠올린 현준이 혼잣말처럼 읊조리를 입을 떼었다.
“미주는 좋아하잖아. 웬만한 요리는 다.”
“어머, 기억하고 있네요?”
미주가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로 현준을 보며 웃었고, 현준은 소원풀이를 한 것 마냥 속이 좀 후련해졌다.
“활짝 웃으니 보기 좋네.”
“어머, 내가 그랬어요? 메뉴판 앞에선 마음을 절대 숨길 수가 없다니까, 하하. 자요, 음식은 선배가 골라요. 이사장님 허락 맡고 법인 카드로 사는 거니까 제일 비싼 거 먹어도 돼요.”
미주가 메뉴판을 현준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버님이 왜?”
“선배한테 미리미리 잘 보여 두라고요.”
“그러니까 왜?”
“선배 다시 스카우트하려고.”
현준이 펼쳤던 메뉴판을 다시 덮으며 미주에게 다시 물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게?”
“당장 이산병원으로 업어가겠단 얘긴 아니에요. 오늘의 만남은 일종의 물밑 작업이랄까, 뭐 그런 거?”
여전히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준에게 미주가 커다란 숄더백 안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서류 하나를 꺼내었다.
“다는 아니고, 선배가 참고할 수 있을 만한 것 추려서 정리한 거예요.”
“선배가 소문으로 들었다던 프로젝트가 이게 맞나 모르겠네. 비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몰랐어. 심장센터 확장하는 것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지.”
현준이 미주가 건넨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건 그냥 내 업무고요.”
“근데 이것 때문에 왜 나를······.”
“해외 분원에서도 난임 클리닉을 운영할 생각이에요.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만큼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증할 수 있는 젊고 유능한 의사가 필요해요.”
“난 지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알아요. 아끼는 환자도 있잖아요. 이은설 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
미주의 도발에 현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서였다기보다는 미주의 모습이 처음 마주하는 사람처럼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숨어있던 능력을 각성한 초능력자처럼 미주의 주변으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빨리 추진되어도 족히 3년을 걸릴 거예요. 아직 첫 삽 뜨지도 않은 걸요. 그 사이에 결과가 나겠지. 이은설 씨도, 나도. 그런 후면 선배도 좀 쉽지 않을까? 결정하는 거?”
미주가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듯 현준을 몰아붙였다.
“너, 한미주 맞아?”
“뜬금없이 질문이 뭐 그래요?”
“제2의 자아가 의식을 지배하기라도 한 거야, 뭐야?”
현준의 목소리는 화가 난 듯 높아진 상태였다.
“너무하잖아.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바뀌어버리면, 나더러 도대체 적응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농담 같은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는 현준을 보며 미주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2의 자아까진 아니에요. 좀 되바라진 한미주가 된 것뿐이니 당황하지 말아요, 선배.”
그러나, 현준에게 하염없이 흔들리던 과거의 한미주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은 분명했다.
현준이 고급 중식당의 별실에서 달라진 미주에게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동안 은설은 준수와 함께 동네 태국식 레스토랑의 메뉴판에 적응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준수 씨는 이것들 이름 보면 뭔지 알아? 난 하나도 모르겠어.”
“왜? 그래도 몇 갠 알지. 같이 TV에서 본 것도 있고 그런 것 같던데. 저번에 ‘배낭 메고 세계여행’인가에서 봤잖아. 나시고랭 같은 거.”
“나시고랭은 인도네시아 음식이고.”
“그래? 태국 아니고?”
“여기 있네. 팟타이. 이거 시켜요. 이거랑 또···음······ 똠양꿍 시켜볼까?”
“호불호가 갈리던데.”
“우린 아무거나 다 잘 먹으니까 괜찮을 거야. 여기요~”
남아도는 도전정신을 쏟을 곳이 필요하다는 듯 은설이 신이 난 표정으로 주문을 했다.
태국음식점에 왔으니 당연하다는 듯 음식을 기다리며 나눈 둘 사이의 대화는 수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요새 도통 연락이 없네.”
“궁금하면 먼저 해보지, 왜.”
“그러게. 근데 쇼핑몰 준비하는 거 같았는데 그게 잘 되고 있는지 뭔가 틀어진 건지 모르겠어서 그래. 괜히 물어봤다가 속만 상하게 할까 봐 연락해 보는 걸 자꾸 미루게 되네.”
“멀리 있어서 더 궁금하다. 그치?”
“응.”
“그럼 우리 태국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