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응? 수지를 보러 가자고?”
“겸사겸사. 은설 씨도 휴직까지 해가며 쉬는 건데 기왕이면 태국에 있는 좋은 리조트 같은 데 가서 제대로 힐링하고 그러면 좋잖아."
"그렇긴 한데······."
"나는 이게 궁금해서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망설이는 목소리를 내는 은설에게 준수가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검색창은 ‘송끄란’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물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얼마 전에 무슨 다큐 같은 걸 봤는데 이 축제에 대한 게 나오더라고. 엄청 재밌어 보이지?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참여한대.”
준수에게서 건네받은 휴대전화 화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은설이 이제야 뭘 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준수의 말을 받았다.
“타이 전통 새해 기념 축제구나. 이게 언제 하는 건데?”
“다음 주.”
“엥? 그걸 어떻게 가?”
“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사흘 리프레시 휴가야. 거기에다가 원래 있는 연가 이틀도 붙이면 1주일 정도 시간 낼 수 있어. 주말 두 번 합하면 최장 9일. 죽이지?”
“그래도 돼?”
“어차피 다음 프로젝트가 아직 안 잡혀서, 회사에서도 뭐라 그러진 않을 거야. 프로젝트 잡혀 있어도 다들 그렇게 한 번씩은 해외 다녀오고 그래.”
“근데 지금이 목요일 저녁인데 우리가 다음 주 월요일에 태국에 있을 수 있을까?”
“해외여행은 원래 이렇게 가야 싸게 할 수 있는 거야, 이 사람아. 표는 내가 구해 놓을 테니까 은설 씨는 얼른 수지 씨한테 연락 넣어보기나 해요.”
준수가 거드름을 피우며 물정 모르는 소릴 하는 은설을 타박했다.
별안간에 추진되고 있는 여행에 아직 어안이 벙벙한 은설이 못내 억울한 기분이 들었는지 툴툴거렸다.
“자주 다녀봤어야 알지. 돈 벌어 좀 놀만한 여유가 생기니 시간이 제일 비싼 방학 때밖에 안 났잖아요, 여태까지 나는.”
그러면서도 은설의 손은 수지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느라 여념이 없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은설이 다시 걱정이 밀려온 듯 준수에게 물었다.
“수지가 바쁘면 어떡하지?”
“그럼 우리끼리 놀다 오는 거지.”
“좋아. 알았어요.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보겠어.”
‘톡’하는 터치로 보내기 버튼을 누른 은설이 시한폭탄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휴대전화는 신경을 끄도록 해요. 음식 나왔어.”
준수가 살짝 흥분 상태에 빠져 있는 은설을 진정시켰다.
“수지가 말이 없어서요. 원래 거의 재깍재깍 답신이 오는데”
“밥 먹나부지, 거기도. 8시 넘었어 지금. 우리가 엄청 늦게 먹고 있는 거잖아, 지금.”
“그런 건가······.”
동네 먹자골목 안의 태국식당이었지만 음식은 아주 맛이 있었다.
“오, 나 태국음식 좋아하나 봐요. 다 맛있어. 태국 가면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은설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공깃밥 하나 추가할까? 재스민쌀밥으로.”
똠양꿍 건더기가 거의 다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쉬웠는지 준수가 은설에게 밥을 말아먹자는 제안을 했다.
은설도 흔쾌히 오케이를 했고, 둘은 대접 가득 나온 재스민쌀밥은 그냥도 먹어보고 똠양꿍에 말아도 보고, 팟타이 소스에 비벼도 보며 이리저리 탐구하듯 맛있게 먹었다.
그러는 동안 은설의 휴대전화로 수지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연이어 울리는 메시지 도착 알림음에 급격히 흥분 상태가 된 은설이 미처 입안으로 다 밀어 넣지 못한 재스민밥을 몇 알 흘려가며 급히 숟가락을 내렸다.
이윽고 달처럼 밝은 미소를 띤 은설이 준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지가 ‘오예!’래요. 이사 간 집에 방이 남아돈다고 방콕으로 오는 거면 호텔 예약하지 말고 자기네 집으로 오라는데?”
숙소 걱정이 해결된 준수가 은설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야르! 난 두 번 해야지. 오예! 오예!! 그럼 쏭끄란은 방콕에서 즐기는 걸로!”
“오 야르는 또 뭐야?”
“있어, 이런 게. 옛날에 부산 애들이 진짜 신나면 하는 말.”
“그렇게 신나?”
“오 야르으!”
현준과 미주의 식사는 흥 없이 매우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먹는 내내 현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미주가 메디케어 센터의 해외 분원 개원에 대한 거시적인 계획을 말하면 듣고는 있다는 듯 고개만 간간히 끄덕일 뿐이었다.
“너무 그렇게 관심 없는 거 티 내지 마요, 사람 무안하게.”
“아, 미안.”
“충분히 예상하고 선배에게 이야기 꺼낸 거니까 미안해할 것까진 없고요.”
“관심 없어할 줄 알았다면서 왜······.”
“한 번에 오케이 하거나 훅 빠지는 거 원래 선배스타일 아니잖아요. 대신 일단 손을 대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밀고 나가지, 그런 면에서 우리의 결혼과 이혼은 참 선배답지 않은 선택들이었어. 그쵸?”
“······.”
“선배를 완전히 설득해서 내 사람 만드는 거, 삼 년 바라보고 얘기 꺼낸 거예요.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놓치기 아까운 인재인 건 확실해, 선배는. 하루라도 빨리 우리 병원 쪽으로 마음 돌려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식사는 다 한 건가?”
“응. 여기 후식도 맛있어요. 나 그것까지 먹고 갈래.”
“그래.”
미주가 서빙 직원을 다시 불러들였고, 이미 익숙히 알고 있는 듯 메뉴판도 보지 않고 디저트 메뉴를 주문했다.
“선배는?”
“난 됐어.”
곧 중국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아이스크림튀김이 커다란 접시에 담겨 미주의 앞에 놓였다.
“어릴 때 이거 먹고 반했던 게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아 있어요. 잊을 수가 없어서 여기 오면 꼭 마무리는 이걸로 해요. 나는 첫사랑이 사람이 아니고 음식이었나 봐.”
미주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현준은 그제야 예의 그 한미주를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 튀김을 먹는 동안 미주는 행복한 이야기만 했다.
컨디션이 부쩍 괜찮아졌다며 자신의 건강 관리 근황을 전하기도 했고, 주말마다 밀린 6개월치 약속 나가느라 바쁘다며 잘 지내고 있단 이야기를 돌려했다.
두 시간 가까이 입을 다물고 있다시피 했던 현준도 이때만큼은 너그럽게 웃기도 하고 함께 알고 있는 미주 친구의 근황을 묻기도 하며 대화다운 대화를 이어갔다.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진 것을 느낀 미주가 이제 다시 때가 되었다는 듯 말끔히 비운 디저트 접시를 한쪽 옆으로 치우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나가기 전에 나 선배한테 한 가지 더 제안해도 돼요?”
“또 뭘?”
“조금 놀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요.”
“오늘 내내 얘기했던 것들보다 더 놀라운 게 있나?”
“아마도?”
“해. 놀라지 않을 테니.”
“두 번째 소파술을 하고 다시 한번 조직검사를 해보면 아마 결과가 좋게 나올 거예요, 나. 느낌이 그래. 선배 생각도 그렇죠?”
“약물에 대한 반응이 상당히 좋은 편이니까.”
“그럼 석 달 정도 더 호르몬 치료를 연장할 거고. 그런 후엔 경과를 지켜볼 테죠.”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어.”
“그때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고 싶어요.”
“뭐?”
“하루라도 빨리 한진웅 이사장님께 그토록 원하시는 3세를 안겨드리고 싶다고요.”
“결혼 상대가 정해진 거야? 벌써 결혼식 일정을 잡은 건가?”
현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겠다는 거야.”
“기증을 받아서요.”
자신도 모르게 현준의 아래턱이 밑으로 빠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이 얼마간 흐르고, 머릿속을 정리한 현준이 이윽고 입을 떼었다.
“이사장님하고 얘기가 된 것 같진 않은데.”
“그거야 당연히.”
“안 돼. 원칙적으로 기증은 결혼 상태의 부부에게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
“그건 산부인과협회가 정한 원칙이죠. 불법은 아니에요.”
“불법이 아니더라도 정식 루트를 통해선 기증을 받을 수가 없어.”
“선배한테 받고 싶어요.”
“······.”
현준이 다시 말을 잃었다.
“다른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난 그저 내가 확실하게 인정하고 안심할 수 있는 유전자를 원하는 것뿐이니까요.”
“말도 안 돼. 아버님이 인정을 하시겠어?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아빠는 판단이 빠른 분이에요. 저질러 놓은 일도 결과가 괜찮으면 덮고 넘어가시죠.”
“결과가 괜찮다는 말의 의미가 뭐지? 아이가 미주만 닮도록 태어난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건 신의 영역이야.”
“선배를 닮아도 괜찮아요. 아이가 아빠를 닮아도 괜찮아야 해서 특별히 선배에게 부탁을 하는 거기도 하고.”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아이가 나올 수도 있어.”
“선배는 그게 매력이잖아요. 닮아도 괜찮아.”
“내가 거절한다면?”
“다른 루트를 찾아봐야겠죠. 선배가 해주지 않으면 음성적인 경로를 통해서라도. 시험관 시술은 진행할 거예요.”
“차라리 결혼을 하지 그래.”
“그러기 싫어서 이러지. 아버지 뜻대로 팔려가고 싶지도 않고, 그런 자리에 들어가 꾸역꾸역 적응하며 살고 싶지도 않아요."
"······."
"하려고 마음먹으니 병원 일도 좋아요. 프로젝트 몇 개 진행하고 있는 것들이 성취감 아주 커. 아버지 하시던 일 내가 다 물려받아서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럼 일만 해."
"남한테 주기 싫어. 재밌단 말이야. 그러려면 아이가 필요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주가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무엇보다 뭐?”
“못 기다리겠어요. 불안해.”
“?”
“팔려가듯 하는 결혼은 죽어도 하기 싫은데.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서 알아가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그 과정이 너무 멀고 길게 느껴져요. 나는 하루가 급한데 말이야.”
“미주야······.”
“시험관 시술을 진행한다고 단박에 아이가 생기는 게 아니잖아. 그것 또한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과정인데, 혹시나 그 사이에 재발이라도 될까 봐 겁난단 말이야.”
“왜 그런 소리를 해. 치료 경과도 좋은 사람이.”
“재발 안 된다는 보장, 선배가 해줄 수 있어요?”
“······.”
“암튼 그렇다고요. 한번 생각해 줘요. 아버지는 어떻게든 내가 설득할 거예요. 그 걱정은 선배 몫이 아니니 나서지 말고요.”
“그렇게 간단한 일처럼 이야기하지 마.”
“그런가. 혹시라도 선배가 감당해야 할지도 모를 아이에 대한 책임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그건 염려 말아요. 그럴 리 없잖아, 내가. 아니, 한진웅 이사장이.”
“······.”
“받으려는 유전자가 류현준의 것이라고 하면 아버지도 아마 수긍하실걸? 미워해도 인정은 하시니까, 선배 능력."
"······."
"남 주기 아까우니 해외 분원 난임센터장 자리에 선배를 추천해도 암말 안 하시지. 사실 속으론 아직도 선배 예뻐하고 계신 거 아닐까요?”
미주가 다시 이야기에 농담을 섞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쇄신해 보려는 의도였겠지만, 현준은 굳어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