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설레네. 뱃속이 간질거려.”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은설의 표정을 보며 준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긴 이번이 세 번째 해외여행인 거지? 나 만나기 전에 학교 선생님들하고 일본 한번 갔다 온 거랑 신혼여행 다음으로.”
“응.”
이때까지만 해도 은설의 대답엔 흥이 실려 있었다.
“공항 근처만 가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럴 때네. 그 기분을 즐기도록 해요. 몇 번 더 나다니면 인천공항이 그냥 청량리역 같고 그래.”
준수가 거드름이 섞인 격려를 했다.
살짝 자존심이 상한 은설이 콧방귀를 뀌며 그의 잘난 척을 빈정댔다.
“설마 또 10년 전에 다녀온 유럽여행 얘기 꺼내려는 건 아니지?”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유럽을 배경으로 한 여행다큐멘터리를 발견하면 준수는 버릇처럼 20대 중반 무렵 다녀왔던 3개월 간의 유럽 여행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모험담에 가까운 여행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은설은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아무리 재미난 얘기도 반복은 세 번까지만이에요. 그 이상 넘어가면 지루하다고.”
새로운 이야기가 전혀 업데이트되지 않고 있는 준수의 여행담은 이미 100번 가까이 반복해서 들은 터였다.
“그거 말고도 많지, 나는! 학생 때 호주도 가봤고. 해외 출장 땜에 3년 전에도 한 번 나갔다 왔었잖아."
"일만 하다 왔잖아, 그땐."
"아냐, 중간중간 놀았어, 많이."
"뭐야, 일만 하다 와서 필리핀 바다 색이 녹색인지 파란색인지 모른다더니."
준수가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시내 구경 했단 소리지. 암튼 일 때문에 왔다 갔다 한 것까지 다 합하면 해외로 나갔다 들어온 게 10번도 넘거든요!”
“눼눼. 자랑쟁이 같으니라고, 치.”
‘자랑쟁이’라는 은설의 비아냥을 ‘실없는 말싸움에서 당신에게 패배했습니다’라는 싸인으로 받아들인 준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은설을 다시 다독였다.
“은설 씨도 이번에 한번 더 해외 다녀오고 나면 인천공항이 내 집처럼 편안해질 거예요. 나처럼. 흐흣.”
“내 집처럼 편안한 건 싫은데. 맨날 가도 맨날 설레는 곳이어야 좋지, 공항은. 안 그래요? 준수 씨가 불쌍한 거지. 출장 몇 번 다녀오는 바람에 그 설렘이 망가져버리다니.”
반전이 있는 공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한방이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준수가 은설을 째렸다.
“암튼 한 마디를 안 져줘요. 어차피 자기가 말 더 잘하는데 그냥 좀 한 번씩 져주고 그러면 안돼?”
“싫은뎅.”
“소고기고추장볶음 산 거 안 준다.”
“알았어요. 담번엔 져 줄게.”
“그럼 튜브 하나는 은설 씨 몫으로 빼놓는 걸로.”
장난하듯 투덕이는 사이 공항버스가 인천공항에 다다랐다.
“밤 비행기는 처음이네. 가게들이 다 문 닫았어요. 왠지 억울한데. 몇 년 만에 공항 온 건데 즐길 게 없다니."
"더 속상한 얘기 해줄까?"
"아니."
"아냐. 할래. 면세점······."
"에베베베베베베."
은설이 귀를 틀어막고 요상한 소리를 내며 듣기 싫은 말을 원천봉쇄 하려 했지만, 준수가 굳이 귓구멍에 꽂힌 손가락을 뽑아 은설에게 이실직고를 했다.
"면세점도 다아~ 문 닫았을 거야."
"아악! 안돼!!"
"편의점 정도는 문 열었을 테니 기분은 낼 수 있을 거예요."
준수가 망연자실하여 주저 앉은 은설의 등을 토닥였다.
한산했던 출국장과 달리 게이트 앞은 탑승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꽤 북적였다.
깜깜한 활주로 위에 놓여 있는 비행기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은설이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참, 수지한테 연락해줘야 하는데. 도착하면 우리 몇 시인 거예요?”
“새벽 1시 10분”
“수지보고 데리러 나와 달라기가 미안하네.”
“어쩔 수 없어요. 그 시간에 우리가 알아서 수지씨네 집을 찾아가는 것도 무리야.”
“그건 그래.”
“선물 많이 가져가니까 수지 씨도 싫은 내색은 안 할 거야, 걱정 마요. 지금 우리 트렁크 안의 반은 다 수지 씨 거라고.”
은설은 수지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아끼게 된 금액만큼의 선물상자를 꾸렸다.
방콕에서도 구하려면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선뜻 집어지지는 않았을 한국의 것들이었다.
각종 주전부리며 마른반찬거리들과 화장품, 수지가 전부터 갖고 싶다던 전자책, 네일아트 키트 등을 이틀 동안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했다.
“근데 대체 뭘 또 샀길래 이렇게 무거워?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엔 이렇게까지 무거운 게 없는데.”
“고추장, 된장, 김치.”
은설의 태국 방문 소식을 들은 수지의 어머니가 한달음에 달려와 은설에게 맡긴 것들도 선물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래. 가는 길에 전해주면 좋지. 우편으로 보내면 비쌀 거야, 그치?”
“응. 무거우니까.”
“기껏 들고 왔는데 입국 때 통과 못하고 그러는 거만 아녔으면 좋겠다.”
짐을 옮기는 일이 오롯이 자기 몫일 것이라 여긴 준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밤 비행기인데도 사람이 많네.”
탑승을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몸을 보태어 서서 은설은 열릴 기미도 없는 탑승구 쪽 게이트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우리 타려면 아직 멀었어. 그렇게 안 노려보고 있어도 돼요. 어차피 줄 선 순서대로 들어가.”
“알아요. 그냥 보고 있는 거야. 마음이 이미 저 앞에 가 있어서 그래요. 응? 저 사람들은 뭔데 줄을 따로 서는 거지?”
“비즈니스석 타는 줄.”
“오, 부럽다.”
“나도 마일리지 모은 걸로 좌석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 걸?”
준수가 마치 당장 비즈니스석 보딩라인에 설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뭐 해. 난 못하는데. 혼자만 비즈니스 타게? 나도 비즈니스로 끊어 줘요.”
은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섭섭한 내색을 하자, 준수는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두고 난감해했다.
“······. 좀 더 모아서 그냥 한 사람 비행기표를 사자. 그게 낫겠지?”
“오케. 그러니까 해외여행 한 번 더 하겠단 이야긴 거죠? 와! 움직인다.”
비즈니스석 대신 조금 더 흡족한 대안을 제시받았다는 듯 은설이 이내 다시 신이 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줄을 따라 앞으로 이동했다.
“어?”
보딩 게이트 쪽을 향하고 있던 은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왜? 거기 뭐 있어?”
준수가 은설을 따라 게이트 쪽을 봤을 때는 길게 늘어선 이코노미석 보딩라인과 텅 빈 비즈니스석 보딩 게이트가 보일 뿐이었다,
“뭘 본 거야?”
“아는 사람 뒤통수. 본 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