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현준은 실롬역 근처의 쇼핑몰의 카페에서 축제를 즐기는 인파들의 물장난을 내려다보며 형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묵음처리 된 축제의 현장은 소리를 죽인 채 보는 공포영화처럼 감흥이 없었다.
무심히 고개를 들어 한산한 쇼핑몰 전경을 둘러보는 데 시선 한편에 홀딱 젖은 채로 서성이는 형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기!”
현준의 목소리를 들은 형석이 잠시 놓쳤던 엄마를 찾은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현준에게 뛰어왔다.
“와, 씨. 여기 장난 아니네.”
“어머니랑 이모님은?”
“호텔 모셔다 드리고 왔지. 오늘은 호텔에서 발마사지만 받고 바로 주무셔야겠더라고. 울 엄마 진짜 할머니 다 됐나 봐. 넌 뭐 했냐, 오늘?”
“호텔에서 학회 발표 준비 했어.”
“거짓말하지 마.”
“그냥 쉬었어, 나도.”
“왔으면 놀러 다녀야지 돈 아깝게 쉬긴 왜 쉬냐, 여유로운 자식 같으니라고.”
현준과 함께 있으면서도 형석의 시선은 축제가 한창인 실롬거리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궁둥이 들썩거리지 말고 내려갔다 와.”
“같이 가자.”
“싫어.”
“젊은이가 왜 그렇게 패기가 없어?”
“너도 말만 그렇게 하지 내려가진 않고 있잖아.”
“난 여기 길을 잘 몰라서 그러는 거고.”
“가자. 나 있는 호텔 쪽으로 가서 한잔 해.”
“그래. 안 멀면 걸어 가자.”
쇼핑몰에서 나오고 난 뒤 형석은 기어이 물총을 샀다.
나름 갖추어 차려입은 현준의 꼴은 이내 반바지에 민소매를 입은 것만도 못하게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불평 없이 오래간만에 크게 즐거워하는 형석의 뒤를 따라 묵묵히 걷는 것으로 현준은 나름의 우정을 표현했다.
호텔로 돌아와 차림을 정비한 현준과 형석은 곧장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야, 여기 좋다. 방콕 야경이 한눈에 다 보이네.”
형석은 여전히 신이 나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너랑 놀아야 하다니, 참.”
현준이 싫지 않은 표정으로 싫은 내색을 해댔다.
“감사하지? 오냐, 많이 감사해라.”
“어머님이랑 이모님 모시고 내일은 어디 가냐?”
“멀리 가. 내일은 아마 너랑 못 놀아줄지도 몰라. 매끌렁이랑 암파와수상시장 갈 거야.”
“잘 됐네.”
“저녁에 좀 일찍 도착하면 연락할게.”
“하지 마.”
“왜? 미주 씨라도 만나?”
“갑자기 미주는 무슨?”
“미주 씨도 여기 출장이라던데?"
"?"
"여행 때문에 예약을 좀 당겨서 진료받았거든. 태국 갈 거라니까 자기도 출장이라고. 여차하면 방콕에서 만나자고 농담하면서 인사하고 나왔어.”
“미주한테 내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어?”
“아니, 니 얘긴 안 했어. 나도 딱히 미주 씨랑 너 사이에 끼고 싶진 않다.”
“잘했어.”
“난 또 둘이 일정 맞춘 거에 내가 눈치 없이 낀 거 아닌가 했지.”
“아니야. 그런 거.”
일부러 현준의 뒤를 밟을 만큼 미주는 한가하지 않았다.
또 그렇게 질척이는 성격도 아니었다.
현준은 일전에 미주가 했던 은밀한 제안에 어떠한 답도 주지 않은 상태임을 잠시 생각했다.
오늘 미주의 일정은 그것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메디케어센터 해외 분원 개설과 관련된 출장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현준의 머릿속엔 태국에 와서도 우울해하고 있을지 모를 미주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일 뒤로는 서로 연락 없었던 거지?”
형석만이 미주의 비밀스러운 제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응.”
“니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 미주 씨가 먼저 너한테 연락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형석이 자못 진지해진 표정으로 현준과 미주의 상황을 분석했다.
“?”
“미주 씨가 서툴게 배수의 진을 친 거 같아."
“배수의 진이라니?”
“미주 씨, 이기적인 사람도 아니고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지 않나? 그래, 뭐. 암치료 시작하면서 인생 사는 방식이 좀 변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욱 미주의 제안에 답을 할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미주가 도대체 왜 그랬다는 거야?”
현준은 미주의 행동에 대한 형석의 다음번 분석을 재촉했다.
“정리.”
“뭐?”
“정리를 하고 싶었던 거 같아. 어떤 쪽으로든.”
“뭐를?”
“뭐긴, 바로 너지. 치료 진행하면서 다시 너하고 내밀해진 기분이 들었겠지. 그건 뭐 당연한 거고. 헷갈리기 싫었던 거 같아. 미주 씨는 너한테 미련이 있는 게 확실했잖아.”
“미주가 미련을 접었기 때문에 최근에 미주와 내가 좀 더 편해졌던 거였어.”
“모른 척하지 마, 새꺄.”
“······.”
“암튼. 너하고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싶다."
"······."
"야, 설마 미주 씨가. 응? 니 성격 다 아는 사람이. 니가 들어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그런 무리한 제안을 했겠어? 더 깔끔한 방법이 있는데?”
"······."
“니 입에서 나올 대답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겠지. 차라리 그냥 재결합을 하자. 그게 훨씬 깔끔하고 쉽잖아. 음성적인 루트를 통해서 뭐를 어떻게······. 그럴 필요 없잖아?, 재결합하면. 근데 니 마음이 그게 아니라면 말이야.”
“아니면?”
“뭐 니가 다시 도망가겠지. 미주 씨한테서.”
"······."
“아냐? 너 설마 여태 미주 씨한테 기증을 해줄까 말까 그거 고민하고 있었어?”
“······.”
“서툴어, 서툴어. 어쩜 그렇게 둘이 똑같냐. 똑똑이들이 서투니까 서툰 짓도 아주 어렵게 꽈서 하는구나 야.”
“멍청하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부정 안 할게. 미주 씨나 너나 지금은 둘 다 그 말에 해당 돼.”
현준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 있어선 젬병이나 다름없는 것을 자책했다.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너만큼은 공부를 못하겠다’ 던 형석의 말처럼,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형석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꿰뚫는 안목을 가질 자신이 없었다.
“너무 느닷없지 않아?”
“멍청하단 소리는 미주 씨한테 하는 말이었구나.”
“아니. 도대체 미주가 왜 느닷없이 그런 말을 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묻는 거야, 너한테.”
“미주 씨의 시간은 너와 다르게 흐르고 있나 보지. 호르몬치료라는 게 일종의 유예기간을 확보하는 거라며. 언젠간 적출수술 해야 하고. 마음이 급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그건 그렇지만······."
"미주 씨가 너한테 말한 것처럼 정말로 다른 사람한테 기증을 받아서라도 시험관을 진행할지 선 본 남자 중에 하나 하고 서둘러 재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말을 하고 형석은 현준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악이 받쳐 있지 않은 표정을 보고 형석은 해도 되겠단 판단이 들었는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일단은 너하고의 관계를 어떤 쪽으로든 정리해야 아마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었을 거야. 안 그럼 니 꼴이 날 수도 있으니까. 마음 정리 못한 채로 결혼했다가는······. 아, 쏘리. 너무 솔직했네, 내가.”
“인정하는 부분이니 괜찮아.”
“그 후로 연락 안 했댔지? 하, 그럼 뭐 미주 씨도 슬슬 마음을 정리하고 있겠네. 다음번 진료를 네게 보긴 볼 테니까. 아마도 그때쯤이면 미주 씨도 마음 정리를 마치지 않겠어?”
현준은 뜨끔했다.
근간의 현준은 전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연락을 할 수도 그렇다고 마냥 모른 척을 할 수도 없게 된 상황을 몹시 답답해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기나긴 그으~대 치임 묵으은, 이별로 받아 두우 겠 소오~”
형석이 상황에 꼭 맞아 생각이 났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편지’를 흥얼거렸다.
“닥쳐.”
“아, 미안.”
현준이 새삼 놀란 것은 자신이 형석의 입에서 나온 노랫말의 ‘이별’이라는 단어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