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완벽하게 즐거운 날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은설 씨가 이게 없어서 재미가 없었던 거야.”

말리는 은설의 말을 무시하고 준수가 커다란 물총 세 개를 기어이 사고 말았다.

“이거 나중에 어떻게 처리하려고.”

“트렁크도 텅텅 비었는데 한국에 가져가면 되지. 처형네 조카들 주면 딱이겠네, 뭐.”

“아, 이러고 노는 거 체질에 안 맞아.”

이제 막 해가 저물어가는 카오산로드에 은설 혼자만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되똑하니 서 있었다.

준수가 물총에서 흘러나온 물로 손을 적셔 은설의 가슴팍에 무어라 글씨를 쓰며 물었다.

“은설 씨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막 질서정리 해주고 싶지? 저기 막 뒤엉켜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애들 세워놓고 위험하게 그러지 말라고 그러고 싶고. 응?”

“아, 못 보겠어. 짜증 나요. 이거 뭐라고 쓴 거야?”

은설이 찌푸린 채로 준수가 물로 적은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교. 사.”

“뭐야, 이걸 왜 가슴팍에다가 적어 놔?"

준수가 슬슬 뒷걸음질 치며 은설에게 소리쳤다.

“다 내려놔, 이 사람아. 그래야 축제를 축제답게 즐기지. 와하하하!!!”

은설이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여는 순간 준수가 쏜 물줄기가 은설의 입과 가슴팍을 때렸다.

“우왁!!”

방심한 순간 뒤집어쓴 물세례에 옴팡 젖어버린 은설이 준수를 향해 사자후를 내질렀다.

“아, 씨!!!! 뭐야!!!! 코 맵잖아!!!!”

“와하하하!!! 미안!!!!!!”

준수가 물총의 사정거리 밖으로 내달리며 놀리는 듯 사과를 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은설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준수를 노려보며 수지가 물총의 펌프를 당겨 장전했다.

“너만 허락한다면, 대신 복수해 줄게.”

“목숨만 붙여서 내 앞에 끌고 와줘.”

“오키!”

수지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준수 쪽으로 달려들었다.

“어차피 버린 몸······.”

수지가 준수와 물총싸움을 하는 사이 은설이 몸에서 안경이며 팔찌 같이 주렁거리는 모든 것들을 떼어 내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수지가 쏜 물총을 등으로 막아내고 있는 준수가 보였다.

“아니, 저것이! 우리 준수 씨를!!! 공평하게 둘 다 죽이게쓰!!!!!!”




셋이서 주고받던 물줄기는 30밧을 주고 채운 다음번 물통부턴 불특정 다수를 향했다.

생전 처음보고 다시 볼 일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웃으며 날리는 물세례가 은설에게 묘한 통쾌함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는 물줄기도 이제는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인파에 섞여 오늘만큼은 결코 티가 나지 않을 무질서도 마음 편히 저질렀고, 그런 은설에게 누구도 무어라 탓하는 말을 하지 않아 또 한 번 자유로웠다.

한바탕 난리통 속에서 엉망이 된 은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며 준수가 한 번 더 은설을 도발했다.

“완전 좋아하는데? 거 봐요, 축제 한가운데로 들어와야 재밌는 거라니까."

"안 좋은데."

"뻥치시긴!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겨요. 여기 돌아다니는 애들 중엔 은설 씨가 길거리 다닐 때마다 괜히 신경 쓰는 제자도 없잖아.”

“졸업생은 있을지도 몰라요.”

“있어도 지네 노느라 바빠서 어차피 여기 앉아 있는 쫄딱 젖은 여자가 누군지 신경도 안 써. 정 불안하면 내가 아무도 못 알아 볼만한 꼴로 만들어 줄게요.”

“외국에서 아는 사람 만나면 더 눈에 확 들어올 수······. 우왁!”

준수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은설의 머리통에 물총을 쏘았고, 쓸데없는 걱정을 주절거리던 은설이 입과 코로 한가득 물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물살에 머리칼이 온통 앞으로 쏠려버린 채로 은설은 앞도 보지 않고 준수가 있을 법한 쪽을 향해 아무렇게나 또 물총을 쏘아댔다.

“푸학! 그래! 이래 놀아야지, 이 사람아.”

아무렇게나 총대를 휘갈겨대는 은설에게 물세례를 뒤집어쓴 준수가 흥이 돋을 대로 돋았는지 사투리를 섞어가며 은설의 변화에 환호했다.




“가자. 저녁 겸 밤참 먹으러.”

노느라 배고픈 것도 참고 있었던 준수와 은설이 제깍 하던 짓을 멈추고 수지의 말을 따랐다.

“택시 타자. 다른 건 힘들어.”

“이러고 타도 돼?”

은설이 젖은 옷자락에서 물을 짜내며 수지에게 물었다.

“응. 젖은 옷이 당연한 기간이잖아. 좀 걸어야 돼. 여기 너무 복잡해서 좀 떨어진 곳으로 택시 불렀어.”

택시는 좌석에 비닐커버를 씌운 상태로 운행을 했다.

“오, 막살고 왔는데도 괜찮다고 보듬어주는 느낌이다.”

은설의 과한 해석에 수지와 준수가 피식피식 웃어댔다.

“우리 썰, 오늘 제대로 일탈했나 보네.”

“엉. 오래간만에 정말 막돼먹은 하루를 보냈어. 공들여서 도미노 천 개쯤 세워 놓고 한방에 넘어뜨려버린 기분이야.”

“송크란축제 맞춰 오길 잘했죠?”

준수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은설의 호응을 바라며 물었다.

“응. 후련하게 아주 잘 놀았어요.”

수지도 송크란 기간을 고른 준수의 여행 계획을 칭찬했다.

“준수 씨가 은설이한테 찰떡같이 잘 맞는 여행을 준비했네요.”

으쓱해진 어깨로 거드름을 잔뜩 피우며 준수가 두 사람의 칭찬에 자화자찬을 얹었다.

“이게 다아, 응? 내가 항상 은설 씨를 살펴보면서 요즘 우리 은설 씨한테 뭐가 필요한가를 고민하는 그런 천사 남편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거예요.”

“진작 얘기를 해주지. 그럼 고마워서라도 처음부터 신나게 즐겼을 텐데.”

“첨부터 얘기했으면 안 따라올까 봐 그랬지. 내가 꼭 하고 싶은 거라고 우겨야 은설 씨가 여기까지 와줄 거란 것까지 다 계산에 넣은 거지.”

“오, 그랬쪄여? 알았어요. 그럼 두 배로 고마워해 줄게요.”

준수와 은설이 투덕이며 애정 표현을 하는 동안 수지가 공허한 눈을 한 채로 그 두 사람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환복을 한 세 사람은 수지의 안내를 따라 아시아티크 야시장으로 갔다.

규모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꽤나 넓은 곳이었고 그곳 가득 상점들이 줄을 서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가게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은설과 준수에게 수지가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을 했다.

“사지 마. 내일 갈 수상시장이 더 싸. 여기선 밥만 먹을 거야.”

“아. 구경만 오케이. 알았어.”

수지가 가려던 목적지는 상점들 사이를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나타났다.

“골라 봐.”

강가 옆으로 길게 줄을 선 천막 가게들은 온통 먹거리 천지였다.

“와, 뷔페가 따로 없네. 한 바퀴 돌면서 일단 구경할래.”

“수지 씨가 적당히 골라줘요. 여기서 뭐가 맛있는지 제일 잘 아실 테니.”

“그래요, 그럼. 면, 밥 종류는 내가 사 올 테니 꼬치나 뭐 간식거리들 먹어보고 싶은 것 찾으면 사 오세요. 저쪽에 자리 잡아 놓고 있을게요. 은설이 현금 챙겨 왔니?”

“응.”

먹거리 야시장을 한참이나 둘러보고 온 은설과 준수의 양손에는 꽤나 먹음직스럽게 생긴 꼬치 세 자루와 과일주스 세 잔, 새우튀김 한 접시와 로띠가 들려 있었다.

수지가 사 온 팟타이와 카오팟까지 가세하니 꽤나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사 온 것들이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준수가 아주 맛있게 음식들을 흡입했다.

“휴직하고 나서 살이 좀 빠졌었는데 오늘 부로 원상회복 하겠어. 넌 왜 안 먹고 있어?”

준수만큼 열정적으로 포크질을 하면서 은설이 수지에게 물었다.

“입맛이 별로 없네. 아까 너무 놀았나 봐.”

“이래서 살이 다 내려버렸구나, 울 쑤지. 부럽다, 입맛 없는 거.”

“부럽긴.”

은설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수지는 성의 없는 숟가락질을 몇 번 더 했다.

사 먹고야 말겠다며 벼르던 코코넛아이스크림을 기어이 세 사람 앞에 한 그릇씩 가져다 놓고는 은설이 까만 차오프라야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이제 먹어도 되니? 녹겠다.”

“응. 쏘리. 이제 먹어도 돼.”

신나게 인증샷을 찍은 은설은 아이스크림도 신나게 먹었다.

“오늘 재밌었어?”

수지가 호평 일색의 중간평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슬쩍 은설에게 물었다.

“응, 완벽하게 즐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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