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만날 사람은 다 그렇게 만나게 되어 있는 법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썩 만족스러운 은설의 대답에 수지의 등이 쭈욱 하고 펴졌다.

코코넛아이스크림 그릇에 연신 숟가락을 꽂으며 은설이 계속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휴직하고 나서 내가 집순이를 자처하며 했던 건 휴식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서 새 일상을 보내는 거였더라고."

"살림하고 집 꾸미고 뭐 그런 거?"

"응. 스트레스를 줄일 수는 있었지만 쉬고 있단 느낌은 딱히 없었어. 근데 오늘은 정말 완전히 휴식을 취한 기분이야. 비록 몸은 많이 피곤해졌지만."

"히히, 피곤은 하지. 원래 물놀이하면 피곤해요."

낮동안 즐겼던 놀이의 여흥이 남았는지 준수가 은설이 하는 말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히히덕 댔다.

은설은 마냥 해맑게 웃는 준수도 싫지 않았다.

철없는 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은 입에 문 채로 두리번거리는 그가 귀여워 보이는 것을 보니, 마음의 여유가 확실히 생기기는 한 모양이었다.

"찬물 한 바가지 뿌려 씻어낸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어. 이런저런 걱정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고마워 친구야.”

은설의 감사인사에 마음이 뿌듯해진 수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일을 예고했다.

“내일은 더 재미있게 해 줄게, 친구.”




전날의 피로에 못 이긴 세 사람은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둘째 날도 늦잠을 잤다.

체력이 달리는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수지를 그냥 두고 은설과 준수는 아파트 바로 옆의 편의점에 도전했다.

“은설 씨, 잠깐만. 사람들이 맛있다고 그런 거 내가 다 적어 왔어.”

준수가 휴대전화를 꺼내어 메모를 확인했다.

“어포하고, 모찌롤, 껍질 다듬어 놓은 과일······.”

“허전해.”

“뭐가 허전해? 초코가 없어서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수지하고 종일 같이 있으면서 자꾸만 뭔가 허전하고 빈 것 같고 그랬어.”

“남편이 없잖아. 가만. 그러게, 명절에 남편이 없네.”

“지방으로 일 하러 가는 때가 많댔어. 그건 그럴 수 있는데······. 혹시 수지가 남편하고 통화하는 거 봤어?”

“아니.”

“나도 없어.”

“10년 차라며. 자기 전에 잠깐 하나보지, 뭐.”

“그런가······.”

때마침 수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수지가 마트나 편의점 간 거면 우유 큰 거 한 병 사다 달래요.”




수지가 주문한 우유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니 아침상이 벌써 차려져 있었다.

“와, 브런치 맛집이 여기였네.”

수지 없이 강행한 외출에 조금 전 까지도 긴장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은설이 제법 근사한 모양새로 차려진 샐러드와 토스트 앞에서 어느새 무장해제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썰, 배고팠구나. 이거 보고 감동하다니. 간단히 먹고 나가자. 오늘은 종일 쇼핑몰하고 시장구경 할 거야. 나가면 또 맛있는 거 먹을 게 많아.”

수지는 수상 택시를 타고 아이콘시암부터 구경을 시켰다.

저렴한 수상시장구경을 앞두고 굳이 쇼핑몰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웬만한 맛집들은 죄다 모여 있는 쇼핑몰의 식당가에서 은설과 준수는 수지에게 제법 근사한 태국음식을 대접받았다.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라며 은설과 준수가 연신 엄지를 치켜올리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제 가자. 암파와로.”

방콕에서 두 시간 가까이 이동을 하고서야 도착한 수상시장에서 은설은 여행 중 가장 흥분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와, 인사동이 따로 없네. 진짜 현지에 온 느낌 물씬 난다.”

“여기도 그냥 관광지야. 그래도 니가 좋아하는 현지 느낌은 좀 느낄 수 있을 거 같아서 데려 왔어. 해 질 녘에 반딧불이도 볼 수 있고.”

“오, 낭만적이기까지 하네!”

수지가 강가를 따라 늘어선 상점들 사잇길로 은설과 준수를 안내했다.

좁은 길 사이사이에 음식점과 노상테이블까지 있어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또 그게 구경하는 맛을 자아냈다.

준수는 강가의 상점들보다 강 위에 떠 있는 배 위에서 팔고 있는 음식들에 더 관심을 보였다.

“저거, 먹어도 되나요?”

준수가 진지하게 수지에게 물었다.

“기왕이면 즉석에서 한번 더 익혀주는 걸로 드세요.”

수지가 웃으며 적당한 음식을 파는 배를 불렀다.

준수가 바짝 익힌 새우 꼬치와 팟타이를 고르는 동안 수지가 근처의 빈 테이블을 찾았다.

“여기서 먹으면 되는 거예요.”

“이거 진짜 해보고 싶었던 건데. 수지 씨 덕분에 배에서 파는 간식도 사 먹어 보네요.”

“별말씀을. 많이 드세요.”




오후의 수상시장을 많이 습하고 더웠다.

좁은 곳에 몸을 구겨 앉아 음식을 먹으며 준수가 땀을 한 바가지쯤 흘렸고, 수지가 슬슬 지쳐가는 은설과 준수를 카페로 안내했다.

“여기가 제일 유명해. 앉아 쉬기도 좋고.”

근처에선 보기 드물게 드넓은 마루를 가진 카페였다.

음료 가격이 강남 한복판만큼 셌지만, 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이 은근한 자리다툼을 할 정도로 사람도 많았다.

“장사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건데 말이죠.”

준수가 이곳 사장이 제일 부럽다며 농담을 했고 이야기는 자연스레 수지가 준비한다던 쇼핑몰 쪽으로 넘어갔다.

“이래저래 정신없이 바빴어가지고 일단은 진행을 멈췄어. 슬슬 다시 준비해야지, 여기서 계속 살려면.”

“남편 주재원 끝나면 한국 도로 들어가야 하지 않아?”

“난 여기서 계속 살고 싶어. 한국 들어가 봐야 별 볼일 없잖아, 이제. 다시 개발자 할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은설이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므로.

마지막 날의 일정이 방콕 시내의 사원과 궁전을 돌아보는 것이란 말을 듣고 준수가 회사 동료들에게 돌릴 기념품을 사겠다며 나섰다.

“난 아까 여기 오는 길에 사고 싶은 거 샀어요. 여기 앉아서 좀 더 쉴래. 수지야 우리 준수 씨 좀 부탁해.”




준수와 수지가 카페를 나서고 은설은 앉은뱅이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으며 본격적으로 쉴 준비를 했다.

카페 안에선 은설이 구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언어들이 다 들려오는 듯했지만 그중에서도 역시가 가장 많이 잘 들리는 것은 한국어였다.

“한국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곳인 건가.”

두 세 테이블 건너 하나씩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한국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어?”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은설의 눈에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와,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한달음에 은설의 테이블로 달려온 사람은 형석이었다.

“넌 여기 웬일이야?”

은설도 반가움과 놀라움이 한껏 섞인 얼굴로 형석을 맞았다.

“효도관광 왔어. 엄마랑 이모 모시고. 저기.”

“아, 그래? 가서 인사드려야겠지?”

“아냐, 지금 쇼핑한 물건들 꺼내서 살펴보느라 정신들 없으셔. 넌? 놀러 왔어?”

“응. 남편하고 휴가. 수지도 만날 겸.”

“수지? 아, 그랬겠구나. 여기까지 왔는데 절친을 만나야지.”

“내내 수지랑 같이 다니고 있어. 수지네서 홈스테이도 하고.”

“아, 그래?”

"너도 방콕에 있는 거야?”

“응. 좀 길게 와서 모레까지 방콕에 있다가 주말쯤 파타야 가서 이틀 휴양하고 한국 가는 코스.”

“와, 제대로 효도 관광 모시고 왔네.”

“할머니 두 분 모시고 와서 아주 죽겠다, 야.”

“계속 방콕이면 수지랑 다 같이 한번 볼래? 저녁에 어른들 호텔 모셔다 드리고 잠깐.”

“정말?”

“수지한테 물어볼 게. 아마 엄청 반가워할 거야.”

은설의 제안을 듣자마자 형석은 몹시 들뜬 티를 감추지 못했다.

은설과 형석이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전하는 사이 형석 쪽 일행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아, 가야겠다. 투어 신청해서 온 거라 내 맘대로 더 못 있어. 아쉽다. 꼭 연락 줘!”

“응!”

후닥닥 자리로 돌아간 형석이 저린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와 이모를 챙기는 모습이 멀리 있는 은설의 시야에 들어왔다.

은설은 형석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아참, 형석이 심리상담사랬는데."

그리고, 잠시 동안의 만남이라도 형석과 대화를 좀 나누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공허해 보이는 수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현준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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