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설과 준수의 출국 전 날, 수지는 망연한 표정으로 문 닫힌 아난다사마콤 매표소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건기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방콕의 햇볕은 너무나 뜨겁고도 따가웠고, 길 건너편 그늘에서 수지를 기다리던 은설이 결국 수지를 끌고 그늘로 들어와 앉혔다.
“미안. 공휴일이라 문 닫았나 봐. 저기가 볼 만한 게 많은데.”
수지가 정말로 미안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담벼락 배경으로 사진 한방 찍으면 왔다 간 거야. 신경 쓰지 마.”
“내가 어제 검색을 좀 더 해보고 나왔어야 하는데.”
“이런 게 또 자유여행의 묘미죠. 계획이 틀어졌을 땐 일단 밥부터 먹으면 돼요.”
은설과 준수가 불발로 끝난 관람을 신경 쓰는 것보다 수지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에 더 열을 올렸다.
멀리서 온 친구 부부의 의중을 한 템포 늦게 알아챈 수지가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며 본래의 명랑하고 발랄한 목소리 내려 애를 썼다.
“그럴까요, 그럼? 밥 먹으면서 루트를 좀 수정해 봐야겠어요. 근처 맛집이 오늘 문을 여는지는 확실하게 알아 놨으니 이제부터 걱정들은 붙들어 매도 돼요. 하하”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서 은설은 내내 수지에게 도로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어제저녁, 수상시장의 보트 위에서 사람들의 반딧불이 구경이 한창인 중에도 수지는 좀처럼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었다.
기억을 좀 더 거슬러보면 이미 그 배를 타기 전부터 수지는 정신이 없었다.
은설은 수지가 밑도 끝도 없는 딴생각에 빠진 것이 배를 타기 직전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이후부터라고 생각했다.
수지는 그 전화를 받기 위해 은설과 준수가 없는 자리로 피하기까지 했었다.
은설이 대뜸 수지에게 물었다.
“우리 수지 혹시 어디에다가 크게 빚졌니?”
“엥?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빚을 져?”
“어제 무슨 전화 한 통 받은 이후로 영 니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아, 내가 좀 그랬나? 예리하네 이은설.”
“준수 씨도 너 오늘 좀 이상해 보인 대.”
은설의 말에 수지가 준수를 쳐다봤고, 준수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수지의 눈치를 살폈다.
“빚진 건 아니니 걱정 마. 나 돈 많아, 이 사람아. 어제 좀 난감한 부탁전화를 받아서. 그거 거절하느라 그랬어. 거절은 했는데 마음이 계속 좀 싱숭생숭하네.”
“뭔지 되게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을게. 말 안 하고 싶어서 일부러 자리까지 피해 가며 받은 전화인 거잖아. 그치?”
“쎈쑤쟁이.”
마음을 알아주는 은설의 말에 수지가 옅게 웃으며 힘을 내려 애썼다.
“이따 저녁때 애들 만나면 기분이 좀 더 나아질 거야.”
“그러게, 참. 그것도 깜박하고 있었다. 쏭크란 덕에 동창모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쏭크란 때문에 온 건 아니야. 형석이는 어른들 효도관광 모시고 왔댔고, 현준이는 학회 겸 휴가랬어.”
“니가 쏭크란 땜에 왔잖아. 너 아니었으면 어떻게 걔네들을 내가 다시 만났겠니.”
“그건 그렇네.”
은설이 멋쩍게 웃었다.
“참, 시로코루프탑은 드레스코드가 정해져 있는데 애들이 잘 맞춰 입고 오려나 모르겠네.”
약속 장소의 복장규정을 뒤늦게 생각해 낸 수지의 얼굴이 다시금 근심 어린 모양새로 변해갔다.
“괜히 걱정했는데? 야, 외려 니가 좀 오버스러워 보이는 거 같다.”
한국을 떠날 때 입었던 면바지에 캔버스화를 신고선 혹시나 입장이 안 될까 봐 시로코 입구를 들어서기 직전까지 걱정을 한 바가지 했던 형석이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은 갖춰 입었던 재킷을 슬그머니 벗어 팔 위에 걸쳤다.
“이 날씨에 재킷은 왜 걸치고 왔냐. 안 입어도 되는 거 알면서도 가져온 거지, 너?”
“원래 이렇게 입는 게 정답이야.”
“이 정답 강박증 환자야! 너 중학교 때 하복 셔츠도 맨 위까지 매······, 어?”
“왜 그래?”
형석의 눈길 끝이 머문 곳에 미주가 있었다.
현준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형석이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미주를 불렀다.
“어머, 형석 씨! 어머······.”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던 미주 눈에도 형석, 그리고 현준이 차례로 들어왔다.
“미주 씨, 여긴 웬일이에요? 밥 먹으러 왔어요?”
“이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아하! 그랬구나.”
“어떻게 현준 선배도 같이 있네요?”
천천히 다가오는 현준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미주가 형석에게 물었고, 형석 대신 현준이 대답을 했다.
“주말에 방콕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해야 해서.”
“아아.”
현준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미주의 얼굴에 섭섭함이 스쳤다.
“울 엄마 효도 여행하고 기가 막히게 날짜가 맞아서 제가 밤마다 같이 놀자고 쫓아다니고 있는 중이에요. 미주 씨는요? 지금 혼자 밥 먹고 있는 거예요?”
형석이 너스레를 떨며 미주에게 물었다.
“네. 일정 모두 마치고 혼자 뒤풀이 중이었어요. 전 내일 아침 비행기로 한국 돌아가거든요.”
“와, 타이밍 기기 막혔네요. 합석해도 되죠?”
“아······. 네! 뭐.”
흔쾌히 합석에 동의했지만, 미주는 영 현준 쪽을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반대로 현준은 자기 쪽을 보는 일이 없는 미주의 왼편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차마 뚫고 나오지 못하는 말들을 머금은 채로 입술만 들썩이고 있었다.
‘혀 위에서 망아지 몇 마리가 뛰노는 것 같군.’
묻고 싶고, 하고 싶은 말들이 분명 있었지만 아직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었다.
‘기증, 시험관, 의도, 진짜 속내, 재혼’ 등과 같은 말들이 급작스러운 미주와의 만남에 더욱 흥분하여 입 속을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느낌이었다.
미주와 현준이 각각 내뿜는 긴장감이 테이블 위에 역력히 내려앉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형석의 수다 덕분이었다.
“출장은 설마 혼자 온 거예요?”
“다들 시내로 놀러 나갔어요. 돌아가서 바로 바쁠 예정이라 전 컨디션 조절 차 숙소에서 휴식이고요.”
“오호, 그랬구나. 덕분에 방콕에서 정말로 미주 씨를 만났네요. 우린 여기서 모임을 하기로 해가지고.”
“방콕에서 모임을 요?”
“네. 방콕 사는 중학교 동창하고 연락이 되어서 만나기로 했어요. 무려 17년 만에.”
“어머, 어릴 때 아주 친했던 친구였었나보다.”
“내가 그때 엄청 좋아했던 여자친구요. 근데 이미 유부녀래요.”
“하하, 살짝 아쉽게 됐네요.”
만나려는 사람이 여자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야기만으로도 미주는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형석과 그 여자동창 사이에 분명히 은설이 있을 것이었고, 어쩌면 조금 후엔 서울이 아닌 방콕에서까지 은설의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주의 머릿속을 스쳤다.
미주의 예상이 꼭 들어맞았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이 되었다.
“형석아!”
루프탑 바와 가까운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형석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어?!”
형석이 몹시 반갑다는 표정을 하고 손을 흔들며 한달음에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달려갔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은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