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그럴 땐 그냥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정답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어제랑 완전 다르네. 못 알아볼 뻔했다, 야.”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

“백 퍼센트! 벌써 와 있었어?”

“응, 우린 여기 오픈 시간 맞춰 와서 노을 구경부터 했어. 여기 되게 멋있다. 야경 봤어?”

“아니, 아직. 우리도 좀 전에 왔어. 현준이 저 쪽에 있어.”

형석이 가리킨 곳에 마주 앉은 현준과 미주의 모습이 있었다.

“어머, 미주 씨도 있네?”

“너도 미주 씨 알아?”

“응. 지난겨울에 우연히 한 번 본 적 있어.”

“아, 얼핏 들은 것 같다. 그럼 뭐 편히 인사할 수 있겠네. 우리도 좀 전에 여기 와서 우연히 만났어.”

오랜만이라며 현준과 미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은설은 곧바로 준수와 수지에게 전화를 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심드렁한 표정의 준수와 살짝 흥분한 기색이 엿보이는 수지가 미주의 테이블로 왔다.

어느새, 덩그마니 홀로 앉아 있던 미주의 테이블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여섯 사람으로 가득 찼다.




형석은 수지가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부터 호들갑이었다.

멀리 다가오는 수지를 한눈에 알아봤으면서 ‘이게 얼마만이야, 길에서 보면 모르고 그냥 지나치겠다’며 무상한 세월을 탓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 때보다 훨씬 예뻐졌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여 기쁘다’며 흔해 빠졌지만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는 인사도 건넸다.

“원래 이뻤어. 기억이 가물가물 한 가 본데? 정말 보고 싶었던 거 맞아?”

수지는 20년 전의 시크한 중학생 김수지로 돌아간 듯, 형석의 호들갑을 무심한 표정으로 응대하며 장난을 쳤다.

그다음은 미주를 소개할 차례였다.

“아, 여기는 현준이······. 아, 현준이······. 전 와이프. 한미주 씨.”

아직 수지를 다시 만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형석이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미주를 그리 소개해 버렸고,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수지가 센스 있게 수습하고 나섰다.

“이산병원 의사 선생님이시죠? 친척 중에 선생님께 진료받는 사람이 몇 명 있어요. 환자 워낙 많아서 기억은 잘 안 나실 테지만. 친절하게 잘 봐주신다고 소문 많이 들었어요.”

난감한 표정이었던 미주가 그제야 환히 웃으며 수지의 인사를 받았다.

“감사한 얘기를 전해주시네요.”

“김수지예요. 방콕 사는 동창이 바로 저예요.”

수지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미주가 흔쾌히 수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미주가 다시 종업원을 불렀다.

급작스레 사람이 늘어난 것을 설명하는 듯한 태국어 몇 마디가 들렸고, 종업원이 흔쾌한 표정으로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수지의 추천을 받으며 고른 근사한 칵테일과 안주가 곧 다시 세팅이 되었다.

“덕분에 시로코 테이블석에도 앉아 보네요.”

미주가 쑥스러운 듯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고, 상황을 잘 모르는 은설이 나지막한 소리로 수지에게 물었다.

“왜?”

“비싸. 이 자리에서 밥 한 번 먹으면 사오십이야.”

“힉!”

“칵테일은 사 먹을 만 해. 쫄지 마.”

“어.”

아내의 동창모임에 의무감 반 책임감 반으로 불려 나온 남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준수의 표정이 마음에 드는 칵테일을 고르고 나서야 밝아졌다.

“의사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흥이 돋우어졌는지 준수가 샌님처럼 새초롬히 앉아 있는 현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현준의 한 단어 짜리 대답에 살짝 무안해진 준수는 시선을 형석에게로 돌렸다.

“중학교 때 이렇게 네 사람이서 친했었나 보죠?”

“같이 밥 먹던 멤버는 서넛 더 있었는데, 이렇게 넷이서 맨날 도서관을 다녔어요.”

형석이 현준의 몫까지 커버를 하려는 듯 서글서글한 말투로 성의껏 답을 했다.

“은설이는 먼저 전학 가고, 이렇게 셋이서는 그래도 좀 더 오래 붙어 다녔는데 고등학교를 다 다른 데 가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연락이 끊겼어요.”

“그 나이 때야 학교 갈리면 대부분 다 그렇죠. 그래도 이렇게 나중에 다시 만나면 또 그때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고 그러잖아요.”

준수가 상황을 이해한다는 내색을 비쳤다.

“신기하게 그래요. 내 앞에 있는 얼굴은 분명히 30대가 맞는데, 자꾸 14살로 보인다니까요.”




형석과 준수가 한몫을 한 덕에 테이블의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복잡 미묘했던 현준과 미주의 표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한결 편안해졌다.

“아, 뭔가 내 추억들이 집대성된 것 같은 느낌이야. 수지 니 남편도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래간만에 마시는 칵테일이라며 기분 좋게 술을 홀짝이던 수지가 정말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나 이혼했어.”

모두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지와 한 두 다리 건너 인연인 준수와 미주는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듯 가만히 시선을 칵테일 잔 위로 떨구었다.

현준은 형석의 눈치를 살폈고, 형석은 수지와 은설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애 많이 썼었겠네. 멀리서 혼자.”

은설이 놀라는 기색도, 왜냐는 물음도 없이 수지를 다독였다.

은설의 한 마디에 울컥했는지 수지가 잠시 까맣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도로 눌러 담았다.

수지의 고백 한 마디로 은설은 그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는 것을 느꼈다.

깔끔한 대신 어디에도 다정히 찍은 부부의 사진이 없던 집안, 사용하지 않은 지 꽤나 오래된 듯 녹이 슨 면도날, 순간순간 왠지 모를 공허함이 묻어나던 수지의 표정들······.

이상하다 생각은 하면서도 설마 정말로 그런 일이 수지에게 일어났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아니, 은설은 자꾸만 ‘이혼’이나 ‘별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진짜였다니.’




“어쩌다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선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 질문을 먼저 꺼낸 것은 형석이었다.

약간의 직업정신이 묻어나는 목소리 톤이었고, 자못 진지한 형석의 표정에 순간 압도된 수지가 감춰두었던 사정을 순순히 풀어놓았다.

“현지처가 있었더라고. 치앙마이 쪽에. 웃기지? 태국에 와이프를 데려다 놓고도 또 현지처를 두다니.”

“어머나······.”

“얼마나?”

은설은 그저 놀라 욕처럼 들리는 ‘어머나’를 외쳤고, 오늘 처음 수지를 만난 미주는 저도 모르게 얼마나 오랫동안 모른 채로 지냈던 것인지를 물었다.

“짧게 만난 사인 아니더라고요.”

수지가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히 대답했다.

우정의 깊이에 관계없이 은설과 미주가 수지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위로를 보내는 동안 준수와 현준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듯 잠자코 그녀들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내밀한 상담이 전문인 형석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해주고 싶은 말을 참는 눈치였다.

수지의 사연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뭐 암튼 그리 되었으니, 이제 이 자리에서 전남편 이야기는 묻지 않기야. 미주 씨, 우리 14살 때 어떻게 하다가 친해졌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수지의 전남편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결혼과 이혼, 연애, 지지고 볶는 가정사에 대해서도 모두들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17년 만에 모두 모인 자리였고, 각자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충분히 의미 있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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