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알고 보니 아는 오빠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두 시간쯤 시간이 흘렀을 때, 테이블에 남아 있는 것은 준수와 미주뿐이었다.

오가는 추억담들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입장이었던 준수는 약간의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래고자 홀짝인 칵테일에 알큰히 취해 있었다.

형석과 수지는 황금색 돔으로 이어지는 계단 한편에 나란히 앉아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고급스러운 느낌의 라운지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 잔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지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준수를 두고 은설은 홀로 야경 구경을 나섰다.

그리고 곧이어 현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야경 구경에 한창인 인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미주는 차마 현준을 따라 일어서질 못했다.




“여기 정말 좋네요. 덕분에 제대로 즐기고 가겠어요.”

“네헤헤.”

인사도 대화도 아닌 어색한 말 몇 마디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또 한참 동안 시선을 엇갈리게 두는 식으로 준수와 미주는 각자의 영역을 지켰다.

상체를 반쯤 뒤로 돌려 루프탑 바의 전경을 감상하는 듯한 자세로 멀리 시선을 두고 있는 준수를 미주는 찬찬히 뜯어보았다.

‘현준이 그토록 잊지 못하는 그녀가 저 남자의 아이를 간절히 낳고 싶어 한다.’

현준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의 매력이 있어야 할 사람이었지만, 미주의 기준에선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지간히 나온 뱃살과 부들부들해 보이는 팔뚝과 다리.

둥글게 살집이 오른 턱선과 듬성듬성 싹이 오른 수염.

가식 없는 몸짓과 시종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는 눈매.

앞으로 보나, 옆으로 보나 길을 걷다 보면 비슷한 사람을 백 명쯤은 마주칠 것만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지금 현준이 이 사람에게 밀려 외사랑에 가까운 놀음을 하고 생각하니, 미주는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가지 기분이 들었다.

‘꼴이 더 우스워져 보이네, 선배.’

‘이은설은 대체, 왜?’

‘이 사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슨 매력이라도 숨기고 있는 건가?’

비웃음과, 분노와, 궁금증이 뒤섞인 채로 뚫어져라 준수를 쳐다보고 있는 미주의 머릿속에 순간 아주 어릴 적의 이미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준수오빠?”

“에?”

‘오빠’라는 미주의 말에 당황스러움과 의아함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준수가 미주 쪽을 돌아봤다.

“혹시 어릴 때 대신동 쪽에 살지 않았어요?”

“예. 그걸 어떻게······.”

“저 미주예요. 기억 안 나요? 오빠가 자전거 많이 태워줬는데. 세발자전거 뒤집어서 뻥튀기 기계라고 그러면서 페달 돌리며 노는 거 가르쳐주고 그랬잖아요.”

“아! 주인집 딸아!”

준수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젊은 시절 흑역사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 몇 년 대신동 쪽 커다란 단독주택들의 반지하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오물딱거리며 산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주로 주인집 운전기사를 했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운전기사 일을 했던 집에 영수보다 어린 딸아이가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예닐곱 살짜리였는데 외동이라 그런지 심심하면 이런저런 장난감들을 가지고 마당으로 내려와 준수와 영수를 불러내곤 했었다.

놀아주고 있으면 그 시절 가정부라 불리던 아주머니가 간식을 잔뜩 챙겨 마당으로 가져다주어서 꽤나 열심히 놀아주었던 기억이 준수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주인집 딸아이 얼굴이며 이름은 잊은 지 오래였는데 준수보다 네댓 살은 더 어렸던 미주의 기억 속에는 준수의 이름과 얼굴이 살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빠 너무 보고 싶었어요. 진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어떻게 나를 다 기억을 하고. 무지 어렸을 때였는데.”

“그때 나랑 놀아주는 사람이 오빠랑 영수오빠뿐이었는데 내가 어떻게 잊겠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너희 집이 서울로 올라가고 나서 우리 아버지도 기사 그만두고 다시 가게 시작하셨어. 그게 잘 풀려서 그다음엔 뭐 그럭저럭 평범하게 잘 지냈고."

"그랬구나. 계속 가까이 있었는데 몰랐네요. 계속 부산에 살고 있을 줄 알았어요."

"야, 기사도 본 적 있고, 와이프한테 얘기도 종종 들었는데 이 한미주가 그 한미주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미주는 준수에게 영수와 어머니 아버지의 소식도 자세히 물었다.

더불어 전해주는 미주의 기억 속 에피소드들에선 준수의 식구들이 꽤나 따뜻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제 좀 알 거 같아요. 이은설 씨가 남편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요.”

“언제 또 그런 말들을 주고받았어? 여자들끼리는 진짜 금방 친해지나 봐?”

준수가 반색을 하며 미주에게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 그래서요.”

미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준수와 미주가 훨씬 더 오래된 인연을 확인하는 동안 은설과 현준은 루프탑 바의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방콕의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불었고, 하늘거리는 은설의 원피스 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비행하는 기분이다. 슈욱!”

은설이 슈퍼맨이라도 된 것처럼 두 팔을 뻗는 시늉을 했다가 곧 다시 품 안으로 접어들이며 주변을 살폈다.

“나 웃겼니? 칵테일 잔을 들고 올 걸 그랬어. 그럼 이상한 흉내 안 냈을 텐데.”

“안 웃겼어. 그냥 좀 귀엽고 말았어. 괜찮아.”

은설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현준을 올려다봤다.

살푼한 취기가 현준의 목과 귓가에 올라 있었다.

“취했네. 취했어.”

“아닌데.”

그제야 누긋해진 눈매에 힘을 주며 현준이 은설에게서 반 뼘쯤 몸을 떼었다.

“너도 술 잘 못 마시는구나? 주량 얼마야? 솔직히 말해 봐.”

은설이 놀리듯 현준에게 캐물었다.

“아냐. 꽤 해, 나. 양주 반 병은 너끈히 마셔.”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이? 지금도 좀 취한 게 맞는 거 같은 데에?”

은설이 현준의 턱 밑으로 바짝 고개를 들이밀며 현준과 눈을 맞췄다.

“저리 가.”

현준이 손가락을 튕겨 은설의 머리를 밀어냈다.

“아야! 에잇.”

은설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정확히 현준의 오금을 슬쩍 찼고, 무릎이 꺾인 현준이 개업집의 바람인형 같은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엉거주춤했다 도로 일어났다.

“원래 이렇게 개구졌어, 이은설?”

자세를 가다듬으로 현준이 은설에게 장난스레 퉁퉁거렸다.

“실은 나도 쪼끔 취했어. 오래간만에 과음을 했더니.”

“칵테일 얼마나 마셨길래?”

“반 잔.”

현준이 킥킥대며 은설의 주량을 비웃었고, 또 은설이 그런 현준을 나무라며 둘은 오래간만에 아이처럼 티격태격했다.

한참을 그러고 놀다가 잠시 말이 끊긴 사이에 현준이 먼저 은설에게 물었다.

“병원엔 언제쯤 다시 와?”

“잘 놀다 왜 진료 얘긴 꺼내고 그래? 이 의사 선생님아.”

“너 이제 좀 괜찮아 보여서.”

“좀 더 놀 거야. 그만 놀고 싶을 때까지. 묻지 마.”

“그래. 알았어.”

“진료도 말고, 위로도 말고 그냥 지금처럼 나하고 놀아만 줬으면 좋겠어, 니가.”

은설의 고백 아닌 고백에 순간 현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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