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수치스러운 패배감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센티해진 은설이 두 팔을 가지런히 포개어 난간 위에 올려놓곤 턱을 괴었다.

지상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밤하늘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은설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다시 현준을 쳐다보며 니 탓은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 보이고는 또다시 야경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풀거리는 원피스 자락이 흩날리며 물결을 쳤고, 현준은 그런 은설의 모습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정말? 그래서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그랬어?”

샤워를 마친 은설이 놀라움 반 긴장감 반이 섞인 목소리로 준수에게 물었다.

“아니. 굳이 뭐 전화번호까지 교환을 하고 그래. 따로 만날 것도 아닌데.”

“왜? 준수 씨가 어린 시절 고마운 추억의 주인공이라잖아. 나도 그런 식으로 중학교 동창모임도 하고 그런 건데.”

“동창이랑 같나, 어디. 주인집 딸하고 반지하 쪽방 살던 오빠하고 만나서 뭐 하게? 다시 셋방 얻어 사는 기분 느끼게?”

준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은설이 듣고 싶었을 법한 이야기를 했다.

“치, 나한테는 아는 사람이 의사인 게 복인 줄 알라며요. 준수 씨야말로 엄청난 ‘아는 의사’가 생긴 건데.”

“급하면 병원으로 전화하지 뭐. 은설 씨는 류현준하고 잘 놀았어?”

“뭘 놀아. 그냥 옆에 서서 야경구경 한 게 다인데. 왜? 질투 났어요? 그럼 준수 씨도 와서 같이 야경 보고 그러지 그랬어?”

“한미주하고 회포 푸느라 나도 바빴어.”

“세상 좁아, 참.”

“나도 그 생각은 했어.”

“그 바람에 아버님 어려웠던 시절도 알게 됐네.”

“나도 까먹고 살았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우리 식구가 살던 방이 기사대기실 같은 거였더라고.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나 봐.”

“흐음, 그래도 주인집 소녀가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나쁘게 보낸 세월은 아니었나 봐요.”

“그랬으려나. 잘 생각이 안 나. 걔보다 내가 4살이나 더 많은데. 내 기억이 더 흐릿하더라고.”

“의사잖아. 한국에서 젤 좋은 대학 의대 나온.”

“아. 그렇네.”

손깍지를 낀 채로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상념 놀이에 빠졌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은설이 조심스레 준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오늘 마지막 날 밤인데 말이야. 나 오늘은 수지랑 같이 자도 돼? 여행하느라 둘이 수다다운 수다도 못 떨었고, 또 아까 들은 얘기도 있고 해서.”

“아! 맞다 맞다. 가서 얼른 수지 씨랑 놀아요. 난 내일 아침밥 먹으러 나오라고 부를 때까지 방에서 안 나갈게.”

“화장실까지 참진 말고요.”

“페트병 있으니 안 나갈 수 있어요. 걱정 말아요. 바바이.”

“바바이.”




맥주 두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들고서 은설이 수지의 방문을 ‘똑똑’ 두 번 두드렸다.

“암호!”

“시끄러, 빨랑 열어.”

“통과!”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이고 있는 수지가 활짝 방문을 열었다.

“암호 좀 바꾸자. 나이 먹고 읊기엔 너무 체신머리 없다.”

수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오며 은설이 투덜댔다.

“생각은 해볼게.”

마스크 팩을 떼어낸 수지가 얼굴에 남은 에센스를 톡톡 두드려 흡수시키면서 침대 한편을 정리해 은설이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이건 어디서 먹을까?”

맥주 캔과 과자봉지를 들어 보이는 은설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수지가 방 한편에 널브러져 있는 신문 두 장을 꺼내어 침대 위를 덮었다.

“맛있네. 샤워하고 나서 먹는 거라 그런가 더 꿀맛이네.”

“나랑 먹어서 그런 거야.”

“그르네. 맞다. 그렇다, 진짜.”

시동을 거는 경운기처럼 빙빙 도는 이야기만 나누던 둘은 수지가 맥주와 과자봉지를 얼추 비우고 나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혼자 힘들었지?”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왜 말 안 했어? 기지배, 그동안 연락을 안 했던 것도 아닌데.”

“창피해서.”

수지의 네 글자 짜리 대답에 은설의 마음이 찌르륵하고 울렸다.

“그 맘은 이해해. 이해는 하는데, 근데 너도 숨어 지내다시피 하던 나를 굳이 찾아서 위로하고 그랬잖아.”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랬다, 내가. 너 그때 참 난감했었지? 내가 자꾸 후비고 헤집어서.”

은설이 부드러운 웃음 아래로 차분히 가다듬은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나중엔 편했어. 가릴 게 없어져서.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수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맥주를 홀짝이다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종아리를 의미 없이 쓰다듬다가, 더 할 게 없는지 베개 위로 훌렁 드러누워서 또릿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의 매립등에서 쏘아지는 빛이 눈이 부셨는지 가느다란 팔뚝으로 눈가를 반쯤 가린 수지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너도 누워. 얘기 길어.”

은설이 먹고 마시던 것들을 대충 정리해 침대 협탁 위로 밀어 두고 수지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도 한참을 더 얘기가 없는 수지에게 은설이 먼저 말을 걸었다.

“실은 좀 이상하다 싶었어. 여기 온 첫날부터.”

“뭐가?”

“뭐라 그래야 하나. 좀 분위기가 뭔가 어색했달까."

"그랬어?"

"응. 나중에 깨달았지. 집에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거. 어느 집엘 가든 으레 한 두 개는 걸려 있는 액자가 없더라."

"그게 티가 다 나는구나."

"그리고 꽤 비싼 면도기에 잔뜩 녹이 슬어 있다고 준수 씨가 그러더라고.”

“후-.”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마음을 다잡았는지 수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혼 진행하면서 액자를 다 엎어 놨었어. 그거 말고는 정말, 그 사람이 두고 간 물건들은 쳐다보는 것도, 손을 대는 것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방치해 뒀었고."

"이해해. 나도 그런 적 있어."

은설은 정리하지 않은 채로 방치 중인 호르몬제와 배란테스트기며 임신테스트기들을 떠올렸다.

"너 온다기에 부랴부랴 액자만 걷어다가 창고에 처박아 뒀어.”

“그랬구나.”

“거실 화장실에서 그 사람 면도기가 녹슬어가고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미안. 오기 전에 정리를 했었어야 하는데.”

“아냐. 준수 씨가 면도기를 안 가져와서 좀 빌려 써볼까 하고 기웃거리는 바람에 보게 된 건데.”

“정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아직 엄두를 못 냈네.”

“어차피 이사할 거라며. 그때 다 버리면 되는데, 지금 뭐 하러 귀찮게 손을 대.”

피곤하게 일을 사서 할 필요가 없다는 투로 은설이 수지를 말렸고, 심드렁한 은설의 말투에 수지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망가지는 게 화가 났어. 그래서 일상이 흐트러지는 게 싫었고. 그러자니 그 사람의 흔적들을 그냥 외면하고 방치하게 되더라고.”

“미련이 있어서 그냥 두고 있었던 건 아니란 이야길 하고 싶은 거지?”

“응, 정리해 버리겠다며 집안을 한바탕 뒤집어엎으면, 그 와중에 내가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고.”

“꽤나 다정했었잖아. 얼마 전까지 시험관도 진행했었고. 니가 느낀 배신감이 어마어마했을 거 같아.”

“그러게. 몇 년을 현지처까지 두고 살았으면서 이쪽은 이쪽대로 시험관 시술을 진행했어. 그 나쁜 놈이.”

“미친 XX. 상놈의 XX자식.”

수지를 대신해 은설이 걸쭉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한테 제대로 빌기는 했니?”

“사과는 했어. 사과하고 이혼도 요구했지.”

“바로 이혼해주지는 말지 그랬어. 골탕 좀 먹게.”

“애가 생겼댔어."

"어머."

"내가 10년을 전전긍긍하던 걸 그 여자가 해버렸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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