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은설은 아무런 리액션을 할 수가 없었다.
은설의 침묵에 수지도 덩달아 침묵을 했고, 어색한 정적이 몇 분쯤 지속되었다.
“······.”
“······.”
“······후우.”
은설이 긴 심호흡으로 다시금 소리를 내자, 수지도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다 포기하겠대. 애를 위해서 그래야겠대. 그래서 그러라 그랬어.”
“뭘 다 포기해? 지 좋은 거만 하려는 거면서."
수지에게 완전히 감정이입을 한 은설이 화가 잔뜩 오른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회사를 그만둬버리더라고. 본사 복귀 명령이 떨어졌었거든. 뭐 수완 있는 사람이라 안 그래도 여기서 사업 벌일까 그러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그게 뭐가 다 포기를 한 거야, 치.”
“내 명의로 되어 있던 상가의 지분도 포기를 했어. 자기 따라 여기 나오는 바람에 경단녀 되어서 한국 돌아가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아······. 너 상가도 있었어?”
은설의 눈이 한 템포 늦게 동그래졌다.
“아파트 대신 사둔 상가가 있었어.”
“대박. 진짜 다 포기했네. 아주 경우 없는 놈은 아니었구나.”
“그런가.”
“상가는 좀 부럽구나. 그렇다고 그 나쁜 놈의 괘씸죄가 없어지진 않아.”
은설이 다시 단호한 목소리로 수지의 전남편을 비난했다.
이제는 모든 마음의 정리가 끝난 듯한 목소리로 수지가 담담히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억하심정에 진흙탕 싸움 만들 각오로 상가 얘기 꺼낸 건데 순순히 내주겠대더라. 그때 그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이혼하려 한다는 거 알았어."
"그거, 상가말이야. 전 재산이었니?"
"응. 그 담부터 나도 찬찬히 생각해 봤지. 가만 생각해 보니 나도 뭐 그 사람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건 아니더라고. 근데 그 애는······."
"애? 뭐, 그 불륜녀 애?"
"어쨌거나 나보다는 더 그 사람이 필요한 게 맞았으니까.”
“얘가 뭐래? 누가 누굴 걱정하니, 지금.”
“그렇지? 근데 암튼 마지막엔 그 사람을 더 필요로 하는 쪽으로 보내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이혼했어.”
“니가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속상하다.”
"시간이 좀 지났으니까. 언제까지 울 순 없잖냐."
“니 마음 괴롭혀가면서까지 쿨하고 그러지는 마. 적어도 내 앞에선 안 그래도 돼. 그러려고 여태 내 푸념 다 들어준 거 아녔어?”
“하하. 나 쿨해 보였어?”
“이혼 얘기 하면서 ‘하하’ 웃고 있잖아. 그러지 마. 이상해 보여. 그렇게 감정 누르기만 하면 나중에 동티 난다고. 기즈배야.”
“새겨들을게. 근데 쉽지가 않아서 그래. 이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은 처음이라. 사실 어떻게 해소시켜야 할지를 잘 모르겠어.”
“한국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친정 옆에 있으면 좀 더 나을 텐데.”
“엄마 속상해하는 거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그것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다."
“알고는 계시지?”
“응.”
“그럼 혹시 반딧불이 투어 때도 엄마랑 통화하느라 표정이 그렇게 힘들었던 거였어?”
“아니. 그 전화 엄마 아니고 엑스 시고모였어.”
“엥?”
“그쪽은 재혼도 서둘렀을 테니까. 난리를 한바탕 더 치르고 있나 보더라고. 시어머니 쓰러져서 자기가 대신 걸었대."
"너한테 왜? 무슨 볼일이 남아서?"
"나보고 그 사람 좀 말려보라고. 남자가 한 때 그럴 수 있다면서 다시 합치면 안되겠냐더라.”
“어이없어. 화나. 같은 여자끼리 너무한 거 아니냐?”
“더 어이없었던 건, 그 사람이 현지 여자랑 바람이 난 게 다 내가 빨리 애를 안 낳아서 그런 거 아니냐면서 일정 부분은 내 책임도 있다는 거야.”
이 대목에서 은설이 껴안고 있던 베개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던져버린 베개를 도로 주워 오는 동안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은설이 헤드락 자세로 껴안긴 베개의 이마쯤 되는 부분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그냥 참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
“밖이라. 전화에다 대고 노발대발하면 거기서 나만 꼴이 우스워질 거 같아서."
"아오!"
은설이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냥 그 사람이 이미 그 여자하고 애를 만들었으니 기쁜 마음으로 조카손주 맞으시라고 말하고 끊어 버렸어. 조카 손주 얘긴 첨 듣는 눈치더라.”
“잘했어!”
“끊고 나서 좀 서럽긴 하더라. 애를 못 낳아서 바람이 난 거고 이혼을 당한 거라니까. 다들 나를 그렇게 보려나?”
“무슨 소리야. 절대! 그렇지 않아!”
라고 힘주어 말은 했지만, 은설도 자신은 없었다.
만일 준수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면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그러한 시선을 받을지 모른단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애가 있었으면 내가 이 상황을 참고 그 사람을 붙잡았을까 생각해 봤는데."
"그랬는데?"
"결론은 ‘아니다’였어. 결국 나는 이 사람과 이혼을 했을 거야. 왜냐면······.”
“사랑이 식어서?”
“물론 없으면 죽고 못 살 것 같은 사랑이 끝난 것도 끝난 거지만 말이야.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그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어.”
“응?”
“그 사람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었어. 그 사람이 몇 달씩 지방 어딘가로 장기 출장을 가면, 나는 여기서 나대로 혼자 아주 잘 살고 있었어. 아무런 아쉬움도 불편함도 없이.”
“아······.”
“자꾸 싸워야 정도 드는 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았어.”
수지는 단 한 번도 남편과 목소리를 높여 다툰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저 사이가 좋아서인 줄로만 알았던 그 상황이 실은 서로를 '종종 만나 함께 노는 손님'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었음을 수지는 이혼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했다.
“아이 문제도 여자 문제도 아니었어. 그건 부차적인 거였고.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가 있었던 거였어."
"······."
"은연중에 그걸 느껴서 나도 불현듯 시험관을 서두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뭔가 불안해서.”
"그랬구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시술 잘 되었어도 큰일이었겠다 싶긴 하지만."
수지가 또 힘없이 웃었다.
수지는 요즘 다시 수험생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고 했다.
틀린 문제를 펴 놓기만 한 채 오답노트에 단 한자도 옳은 풀이를 적지 못하는.
그래서 책상 아래 드러누워 마냥 딴짓만 하고 있는 스무 살의 재수생 김수지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며 답답하다 했다.
수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어라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은설은 은설대로 속이 상했다.
“결혼생활이 정말로 정답이 있는 수험과목이면 실력 좋은 과외 선생님이라도 붙여볼 텐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