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열여섯 개의 배아와 4번의 기회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그거 아직도 들고 있어?”

“내 고생의 결과잖아. 뿌듯해서 놓을 수가 없어.”

은설은 낮에 간호사로부터 들은 배아 생성 결과를 받아 적은 종이쪽지를 종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밤잠을 앞두고 침대에 누운 와중에도 손에 쥐고 있는 종이를 보았다 내렸다 반복하는 은설의 손에서 준수가 가만히 종이를 빼내어 침대 협탁 위에 고이고이 올려놓았다.

“너무 많이 보면 닳아요. 그만 보고 자자, 이제.”

“준수 씨는 안 기뻐? 배아가 16개나 나왔는데?”

“자식이 16명인 거 같은 기분이라 좀 그래요.”

“좀 그런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인거지?”

“몰라. 암튼 좀 그래.”

“치, 난 내 피와 살로 만든 난자 스물여덟 개가 모두 배아가 되지 못한 게 억울한데.”

은설이 짐짓 삐친 체를 하며 옆에 누운 준수에게 등을 돌렸다.

준수가 슬쩍 은설의 등을 쓰다듬으며 종이에 적혀 있던 내용들을 은설에게 다시 물었다.

“수정은 몇 개 됐었댔지?”

“스물다섯 개.”

“그중에 끝까지 살아서 냉동된 게 열여섯 개란 거지?”

“응.”

“시험관에선 그렇게 잘 되는 것들이 뱃속에선 왜 안 됐던 걸까?”

“몰라. 그걸 알면 시험관 안 했지. 우리 둘 중 하나든, 우리 둘 다든 누군가는 티 안 나는 게 부실한 데가 있나 보지, 뭐.”

“미안해요.”

느닷없는 준수의 사과에 은설이 고개를 뒤로 돌려 준수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천정을 응시하고 있는 준수의 눈빛이 서정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은설 씨 보다 내가 더 부실한 거 같은데. 은설 씨가 고생고생 했던 게 혹시나 나 때문인 거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 그때마다 마음이 안 좋아.”

처음 듣는 준수의 속내였다.

은설이 삐친 마음을 거두고 담담한 목소리로 준수를 위로했다.

“힘든 거 이제 다 지나갔는데 뭐. 블로그 또 막 찾아봤는데 이식은 채취에 비하면 아주 껌이래.”

“배아 냉동인가 그거는 어떻게 하는 거야? 한꺼번에 다 얼리진 않을 거 아냐?”

“4개씩. 4개 조로 나누어서.”

의외의 숫자에 놀란 준수가 재차 은설에게 물었다.

“왜 4개나 같이 얼려? 네 쌍둥이 나오면 어쩌라고.”

“4개 다 이식하라고 그러는 게 아니래. 해동과정에서 잘못되는 경우가 많나 봐. 그걸 대비해서 많이씩 얼리나 봐. 50%만 제대로 녹아도 배아 2개는 건지는 거니까.”

“그렇군.”

“그래도 4번이나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러게. 진짜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제 은설 씨가 난자채취는 더 안 했으면 좋겠어. 자식이 뭐라고. 멀쩡한 마누라가 생으로 병을 앓게 되는 꼴을 더는 못 보겠어.”

“생각해 볼게.”

준수에게 지금의 은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임치료를 계속 받고 싶은 내 마음을 모르겠느냐'며 반박을 하기에는 준수의 표정이 너무나도 심각했다.

은설 역시 이 고된 과정을 두 번 더 하라 하면 당장은 망설일게 분명한 상태였다.

“네 번이나 기회가 생겼잖아요. 일단 그거 다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끝내 다시는 하지 않겠다 대답을 않는 은설의 태도에 준수는 깊이 실망한 듯했다.

“신랑 마음도 몰라주고.”

“그런 거 아니야. 내 걱정을 제일 많이 하고 있는 거 알아요. 그냥 결정을 미루고 싶을 뿐이야. 지금 안 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마음 바뀌면 더 크게 싸움할까 봐.”

“왜 싸워. 그냥 안 하면 되지. 난 안 할 거야.”

“지금 배아 16개 얼려 놓고 이 문제도 또 싸우고 그러진 말자고요. 지금은 기뻐만 할래.”




“뭐? 어디?”

“나미비아.”

“대체 거기 가서 무슨 할 일이 있기에······.”

“일이야, 뭐. 여기서 하는 거랑 똑같지.”

“준수 씨가 꼭 가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가면 안 돼?”

해외 장기 출장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준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은설도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몸에 나쁜 게 좀 먹고 싶다는 준수의 말에 거실 테이블에 간단한 맥주상을 차릴 때만 해도 은설은 준수의 입에서 장기출장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갈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영화의 볼륨을 낮추고 은설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준수에게 재차 물었다.

“왜? 김 차장님 총각이랬잖아.”

“거긴 케냐에 가 있어.”

“송 과장, 박 과장, 김 과장.. 과장이 이렇게 많은데······.”

“직렬이 다르잖아, 거기들은. 그리고······.”

“그리고, 뭐!”

“송 과장은 이제 신혼이고, 박 과장은 워킹맘이잖아. 떼 놓고 어떻게 출장을 가. 6개월 출장이니 온 식구 다 이민 가듯이 주재원 내보내 줄 노릇도 아니고.”

“준수 씨는? 시험관 진행 중이잖아. 마누라 떼어 놓고 어딜 가? 시험관 하는 거 회사에 말 안 했어?”

“했지.”

“근데 왜 내보내?”

“이사가 자기도 해봤다고. 시험관은 꼭 남편이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라던데.”

은설이 세상 가장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준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기 그만둬.”

“뭐?”

“맨날 그만두고 싶다고 했잖아. 이참에 그만둬버려 거기. IT회사가 거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라는 데 많다며요. 딴 데 다녀.”

“이 사람아, 이 나이에 무슨 이직이야. 하려면 사업을 시작해야지.”

준수가 흥분한 은설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그러던가. 벼르던 사업을 시작해 보던가.”

앞도 뒤도 재지 않고 성큼 대답을 하는 은설의 태도에 외려 놀란 준수가 이번에는 한발 물러 선 말을 했다.

“말이 쉽지. 사업이 뭐 그렇게 뚝딱뚝딱 대충 막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은설은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말이 없었다.

이미 은설의 머릿속에선 준수 없이 시험관을 진행하는 자신의 처량한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준수는 은설의 옆을 벗어나지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달래 주려 하지도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오른 복수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던 아내였다.

시험관 시술 과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커질 대로 커져있는 상태인 은설에게 준수는 어떤 말도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은설의 옆에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맥주 1캔을 홀짝이기만 하던 준수의 입에서 마지막 한 모금이 마무리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감싸 쥔 팔뚝 안에서 홀로 마음을 진정시킨 은설이 그 소리를 기점으로 스르륵 고개를 들어 준수를 바라봤다.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준수가 은설에게 미한하단 사과부터 꺼내었다.

“미안해요. 내가 능력이 좀 더 있었으면 이럴 때 회사 확 그만두고 은설 씨 옆을 떡 하고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뜬금없이 능력 탓은. 사정 뻔히 알면서 장기출장 보내는 회사가 나쁜 거지.”

“그니까. 이놈의 이상한 회사를 선뜻 그만 못 두는 내 능력이 싫다고.”

“됐어. 그만해요. 이제 정신 좀 차렸어, 나도.”

은설이 아무것도 묻은 것 없는 엉덩이를 괜히 툭툭 털며 일어났다.

“뭐 해? 먼지 나요.”

준수가 괜스레 실없는 투정을 부렸다.

“과잣가루. 털고 청소기 밀려고.”

은설이 무심한 말투로 짧게 대답을 하고는 무선 청소기를 가져다가 바닥을 몇 번 쓱쓱 문질렀다.

“무선청소기 젤 좋은 메이커 꺼 있잖아. 면세점에서 사면 좀 싸려나?”

“글쎄.”

“다녀와. 회사 그만둘 거 아니면 다녀와야지, 뭐. 나 무급휴직 중이라 준수 씨까지 회사 그만 두면 우리 손가락 빨고 살아야 돼. 통장에 쪼끔 모아둔 돈으론 몇 달 치 대출이자 내기도 빠듯하단 말이야.”

“퇴직금 쓰면 되지.”

“그만둘 것도 아니면서 퇴직금 얘긴 왜 해?”

은설이 찌푸림과 웃음이 동시에 지어지는 요상한 얼굴을 하며 준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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