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그만둘 것도 아니면서 퇴직금 얘긴 왜 해?”
은설이 찌푸림과 웃음이 동시에 지어지는 요상한 얼굴을 하며 준수에게 물었다.
“센 척하려고.”
“늦었네, 이 사람아. 지금은 현실을 직시하고 마음을 다잡는 타이밍이잖아요.”
“넴.”
착하게 말꼬리를 내린 준수를 보며 은설이 그제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마누라.”
“미안은 무슨. 사정이 그렇게 돌아가 버리는데 신랑이 뭐 어쩔 수가 있나.”
“진짜 미안해. 그리고 이해해 줘서 고마워.”
준수가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하며 청소기를 손에 쥔 채로 서 있는 은설을 꼬옥 안았다.
“회사를 이해한 건 아냐. 나 아직 속상해. 그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내 남편 속내가 보여서, 그게 안쓰러워서 더 뭐라 안 하는 거지.”
“에웅~. 우리 이쁜 마누라.”
준수가 은설의 손에서 청소기를 낚아채어 소파 위로 툭 던져놓고는 은설을 번쩍 들어 거실 안을 몇 바퀴나 휘휘 돌았다.
“우악, 배! 배!”
“옴마야, 미안해.”
“생리 시작 안 해서 아직도 배가 좀 빵빵하단 말이야.”
덜 빠진 복수 때문에 고생 중이던 은설이 임신한 사람처럼 배를 감쌌고, 다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준수에게 주의를 주었다.
“진짜 미안해. 마누라가 너무 이뻐가지고 순간 깜빡했어요.”
“두 번만 더 이뻐했다간 마누라 맹꽁이 배 터뜨릴지도 모르겠네요.”
“까칠하시긴.”
계속해서 나무라는 은설이 더 이상 출장 때문에 속상해하는 것이 아님을 간파한 준수가 다시 장난스레 은설을 도발했다.
“아니, 이 남자가 눈치를 밥이랑 같이 국에다가 말아 드셨나······.”
은설이 어설픈 복서 흉내를 내며 준수의 팔뚝에 툭툭 펀치를 날렸고, 준수가 은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간단히 은설을 제압했다.
“악, 싫어. 간지럽히지 마!”
유난히 겨드랑이 간지럼에 약한 은설이 준수의 손이 닿기도 전에 소파 위로 몸을 굴리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장난 그만하자. 또 배 아플라. 자 나 주머니에 손 넣는다. 됐지?”
준수가 은설을 진정시키며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로 은설의 옆에 털썩하고 앉았다.
다시 찾은 평온이 둘의 심신을 노곤히 만들었다.
은설이 준수의 팔을 들어 올려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며 몸을 기댔다.
“아, 푹신푹신해. 울 신랑 베고 누우면 구름베개가 따로 없는데.”
“떠나기 전에 많이 베고 누워요.”
“6개월 이랬죠?”
“응.”
“이번 생리 땐 쉬고, 다음 생리 시작할 때 이식 진행한다고 했으니까 일단 내가 두 달은 쉬는 거고. 4번 이식할 수 있을 만큼은 냉동배아가 나왔으니까······."
은설이 손가락을 접어가며 날짜를 세더니 썩 나쁜 것은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을 이었다.
"만약에 잘 안 되면 준수 씨 오자마자 다시 딱 채취부터 진행할 수 있겠다.”
“그걸 또 하게?”
준수가 은설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잘 안 되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냥 대강의 플랜을 그려본 거예요. 꼭 해야겠단 게 아니고."
"그런 부정적인 플랜을 왜 세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준수 씨가 6개월 출장을 다녀온다고 해서 난임치료에 영향을 받지는 않겠구나. 뭐 이런 취지의 계산이었다고요. 놀라시긴!”
애써 찾은 평화에 다시 불을 붙이긴 싫었던 은설이 준수에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며 괜한 갈등의 일으키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가 또 금방 누그러진 준수의 표정에 한번 더 울컥해선 다시 섭섭한 티를 내며 준수에게 투덜거렸다.
“어떻게든 4번 안에 임신을 하는 게 나의 당연한 바람이지. 그게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지금 준수 씨가 나한테 그렇게 눈을 희번덕거릴 타이밍이야? 위로를 해줘도 모자랄 판에?”
“아니. 죽다 살아난 지 보름도 안 지난 사람이 또 그걸 한다니까 그러지.”
준수가 은설을 다시 자신의 품으로 쓰윽 끌어당기며 등을 어루었다.
준수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을 가만히 즐기던 은설이 그제야 생각이 난 아주 중요한 질문을 준수에게 물었다.
“근데 출국이 언제야?”
“2주 뒤?”
“뭐???”
출근길 피크 타임이 지난 오전 시간, 서너 사람 정도가 드문 드문 앉아 있을 뿐인 버스 안의 풍경은 은설의 마음만큼이나 쓸쓸했다.
다행히도 정상 컨디션을 찾은 모양새의 두 번째 생리가 시작이 되었고, 은설은 홀로 병원을 가던 길이었다.
‘준수 씨가 옆에 있었으면 같이 가달라고 졸랐을 텐데.’
덜컹거리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은설의 기억이 준수를 배웅하던 때로 돌아갔다.
“진짜 여기서 배웅해 줘도 되는 거예요?”
“응. 어차피 공항 가면 바로 강부장님하고 만날 거야. 은설 씨 같이 가면 되려 불편해요. 밤늦게 은설 씨 혼자 인천공항에서 집까지 운전하는 것도 마음 쓰이고.”
한여름의 열대야 때문인지 공항버스전용 정류장엔 훅훅한 기운이 정체되어 있었다.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지, 인파로 북적이는 그곳에선 애틋한 이별의 정을 나누기도 쑥스러웠다.
커다란 트렁크를 간수하느라 연신 굵은 땀을 흘리고 있는 준수의 구레나룻 근처를 닦아주며 은설이 마지막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도······. 이제 가면 6개월 뒤에나 볼 텐데.”
멀어도 너무 먼 곳으로 떠나는 장기출장에 대한 긴장감 때문인지 연신 버스가 오는 쪽 차선만 바라보던 준수가 그제야 은설을 다정히 바라보았다.
“영상 통화 많이 걸게.”
“다리 한 짝만 떼어 놓고 가요. 밤마다 비비고 자게.”
“헐. 그럼 은설 씨는 귀를 내놓도록 해요.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만지작 거리게. 귀는 작아서 그냥 주머니에 넣고 비행기 타도 될 거야.”
“치. 뭔 일 생겼다고 연락하면 바로 비행기 타고 와야 해.”
“당연하지, 그건!”
“무서워. 막상 준수 씨 보내려니까.”
준수가 은설의 귓가를 쓰다듬으며 안쓰러운 목소리로 은설을 달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며칠 적응하면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내가 매일매일 전화도 할게요. 여차하면 친정 가서 지내고. 아니면 어머님, 아버님 보고 와서 좀 지내시라고 하든가.”
“그건 싫어요.”
“왜?”
“엄마가 여기저기 열어보면서 살림 잘하나 못하나 검사한단 말이에요. 그냥 내가 친정으로 갈래.”
“크흐~ 그 생각을 못했네. 그럼 그건 은설 씨가 알아서 편한 대로 결정하도록 해요.”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단, 시시콜콜한 일상의 대화가 외려 준수를 떠나보내는 은설의 마음을 달래어 주는 듯했다.
“준수 씨 없는 동안 다이어트를 좀 해야겠어요. 그동안은 말로만 한다 한다 하고 식단조절 다 실패했었잖아. 준수 씨가 사흘에 한 번씩 맛있는 거 사 와서."
"내 탓하기 없기!"
"그럼 호르몬제 탓 할까? 호르몬제를 계속 먹고 맞고 그래서 그런가, 요 근래에 살이 장난이 아니게 쪘어요.”
“그건 인정. 원인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으니 6개월 후엔 날씬한 마누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군.”
“임신한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어야 좋은 거지.”
“아, 그렇네.”
“준수 씨는 거기서 맛난 거 많이 먹고 살 더 쪄오는 거 아니야?”
“걱정 말아요. 나미비아의 더위가 내 살을 쪽쪽 말려줄 거야. 난 그냥 맥주만 조심하면 돼.”
“그게 제일 어렵잖아요.”
“가는 길에 용기를 줘야지, 이 사람아.”
“어? 아······. 왔네. 벌써······.”
은설이 몇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공항버스를 알아보곤 세상 더없이 아쉬운 목소리로 버스의 도착 사실을 준수에게 알렸다.
이별의 순간은 애틋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려는 사람이 꽤 많았고, 준수는 자신의 트렁크가 버스에 실리지 않을까 노심초사를 했다.
가까스로 준수의 짐까지 버스에 실렸고, 준수가 다음번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 은설은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준수가 버스에 몸을 싣고, 시외버스를 타고 홀로 부산에 잠시 다녀오는 것처럼 은설에게 ‘안녕’하라는 손짓을 했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은설은 장난스레 손을 흔들고 또 흔들고, 허벅지 옆까지 손을 내렸다가 이내 다시 들어 또 흔들었다.
버스 안의 준수가 옆사람의 눈치를 보며 우스꽝스럽게 화답을 하고, 크고 작은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그랬었다. 맞다. 그랬었어.’
버스 창에 기댄 은설의 얼굴에 가장 먼저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