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한미주 씨?”
기훈이 먼저 미주에게 인사를 했다.
간단한 통성명을 마치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의 표정에 미묘한 긴장감이 배어 나왔다.
물론 양쪽 모두 그 긴장감이 보통의 맞선남과 맞선녀가 가질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기훈이었다.
“조금 놀랐습니다. 보통은 당사자가 직접 마담을 통해 만남을 요청해오진 않으니까요.”
“대신 평범한 맞선자리는 아니라는 것도 아셨을 테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루트를 통한 이유가 궁금했어요.”
기훈이 호기심과 경계를 동시에 지닌 눈빛을 쏘며 미주에게 질문했다.
“당분간은 아무도 몰랐으면 해서요.”
“무얼······?”
“제 쪽에서 먼저 ‘jk그룹’에 딜을 제안했단 사실요.”
“미주 씨 쪽이요?”
“이산병원에 아직은 저 혼자서만 이 악물며 경쟁하고 있는 분들이 몇 있어요. 아마 조만간 그들 쪽에서도 ‘jk’ 측에 회동을 요청할 거예요.”
기훈이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다시 걱정이 조금 섞인 목소리로 미주에게 물었다.
“지금의 만남을 그쪽에서 모르고 지나가진 않을 텐데요?”
“아마 아버지께서 주선한 맞선인 줄 알 거예요. 잘 될 거라 생각들 안 할 테니 신경도 별로 안 쓰고 있을 거고요. 아시죠? 제 건강과 관련된 소문.”
“아아······.”
기훈은 금시초문인 듯했다.
모르고 있는 티가 확연한 얼굴로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기훈에게 미주가 짓궂게 물었다.
“별로 관심 없으셨구나? 기훈 씨하고 저. 이미 두 번이나 맞선이 틀어졌던 적 있던 건 아세요?”
“그랬나요?”
“둘 다 이혼 경력 쌓인 직후에 맞선자리가 한 번 더 잡혔었는데, 그때 제가 암투병 중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일이 무산된 적 있어요.”
“그랬었군요.”
“그 소문, 사실이 맞아요.”
허튼 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는 듯 무심히 대답하던 기훈이 이번에는 쏟아질 듯 크게 눈을 뜨며 미주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상태인가요? 건강해 보여서 전혀 예상 못했어요.”
“보신 그대로예요. 메디케어센터 해외 분원을 열어서 성공해 보이고 말겠다며 고군분투할 만큼은 회복했죠.”
“축하합니다.”
“혹시 사업 파트너로서 협약을 맺을 때 제 투병 경력이 장애가 되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
기훈이 차분하면서도 확고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그럼 다행이고요. 길게 만날 자리가 아닌데 구구절절 말로 하긴 좀 그런 것 같아서 준비해 봤어요. 집에 가서 풀어보세요.”
미주가 한편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을 들어 기훈에게 건네며 말했다.
쇼핑백 입구의 벌어진 틈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두터운 서류철이 기훈의 시야에 들어왔다.
“준비를 아주 많이 하셨나 보네요.”
“나름 사활을 걸고 만든 거거든요.”
“좋아요. 하죠. 같이.”
“네?”
“하자고요. 미주 씨가 그리고 있는 사업. 파트너십 자리. 우리가 맡죠.”
“이렇게 간단히요? 이 자리에서 오케이라고요?”
“네엣!”
“제가 드린 서류도 검토 안 번 해 보시고?”
기훈의 결정을 못 믿겠다는 듯 미주가 재차 그에게 되물었다.
“함께 일 할지 말지를 서류 보며 결정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요.”
“그럼 무얼 보고?”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딜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그것만 보죠.”
“그래서 한눈에도 제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단 건가요?”
“물론이죠."
기훈의 분석은 단순하지만 명쾌했다.
"일단 한진웅이사장이라는 확실한 배경이 내 결정의 가장 큰 축이라는 건 부인 안 합니다."
"아주 큰 축이죠."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한미주 씨의 눈빛, 표정, 말투 뭐 하나 빠짐없이 확고한 신념이 묻어나는 게 보여요."
"······."
"거기다 마음먹은 바가 있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밀고 나가고 보는 추진력까지. 다 내 스타일이네요. 촉이 꽤 좋은 편인데, 지금은 당신의 미래까지도 믿음이 가요."
"그렇게까지나요?"
"좋은 파트너라면 일단 잡고 보는 게 사업가 아니겠어요?"
"그렇게 봐주시다니 영광인데요."
"별말씀을. 건네준 자료는 내 팀원들과 면밀히 검토하겠지만, 이것이 아니더라도 한미주 씨와는 무엇으로든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꽤나 긍정적인 기훈의 평가에 큰 고비를 넘겼음을 직감한 미주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기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최근 몇 년 간 들은 말 중 가장 기쁜 말씀 해주셨어요, 지금. 감사해요.”
”감사까지야. 서로 좋자고 맺는 파트너십인데요.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나면 당분간은 비밀로 해달라 했죠? 나도 미주 씨에게 내걸 조건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뭐죠?”
“어렵지 않아요. 이 만남 정기적으로 지속해 줬으면 합니다. 가급적이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 눈에 띄게요.”
“네?”
기훈이 미안함과 쑥스러움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아우라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소개하려 들었다.
“맞선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무례인 줄은 알지만 동행을 했습니다.”
기훈이 미주의 뒤편 테이블 쪽으로 손짓을 했고, 선한 인상의 여자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기훈의 옆으로 와 앉았다.
“제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네.”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미주가 담담히 그녀와 목례를 나누었다.
“허락을 받은 사이는 아닙니다.”
기훈의 한 마디로 상황을 파악한 미주는 그들에게 더 긴 사연을 묻지 않았다.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인 알겠어요.”
“1년 정도만. 시간을 벌 수 있으면 됩니다. 이 사람 해산하고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요.”
“아······.”
미주는 대번에 전 국민이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jk그룹 회장의 성질머리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미주의 예상대로 기훈은 자신의 아버지가 취할지 모를 모종의 조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그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여자와 아이를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미주는 다시 한번 찬찬히 기훈의 여자를 살펴보았다.
선한 인상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는, 들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다만, 지금 당장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너무나도 버겁고 힘이 드는지 여자의 얼굴색은 푸석하고 까칠해 보였다.
미주의 입이 미주의 뜻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여자에게 질문을 했다.
“출산 예정일이 언제쯤인지.”
익숙한 질문인 듯 여자가 방긋 웃으며 잘 정돈된 대답을 했다.
“원래는 11월 말인데 10월 말쯤 출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 그럼. 혹시?”
“쌍둥이요.”
“어머! 축하드려요. 축하해요, 기훈 씨.”
“이란성 이랩니다. 둘 다 무지 건강하대요.”
시종 호기로운 사업가의 면모를 보이던 기훈이 팔불출이 되어 아기 자랑을 했다.
미주가 한껏 부러움을 담아 한참이나 축하인사 겸 덕담을 했고, 기훈과 기훈의 연인이 미주의 부러움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한 채로 기쁘게 인사를 받았다.
미주가 흘깃 건너편 테이블의 여자를 보며 기훈에게 말했다.
“진짜 잘 드시네요. 입덧이 가라앉아서 다행이에요. 처음 만났던 날은 입덧 때문에 카페 안의 커피 향도 힘겨워하고 그랬었잖아요, 영미 씨가.”
“예, 아마 그랬을 거예요. 입덧 때문에 입원도 하고 그랬어요, 저 사람.”
“이제 20주 가까이 되었죠? 병원에서 성별 알려 주던가요?”
“아들, 딸이요.”
“어머! 한방에 아들도 얻고 딸도 얻었네요. 한번 더 축하해요, 기훈 씨.”
“그쵸? 근데 저 사람은 동성 쌍둥이길 바랐었나 보더라고요.”
“제가 부러워하더라고 전해주세요.”
자신과 기대가 달랐던 여자에게 섭섭해하는 기훈을 미주가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달래었다.
“아, 미안합니다.”
사업파트너인 미주가 어떤 종류의 투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이미 정보를 공유한 터였다.
생각이 모자랐던 자신의 행동을 미안해하며 기훈이 미주에게 짧게 사과했고, 미주는 대답 대신 기훈의 비밀 피앙세가 먹을 간식을 챙겼다.
“기훈 씨 피앙세는 저기 있는 것들 다 드시고도 조금 쉬었다가 또 드실 수 있을 거 같아 보이네요. 이건 좀 이따 기훈 씨가 포장을 해 가는 게 좋겠어요."
"그럴까요?
"참, 여기 케이크도 맛있는데 기훈 씨 애기들한테 제가 하나 선물해도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