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신선배아 이식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 상태로 임신이 되면 다시 복수가 많이 찰 거야. 대신 생리 시작하고 나면 복수도 잘 빠져나올 테니 빠르게 회복될 거야.”
“그렇구나.”
"하루 입원 했다가 내일 아침에 복수 상태 보고 퇴원 하자.”
"응."
현준의 설명에 수긍을 하면서도 은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현준은 실망한 은설을 위로하려 은설의 수정란 소식을 전했다.
“다행히 채취한 난자들의 상태가 썩 좋은 편이었어. 스물여덟 개 중에 스물다섯 개가 수정되었고 지금 열심히 배양 중이야.”
“스물다섯 개나?”
은설의 얼굴색이 순간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이 준수와 현준의 눈에 들어왔다.
해바라기꽃처럼 환히 핀 웃음을 지으며 은설이 재차 현준에게 물었다.
“수정란이 그 정도로 많으면 동결배아도 많이 나오겠지?”
“확답해 줄 순 없지만. 절반만 동결까지 진행된다 해도 적지 않은 양이긴 하지."
절반.
내림을 해서 12개만 수정이 된다 해도 최소 세 번 이상의 시험관을 진행할 수 있었다.
"와우."
은설의 표정이 살짝 상기되었다.
"배양된 상태에 따라서 3일 배양된 배아와 5일 배양된 배아를 각각 동결시킬 거야. 동결배아 결과는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 줄 거고.”
현준의 말에 준수도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설의 어깨를 감쌌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애썼어요, 마누라.”
“무거워요. 저리 가요.”
현준 앞에서 보이는 애정표현이 쑥스러운지 은설이 슬쩍 준수를 밀어 곁에서 떼어냈다.
“크흠.”
현준이 무안한 듯 시선을 살짝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여기 어때요?”
경쾌한 목소리로 기훈이 미주에게 물었다.
“근사하네요. 근데 차 한 잔 마시려고 굳이 이렇게 좋은 데서 만날 필요까진 없는데.”
미주는 대략 2주 간격으로 강기훈과 만남을 갖고 있었다.
‘데이트’를 가장한 사업 파트너 간의 정기적인 회동이기는 했다.
하지만 현준에게 폭탄처럼 투하했던 ‘기증 제안’ 이후로, 끝도 없는 우울감으로 치달았다가 회복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미주에겐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었다.
기훈을 만나고 있으면, 미주 앞에서만은 감추지 않는 그의 비밀스러운 ‘행복’이 미주를 웃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여기서 식사도 했거든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하던데요. 저쪽 엘리베이터 타고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면······.”
기훈이 은근슬쩍 가리킨 쪽에 앉아있던 여자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미주에게 살포시 목례를 했다.
“어머.”
미주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례를 하고는 한결 부담을 던 얼굴로 기훈에게 건너편 여자의 안부를 물었다.
“같이 오셨었네요. 전에 봤을 때보다 배가 더 불룩해 보여요.”
“쌍둥이라 그런가 저 사람 배가 하룻밤 새에도 훅훅 자라요.”
뱃속의 아이들을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밝게 웃는 기훈을 보며 미주도 안쓰러운 웃음을 지었다.
울컥하며 기훈의 비밀스러운 피앙세가 부러워진 미주가 서둘러 사업 이야기를 꺼내었다.
“동남아 쪽에선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에요. 유럽은 러시아 말곤 아직······. 북미 쪽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반응이 좋지만 고급화 전략이 통할지는 의문이고요."
"우리 쪽은요?"
"기훈 씨 쪽에서 전담하기로 한 식품 쪽은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김 과장님 통해 이야기 들었죠?”
“그 친구가 출장 다녀와선 꽤나 흥분한 상태로 브리핑을 하더라고요.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리도 다시 가닥을 잡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여기요. 말보단 글로.”
미주가 잘 정리된 서류 하나를 기훈에게 내밀었다.
“통하는 데가 있다니까.”
기훈 역시 미주에게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둘은 재빠르게 교환된 것들을 각자의 커다란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미주가 곧바로 종업원을 불러 근사한 에프터눈 티세트를 주문했다.
“저쪽 테이블에도 한 세트 부탁해요. 기왕이면 저쪽 먼저 세팅해 주시고요.”
예상치 못한 주문에 살짝 당황하는 종업원에게 미주는 손가락을 가리켜 한번 더 자리를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엿들으라는 듯 기훈에게 말했다.
“친구가 먹고 싶대서 따라오라고 했어요. 괜찮죠?”
얼마 후, 기훈의 연인이 눈을 반짝이며 아름답게 쌓아 올린 티푸드 중에서 무엇을 먼저 꺼내어 먹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고마워요. 생각 못했는데. 우리 애기가 너무 좋아하네.”
기훈이 선한 웃음을 지으며 미주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제가 대접하고 싶어서 기훈 씨 쪽 의사는 묻지도 않고 내 맘대로 주문했는데 기뻐해주니 나도 좋아요. 하, 근데 이거 너무 많긴 하네요. 식사했댔죠? 나도 다이어트 중이라 여기 있는 샌드위치 말곤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미주가 굳이 다 먹지도 못할 에프터눈 티세트를 시킨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무조건.
누구에게라도.
눈에 띌 것.
그래서 기훈과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핑크빛을 운운하는 소문이 돌게 할 것.
샌드위치를 입에 문 미주의 기억이 기훈과의 첫 만남이 있던 날로 잠시 되돌아갔다.
[믿어도 되죠? 무례한 상황만은 없었으면 해요.]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마담은 예의 그 차분한 목소리로 한아름 걱정을 풀어놓았었다.
[잘 되면 사례는 섭섭지 않으실 만큼 해드릴게요.]
미주는 딸아이의 맞선을 맡긴 중년의 부인과 같은 태도를 흉내 내며 마담을 안심시켰다.
주말 오후 특급호텔 로비의 커피숍은 자리마다 맞선을 보는 것처럼 보이는 남녀가 많았다.
비록 맞선을 빌미로 강기훈을 만나 사업파트너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만든 자리이긴 했지만, 자신도 저들 중 하나처럼 보일 거라 생각하니 미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움켜쥐고만 있던 끈.
반대편 끝이 제대로 매어 있는지, 헛된 곳에 버려져 있는지도 모른 채 쥐고 있기에 급급했던 것.
그 끈을 스르륵 놓아 버리는 느낌.
그렇게 현준에게서 한 발 더 물러서는 느낌.
현준과의 이별을 이런 식으로 나마 조금씩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는 생각까지 스치자, 미주는 퍼뜩 고개를 흔들어 지금껏 떠올렸던 상념들을 떨구어 내었다.
“지나치게 일찍 왔어. 잡생각 할 여유가 생겨버렸잖아.”
미주는 약속 시간 30분 전부터 ‘카페 고우’에 도착하여 강기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약속 시간을 3분쯤 넘겨 강기훈이 들어왔다.
우연찮게 몰린 듯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미주는 강기훈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다부지게 올라와 있는 어깨 근육.
단정한 가운데서도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눈빛.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임이 분명했지만 짓고 있는 표정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선이 굵고 짙은 얼굴에선 후광이나 아우라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빛이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