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제삼자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많이 본 거지 니가 직접 겪어본 건 아니잖아. 결국 너도 제삼자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은설답지 않았던 매서운 표정.

현준은 아까 전 진료실에서 쓸데없는 위로의 말로 은설이 그러한 표정을 짓게끔 만든 것을 자책했다.

“화학적 유산은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해 벌어지는 자연적인 도태과정이야."

화학적 유산을 진단하게 되면 환자들에게 으레 해주던 말이었다.

클리닉 진행하다 보면 꽤 많은 환자들이 화학적 유산을 경험하는 걸 봐왔고, 워낙 일찍부터 임신 사실을 확인하는 그녀들의 상황에서 비롯된 일이라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은설에게도.

"일반적인 임신부들보다 화학적 유산을 인지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음 차 시술 준비에······.”

"먼지니? 훌훌 털어버린다고 털리게."

'생각보다 흔히 벌어지는 일이므로 큰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얼른 잊길 바란다’는 취지로 하는 의사의 말에 은설처럼 날 선 반응을 보였던 환자는 없었다.

다들 자신의 슬픔에 취해 있는 중이라 대부분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말뿐.

이제껏 수많은 환자와 그 배우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가를 생각하니 뻐근한 죄책감이 현준의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현준은 지금 혼자 있을 은설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집안 혹은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침잠한 채로 홀로 고통을 견디고 있을 은설을 생각하니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준수라도 옆에 있었다면 은설의 상태가 훨씬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니 주는 것 없이 밉던 준수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괜찮아?]


현준의 손이 따로 의식을 가진 것처럼 제 멋대로 은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은설의 답신은 오지 않았다.

‘자고 있는 건가? 휴대전화를 어디 던져 버려 두고 혼자 있는 건가. 아니면 내 연락이라서······.’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자 현준은 곧 메시지 보낸 것을 후회했다.

“정간호사. 10분 정도 휴진이요.”

“10분이요? 선생님 저기······.”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참지 못한 현준이 휴대전화를 들고 진료실을 뛰쳐나왔다.

뚜두두두-


[어, 왜?]


은설이 예상보다 빨리 현준의 전화를 받았다.


[아······.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밥 먹고 있는데.]


동시에 현준의 청각이 입안의 남은 음식을 서둘러 삼키는 은설 쪽의 소리를 캐치했다.


[어. 그래. 잘했어.]

[다음번 시술 잘 받으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그래야 자궁 쪽 회복이 빠르다고. 니가 그랬잖아. 나한테.]

[아. 그랬지. 그래서 전화한 거야. 의사가 시키는 대로 잘하고 있나. 확인하려고.]

[모범생 스타일인 거 알면서. 넌? 점심시간 아냐?]


현준은 그제야 자신이 점심시간을 5분 남겨 둔 시점에 10분 휴진을 외치고 뛰쳐나왔단 것을 깨달았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걸어 본 것이라고 대충 둘러대며 현준은 애써 건 전화를 서둘러 끊고 진료실로 달려갔다.

진료실 앞에선 정간호사가 ‘점심시간 전에 진료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며 따지는 환자를 앞에 두고 고전 중에 있었다.

현준이 얼른 달려가 환자를 달랬다.

“죄송합니다. 제가 배가 좀······. 급해서······.”

긴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현준이 설명하는 상황을 이해한 환자의 표정이 금방 누그러졌다.

현준은 정간호사에게도 사과를 잊지 않았다.

“정간호사, 미안해요. 이 분까지만 진료하고 점심 먹으러 갑시다.”




오늘의 마지막 진료환자는 미주였다.

“괜찮아 보여. 깨끗해. 초음파 상으론.”

“평화로운 날들이 이렇게 또 석 달 연장되네요.”

미주가 안도와 불안 사이 어디쯤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미주만큼이나 마음을 졸였던 현준도 그제야 미주에게 물으려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맞다. 만나는 사람 있다고?”

“어디서 들었어요?”

“여러 사람이 이야기해 줘서 어디라고 특정 짓기가 어려운데.”

“소문이 아주 제대로 났나 보네요.”

미주가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준은 처음으로 미주를 보며 밉다는 생각을 했다.

‘밉다니······.’

35년 만의 깨달음이었다.

싫은 것과 미운 것의 차이.

미주가 싫었을 때 현준이 본능처럼 취했던 행동은 미주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분명 미주를 마주하려 하지도 않았고,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애를 썼었다.

미주가 미운 지금은, 그녀를 괴롭히고 싶었다.

얄궂은 미움이 자꾸만 미주에게 난감한 질문을 하게 했다.

“저녁 같이 먹을까?”

미주의 표정 변화는 살짝 놀란 듯한 얼굴부터 시작을 했다.

곧 짧고 깊은 상념이 그녀의 얼굴을 지배했고, 그리고는 모든 것이 정리가 되었다는 듯 다시 평온한 표정을 하고는 현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사브로소’로 와요. 먼저 가서 기다릴 게.”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미주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풍경에 심취한 듯 창 밖을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현준이 애써 쿨한 체를 하며 가볍게 질문을 하면서 미주의 앞에 앉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그냥 이것저것이요. 주로 지나가는 사람들.”

번화가의 창 밖에는 유난히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이 많았다.

현준도 한동안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미주에게 또 물었다.

“잘해줘? 그 사람이?”

“그냥 뭐······. 알아가는 단계니까요.”

미주가 여전히 창 밖을 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쪽에서 다 알고는 있고?”

무례함의 선을 살짝 넘은 질문이었고, 미주가 그제야 현준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속이고 만날까 봐요?”

“그런 뜻이 아니라······.”

“······.”

미주가 더 해보라는 듯 입을 앙다물고 현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현준은 변명과 설명의 중간쯤 되는 말투로 미주에게 조심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예정대로 미레니아 이식을 진행하면 피임이 될 텐데, 미주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갖길 원했었으니까. 어떻게 진행을 하고 싶은지를 묻고 싶었어. 그 사람, 선 본 사람이라며.”

“소개팅에 가까웠어요.”

“어쨌든 어른들께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신 사이 아닌가? 내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올 정도면.”

“신중해야죠. 두 번짼데. 아무리 아이가 급해도 결혼을 함부로 막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일 년쯤은 나도 연애라는 걸 해 보고······.”

“그래 알았어.”

더 듣기가 거북했는지 현준이 미주의 말을 잘랐다.

“1년 정도 시험관 시술을 유예하고 싶어졌단 뜻이지?”

“뭐······. 그런 셈이에요.”

현준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당황한 미주가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색해지려는 둘 사이의 분위기에 한 번 더 찬물을 들이부은 사람은 기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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