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미주씨!”
“어머, 기훈씨?! 여기엔 어쩐 일로.”
“스페인음식을 현지처럼 맛있게 하는 집이 흔치 않죠.”
미주가 기훈의 뒤 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의 피앙세와 살짝 눈인사를 했다.
“아, 여긴 류현준씨!”
미주의 소개에 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훈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신의 포지션을 밝히는 인사를 했다.
“한미주씨 주치의입니다. 상황은 알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전남편이기도 해요.”
덧붙은 미주의 소개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현준이었다.
떨어진 턱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현준의 표정에 미주는 웃음이 났다.
그러고는 눈을 찡긋하며 기훈에게 마저 설명을 덧붙였다.
“여러가지 면에서 믿을 만한 의사이거든요.”
“아아.”
눈치 빠른 기훈이 미주의 말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미주씨가 비밀스럽게 사업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 주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3년 뒤 스카우트를 목표로 류현준씨께 많이 공들이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요.”
“네? 아니 그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럼 편히 식사 하세요. 괜한 오해하지 않으니 염려는 놓으셔도 됩니다. 하하.”
기훈히 쿨하게 웃으며 현준이 도로 의자에 앉도록 리드를 했다.
“그럼 앞으로도 미주씨 건강 잘 좀 책임져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아.”
얼결에 자리에 도로 주저 앉은 현준은 기훈과 두 손 악수까지 하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말았다.
미주에겐 나중에 연락하자는 인사를 남기고 기훈이 빠르게 사라졌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현준이 마치 패배자가 된 것처럼 고개를 떨구곤 애먼 빠에야 냄비 바닥을 박박 긁으며 딱 한마디를 했다.
“사람 참 쿨하네. 지나치게.”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기싸움에서 진 거 티내지 말고 기운 좀 내 봐요.”
미주가 웃음을 삼키며 현준을 위로했다.
눈짓으로 나누는 싸인까지 있는 사이였다.
미주와 기훈은.
현준은 이제 미주의 옆자리에서 완벽히 밀려나 제3자 혹은 그 이하의 사람이 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1년 전 까지만해도 지극히 원하던 자리였다.
이혼의 아픔을 천천히 삭이고 있는 미주가 하루 빨리 자신의 주변에서 벗어나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던 현준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바라던 상황이 되고 나니 상상 이상의 허전함이 현준의 마음을 강타했다.
은설의 옆에서는 언제나 제3자일 수밖에 없어 느끼는 아쉬움과 확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쥐고 있던 사탕을 누군가 채 가버린 아이의 손 처럼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현준은 올 초 미주가 했던 말도 안되는 정자 기증제안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황당하고 어이없어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선 부인할 수 없는 잘난 척이 일었었다.
한미주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류현준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류현준은 한미주로부터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일 것이라는.
그런 현준의 헛된 망상을 무참히 깨버렸다.
한미주가.
“썰!”
백화점 식당가 한 쪽 끝에서 까치발을 들고 손을 흔드는 수지의 모습이 보였다.
은설도 질세라 머리 위로 손을 세차게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야아, 들어 왔으면 들어왔다고 바로 연락을 했어야지이!”
유산 이후 거의 열흘 만에 은설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일이 좀 많았어.”
수지가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과는 상반되는 피곤이 걸걸히 맺힌 목소리로 은설에게 말했다.
은설은 ‘일이 좀 많았다’는 수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몸에 착 감기는 재질의 셔츠를 입은 수지의 배가 꽤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나 축하해줘야 하는 상황 맞는 거지?”
은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지에게 물었다.
“응.”
수지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설이 수지를 와락 안으며 진심어린 축하를 전했다.
“우리 수지 정말 축하해. 드디어 엄마가 되는 구나!!”
“고맙다. 너 힘든 일 있었던 거 아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축하해줘서 정말 고마워.”
“애기 가진 다른 여자들한텐 다 질투나도 너한테는 안 나. 진짜야. 고생 많았던 거 알잖아. 무조건 축하해줄 수 있어.”
“힝.”
“뭐 먹고 싶어? 오늘은 내가 너 먹고 싶은 걸로 다 사줄게.”
수지의 뜻대로 산채비빔밥을 먹은 두 사람은 자리를 멀리 옮기지 않고 바로 옆의 카페로 들어 갔다.
커피를 제외하니 이런 곳엘 와도 딱히 마실 것이 없다며 한참을 고민하던 둘은 결국 철 늦은 팥빙수 메뉴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의기투합했다.
팥빙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내내 은설은 수지의 배만 바라 보았다.
“진짜 신기해. 어떻게 저 뱃속에 수지 2세가 들어있는 거지?”
“나도 신기해, 얘가.”
“몇 개월이랬지?”
“6개월”
“애기는 대체 언제 만든 거야?”
“너 돌아가고 그 다음날.”
“읭? 정말? 어쩌다가?”
“집이 비어 있어서.”
“뭐야, 하하. 집이 비면 애기가 그냥 막 생겨? 우리집 요즘 맨날 비어 있는데. 난 안 생기고 있는데?”
“형석이가 찾아 왔었어. 왜 찾아 왔는지는 대충 짐작 하지? 그 라운지 바에서 내가 꽤 위로를 받았었거든. 형석이 진짜 능력 있는 상담사 맞아.”
“그래서 상담 좀 더 하자고 부른 거야?”
“그럴리가.”
“그치. 그건 아니겠지.”
“찾아 왔어, 형석이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신기 했어.”
“미안. 내가 너희 집 위치를 얘기한 거 같아. 어디서 묵고 있는 지 얘기하면서.”
“니가 우리 부뜰이의 은인이구나. 부뜰아, 이 이모 덕에 너 생겼다. 인사해라.”
수지가 배를 둥그렇게 쓰다듬으며 뱃속의 아기에게 농담을 했다.
“몇 호인지 까지는 얘기 안 했는데.”
“그건 뭐 지가 알아서 해결했겠지.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하하, 그러게.”
“찾아 왔길래 들어 오라 했고. 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뭐 그렇게 됐어. 그리고 나서 형석이가 떠나고. 3주쯤 후에 우리 부뜰이 생긴 거 알게 됐어.”
“한 방에?”
“응. 한 방에 생긴 거야. 신기하지?”
“응.”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어. 그 사람하곤 십 년을 노력해도 안 생겼던 아기가. 형석이하고는 한방에 생겨버렸어.”
“전남편하곤 정말 뭐가 안 맞았던 건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바로 궁합이라는 건가."
"나 진짜 그 즈음에 상태가 최악이었거든. 살도 엄청 빠졌었고, 주기가 다 틀어져서 배란일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단 말야. 진짜 가능성 제로라고 생각했는데."
"애기가 생긴 거구나! 와, 태어날 아이는 어떻게든 태어난다더니.”
“어찌해야 할지 혼자서 결정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연락을 했더니, 형석이가 바로 다시 태국으로 들어 오더라고. 반지 사들고.”
“그 와중에 로맨틱을 챙겼네. 대단하네, 형석이.”
은설의 칭찬에 수지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