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뉴스를 보다 말고 준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지금이라도 운동 가는 게 낫겠지?”
9시가 넘었고, 며칠 간의 야근으로 피곤이 겹겹이 쌓인 상태였지만, 질 좋은 정자 생산에 대한 부담감이 준수를 현관문 밖으로 떠밀었다.
“피곤하면 그냥 쉬지 그래.”
“아니야, 밥도 많이 먹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야 내장지방이 줄지.”
먹는 낙, 쉴 때 뒹굴거리는 낙으로 사는 그저 바쁘고 안쓰런 직장인일 뿐이었다.
그런 준수에게 ‘네가 게을러서 살이 쪘고, 그래서 너의 올챙이들은 문제가 많을 것이다.’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만 같아 은설은 미안했다.
하지만 은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 가느라 스트레스가 쌓인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스트레스가 쌓인 채로 지낸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지내고 있어도 되는 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좀 쉬어야 할 텐데.’
‘충분한 쉼’이 외려 부담으로 다가왔고 또 다른 고통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휴직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와 ‘덜컥 일부터 그만두었다가 오히려 임신에 대한 부담감만 더 느는 것 아닌가’ 사이에서 마음은 시종일관 널을 뛰었다.
준수가 나가고, 채널을 위아래로 돌려가며 챙겨 보던 것도 아닌 드라마 몇 편을 찝쩍이다가 은설이 결국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9시 반이라. 그럼 태국은 7시 반쯤이겠지?”
오래간만에 수지에게 걸어보는 영상통화였다.
[써얼, 웬일이야? 먼저 영통을 다 걸고?]
[우리 쑤지 잘 지내나 궁금해서 걸었지.]
[뻥치지 마.]
[아쉬운 사람이 먼저 거는 거지 뭐.]
[뭔 일이래?]
[우리 쑤지 저녁은 다 먹었나?]
[엉. 다 먹어가. 아니 다 먹었어. 싸랑하는 울 자기, 그릇만 좀 정리해 줘요. 은설이랑 통화 좀 하게.]
수지는 장난기도 애교도 많은 편이었다.
벌써 결혼 10년 차가 다 되어갔지만 남편을 향한 목소리에선 여전히 애정이 넘쳤다.
수지도 은설과 마찬가지로 아직 아기가 없었다.
한국에서 지낼 때는 난임센터를 다니긴 했지만, 은설처럼 조급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주재원인 남편이 태국에서 앞으로 3년은 더 있어야 하니, 당장은 은설처럼 난임센터를 밥 먹듯 드나들 수 있는 환경도 아니기는 했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잘하는’ 난임센터를 찾아다닐 엄두는 나질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있는 곳이 태국이었고, 산 좋고, 물 좋고, 그래서 놀기 딱 좋은 그곳에서 난임 따위를 걱정하며 지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은설은 수지의 여유가 부러웠다.
[은설이 얼굴이 좀 상했네. 뭔 일 있어? 안 이쁜 얼굴 계속 보는 거 부담스럽다. 음통으로 바꾸자.]
[기지배. 너도 추레해, 지금.]
길어질 것이 뻔한 통화였다.
간만에 얼굴이나 볼까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영상통화가 길어지면 부담스러운 건 은설도 마찬가지였다.
음성 통화로 바꾼 뒤 은설은 자연스레 빨래걸이로 가서 바짝 마른 빨래를 한 아름 걷어 소파 위에 쌓았다.
예전, 어깨와 볼 사이에 무선전화기를 끼고 집안일을 했던 친정엄마처럼 은설은 딱 그 자세 그대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야, 목소리 잘 안 들려. 너 또 목에다가 핸드폰 끼웠지? 목 꺾어지는 느낌 나서 난 불편하던데. 넌 안 그래? 그냥 통화만 해, 기지배야.]
수지의 투덜거림이 없었으면 송화기 부분이 90도쯤 방향이 틀어져 있는 것을 몰랐을 것이었다.
먼저 걸어 놓고선 통화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은설은 수지에게 미안했다.
빨래를 한편에 미뤄두고 은설은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현준이 기억나냐고 물었어.]
[누구?]
[류현준. 중 1 때 같은 반.]
[아아, 전교 회장.]
[회장?]
[어, 걔 중3 때 전교회장 했었어.]
[아, 그래?]
[갑자기 걔는 왜?]
[오늘 만났어, 우연히.]
[오, 신기. 어디서?]
[난임센터 진료실에서.]
[뭐?]
[걔가 새로 온 의사더라고.]
[뭐?]
[산부인과 의사더라고, 걔가.]
[걔한테 진료를 봤다고?]
[엉.]
[웬일. 어머어머, 이게 뭔 일이야. 어쩌자고 진료를 받았어? 크크 크큭.]
[진료 다 받고 난 다음에 걔인걸 알았어. 야, 웃지 마. 나 심각해.]
[심각할 건 또 뭐야. 고릿적 인연이 뭐 대단하다고. 그냥 좀 아는 의사라고 생각해.]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뭐?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는 게 있다고?]
[응. 뭐, 옛날 일이라 별로 안 중요해서 안 하고 넘어간 거긴 한데.]
[야, 나 심각해지려고 그런다. 니가 나한테 말 안 한 게 있다고? 아, 나 배신감 느껴질라 그러는데.]
[별 건 아냐. 그냥, 나 중1 때······.]
[중1 때 뭐. 걔랑 사귀기라도 했었어?]
[응.]
[뭐?]
[류현준이랑 잠깐 사귀었었어. 전학 가기 직전에. 급하게 전학 가면서 헤어졌지만.]
[뭐야, 너 나한테 20년 넘게 비밀이 있었던 거야?]
[20년 비밀씩이나.]
[이게 비밀이 아니면 뭐야, 기즈배야.]
[그냥 그땐 걔랑 남자친구 여자친구 하자 했던 게 애들한테 알려지면 좀 부끄러우니까 걔한테 학교에선 아닌 척하자 했었고.]
[그래도 나한텐 말했어야지. 베프가 달리 베프냐.]
[뭐 그 담엔 아무도 모르게 헤어지고 끝난 사이었으니까 말할 일이 없었던 거고.]
[기즈배야, 난 여태 니 첫사랑이 대학 때 그 오빠인 줄 알았잖아.]
[중1 때 연애가 무슨 연애냐. 애들 소꿉장난 가지고, 뭘.]
[손잡고 뽀뽀하고 그래야 연애냐? 생각보다 에로스네 이은설. 잠깐, 그때 벌써 다 해본 거 아냐?]
[아냐. 나 그때 엄청 순수한 모범생이었던 거 생각 안 나?]
[알 거는 다 알았잖아, 기지배야. 응큼한 것 같으니라고. 그런 줄도 모르고 니 앞에서 주름 겁나 잡았었다, 내가.]
[아니야, 나 주로 너한테 많이 배웠어. 고맙게 생각한다.]
[걔는? 진료할 때 넌 줄 모르디?]
[그것까진 안 물어봤네.]
[뭐야, 너만 걔를 알아본 게 아니었어? 하긴 사귀던 여자애를 못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 그래, 너의 뭘 보고 알아봤대냐?]
[야!]
[왜? 어릴 때랑은 얼굴도 좀 변했고, 너 화장도 했을 텐데. 그런데도 알아봤다며. 기억에 남는 신체부위가 있었을 거 야냐. 눈매라든가, 손이라든가, 아니면 입술모양이라든지. 뭘 생각하고 신경질이야?]
[암튼!]
[니가 나보다 응큼한 거 맞다니까.]
실없는 대화를 한참이나 나누고서야 은설은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걔가 나보고 계속 자기한테 진료받으래.]
[제일 응큼한 건 그놈이구만.]
[지가 잘 한대.]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