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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래, 너로 정했어!(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난임치료.]

[얼씨구.]

수지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흠뻑 취한 듯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사실인 거 같아. 진료받기 전에 간호사들도 그렇게 말하더라고. 새로 온 선생님 이쪽 분야에서 유명하다고.]

[그래서? 진짜 걔한테 진료받게? 남편은 뭐래?]

[친구가 의사인 것도 복이랜다. 차마 중학교 때 남자친구였단 얘기는 못했고.]

[그래? 그럼 일단은 모른단 얘기네. 뭐 당분간 병원 가는 재미는 있겠다.]

[뭐?]

[내가 거길 모르냐? 응? 거기가 가고 싶어서 가는 데냐고.]

[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나도 진심으로 말하는 거거든요. 고민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니가 걔한테 계속 진료를 받아 볼 마음이 있다는 거잖아.]

[······.]

[실력이 좋아서든, 걔를 계속 만나고 싶어서든.]

[하지만······. 민망해.]

[민망은 이미 했어. 이 사람아.]

[계속 다니면 또 민망해야 하잖아.]

[그럼 다니지 말든가.]

[······.]

[너 걔한테 계속 진료받고 싶은 거라니까!!]

[실력이 좋은 의사라니까. 솔직히 포기하기가 좀 그래. 두 번 고생할 거 한 번만 할 수도 있는 거니까.]

[뭐 이유야 어쨌든!]

[준수 씨 한텐 뭐라 하지?]

[일단은 걔한테 진료받아. 초장부터 남편하고 꼭 같이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가.]

[남편한테 걔랑 중1 때, 중1 때라 참 우습긴 하지만. 무슨 사이었는지 말할지 말지, 의사를 바꿀지 말지, 병원을 바꿀지 말지는 나중에 고민해.]

[그래도 되려나.]

[그냥 이 상황을 즐기도록 하려무나.]

[이게 즐길만한 상황인 거니?]

[그럼. 내가 너를 모르니? 지루할 정도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너의 애정사에 이 정도 양념은 필요하지, 암.]

[유부녀 애정사에 양념이 꼭 필요한 건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애정사에는 양념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내 남자하고의 애정전선에도 더 맛깔이 나고.]

[그래, 너도 양념 잘 치면서 사는 거니?]

[나도 비밀하련다.]

[뭐야, 뭐 있어? 너?]

[20년 뒤에 말해 줄란다. 나 이만 끊으련다. 우리 남표니가 같이 수영장 가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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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와의 통화를 마친 은설은 아까 전 문벅스에서 받은 현준의 명함을 계속 만지작 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은설이 현준에게 보낼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담백하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묻자. 아까 진료할 때 초음파 보면서 무슨 생각했니?]

은설은 5분 정도 핸드폰을 붙잡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답신을 기다렸다.

은설의 애를 태우려는 건지, 아니면 은설의 상상만큼 은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인지 현준의 답신은 바로 오지 않았다.

멍하니 답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 은설은 미뤄두었던 다림질 거리를 꺼냈다.

첫 번째로 다린 블라우스의 다림질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현준에게서 답신이 왔다.

남편에게서 첫 번째 애프터 신청을 받았을 때처럼 심장이 얕게 두근거렸다.

숨을 한번 가다듬고, 은설은 카드놀이의 마지막 패를 뒤집을 때처럼 천천히 현준의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초음파 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은 일단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현준의 답신도 역시나 더없이 담백하게 돌아왔다.

‘그래. 너는 의사이고 나는 환자일 뿐.’

은설은 수지의 조언대로 마음이 이끌리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것들을 떠나서, 이쪽 분야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의사라 하지 않는가.


[너에게 계속 진료받을게]


은설은 더 이상의 고민도 망설임도 필요 없다는 듯 재빠르게 다시 답신을 보냈다.

그렇게 보내고 나니 명치 위에 체기 마냥 앉아 있던 고민이 첫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그래. 괜찮아. 나의 포지션은 그냥 애가 안 생겨 고민하는 그 옛날의 동창일 뿐.’

어쩌면 현준에게도, 은설이란 그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안겨주고 싶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 환자’로서의 의미가 더 클지도 몰랐다.

뭣도 모르던 시절의 풋내 나는 인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은설은 한번 더 생각을 가다듬었다.



현재 은설의 입장에선 오래전의 일을 신경 쓰는 것보다 당장의 난임 문제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이었다.

남편도 일단은 호의적이지 않았던가.

비록 ‘중학교 동창’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긴 하지만.

은설은 옳은 결정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니던 데 계속 다니려고."

준수보다 늦게 침대 위로 누우며 은설이 심드렁히 결정한 바를 전했다.

"잘 생각했어요. 자고로 병원은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데를 가는 게 백배 천배는 낫다고 했어."

"그런가?"

"더구나 아는 사람이 의사잖아. 그것보다 더 좋은 경우가 어디에 있어."

"원무과장."

"그것 빼고."

"원장."

"그만해요, 이 사람아."

은설이 실없이 잡고 늘어지는 말꼬리에 슬쩍 약이 오른 준수가 은설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손을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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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이러지 마!!"

준수를 등지고 몸을 궁굴리는 은설에게서 빈틈을 찾을 수 없자, 이번에는 준수가 은설의 발바닥을 잡았다.

"안돼! 거긴 정말 안돼!"

퍽.

"쿨럭!"

은설의 발 뒤꿈치에 명치를 제대로 까인 준수가 내상을 입은 중원의 고수처럼 침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거 봐요. 발바닥 간지럽히면 나도 모르게 발길질한다니까."

"으으으."

뭐라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준수는 신음소리만 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녜요. 진짜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녜요?"

"명치 까이고도 죽지 않았으니 병원은 안 가도 되겠지. 으으."

준수가 뾰루퉁히 삐친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며 겨우 답을 했다.

"미안요."

의도치는 않았지만 남편을 가격한 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은설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웅크리고 있는 준수의 등을 쓸었다.

은설의 제스처에 금방 마음이 풀린 준수가 앓는 표정에 웃음기를 섞어서 다시 은설을 놀리기 시작했다.

"간지럼 많이 타는 데가 성감대라는데. 마누라 성감대는 너무 위험한 데 있어요."

"성감대 아니고 그냥 간지럼 많이 타는 데에요."

은설이 살짝 부끄럼을 타며 귀엽게 아닌 척을 했다.

"그럼 어딘데?"

"나한테 그런 게 어딨어."

"없는 척하시긴. 난 다 아는데."

"몰라요. 그런 거 없어."

은설이 준수의 등을 밀치며 침대 발치에서 머리맡으로 엉덩이를 어기적 거리며 기어올라갔다.

"저번에 내가 다 가르쳐 줬잖아. 은설 씨 어디가 거긴지. 복습을 안 해줘서 까먹은 거야? 오늘 다시 복습해 줘?"

준수가 이불을 들춰 은설이 있는 쪽을 향해 두더지처럼 파고들었다.

"아, 발 만지지 마! 또 발길질한다니까요!"

"걱정 마요. 은설 씨가 깔깔거리고 웃는 데가 거기만 있는 게 아니니까."

재빠르게 은설의 위로 타고 오른 준수의 입술이 은설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아앗! 크큭. 간지러. 하지. 마요. 후-."

이번에는 은설의 입에서 짧은 숨이 끊겨 나왔다.

준수가 익히 알고 있던 대로.

은설은 준수의 리드대로 순순히 그를 따랐다.

어쩐지 자꾸만

미안해지는 마음을

해소하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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