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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두 번째 진료(1)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현준의 출근시간이 평소보다 30분이나 더 빨라졌다.

은설이 진료를 받기로 한 날이라는 것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눈이 일찍 떠지기도 했고, 평소 시리얼이라도 우유에 말아먹고 나오던 아침 식사를 별로 내키지 않아 걸렀을 뿐이었다. 집을 좀 일찍 나선 덕인지 길도 막히지 않았다. 뭐 어쩌면 출근 전 진료를 받으려는 은설이 일찌감치 병원에 와서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접수창구의 간호사도 데스크에 나와 있지 않은 텅 빈 대기실에서 은설과 몇 마디 나누는 공상도 스치듯 아주 잠시.



진료실로 들어가는 길에 현준은 텅 빈 대기실을 한번 훑어보았다. 은설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일찍 왔군.’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대기실을 두리번거리는 현준의 시선을 알아차린 간호사가 현준의 뒤에서 물어왔다.

움찔.

“어멋, 선생님 놀라셨어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들려서요.”

현준이 싱긋 웃어 보이자, 간호사도 당황했던 눈빛이 풀어졌다.

“아무도 없는 대기실은 왜 둘러보셨어요?”

“화분요. 잘 자라고 있나 해서.”

다행히 대기실 한편에 현준이 기증한 나무가 있었다. 중학교 동창 ‘형석’이 이직을 축하한다며 병원으로 보낸 처치 곤란한 화분이었다.

“잘 자라요. 대기실 인테리어하고도 어울리고요.”

“네.”

짧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현준이 서둘러 진료실로 들어섰다.

“빙봇 맞네, 빙봇 맞아.”

막 닫히려는 문틈으로 간호사의 혼잣말 같은 뒷담이 흘러들었다.

“여기서도 빙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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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에 근무했던 병원의 누군가가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이전 병원 간호사들 사이에서 ‘얼음왕자’이니 ‘로봇’이니 하는, 대체로 차갑고 감정 없는 것들로 대체되어 불리다가 어느 순간 별명이 ‘빙봇’이 되었다.

‘그래도 여기선 다른 의미의 ‘빙봇’으론 불리지 않겠지.’

그저 차갑고 정 없는 이미지뿐이라면 ‘빙봇’이라 불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병원에만 들어서면 차갑고 딱딱해지는 태도에 대해선 현준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 마치 평소와는 전혀 다른 제2의 자아가 발동하는 것처럼. 언젠가 심리상담가로 활동하는 형석에게 이 같은 이야길 털어놓으니 일할 때 긴장이 많은 스타일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현준은 일견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 병원’은 긴장감 없이는 한순간도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온몸으로 냉기를 뿜어내는 태도는 병원을 옮기고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번 몸에 베이고 나면 바꾸는 것은 좀처럼 쉽지가 않다. 은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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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책상에 느긋이 앉으며 현준은 닷새 전을 떠올렸다. 은설은 현준의 곁을 떠났을 때만큼이나 당황스럽게 현준의 곁으로 돌아왔다. 진료실로 들어서는 익숙한 얼굴을 보며 처음에는 현준도 자신의 눈을 믿지 않았다.

‘설마 저렇게까지 안 변했을 줄이라곤.’

키도, 통통한 볼살도, 화장기 없는 얼굴의 윤나는 피부도 20년 전과 똑같았다. 살이 비치지 않는 검은색 스타킹에 짙은 쥐색 스커트와 재킷. 그 안에 받쳐 입은 하얀 블라우스 마저 중학교 시절 교복을 연상케 했다. 현준은 차트에서 환자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했다.

‘이은설.’

그리고 현준과 같은 출생 연도. 같은 나이에 같은 이름,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이를 만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고, 현준은 은설임을 확신했다. 짧은 순간 현준의 머릿속에 은설을 찾아 헤매었던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4살의 현준이 은설을 다시 만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민국대 의대에 가는 것이었다. 은설이 떠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현준은 부모님에게 이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려 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리고 매일 잠자는 4-5시간을 제외하고는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공부를 했다.

“우리 집안이 꼭 대를 이어서 의사라는 직업을 이어야 하고 그런 건 아니야.”

라며 지나칠 정도로 공부에 집착하는 현준을 부모님이 말릴 정도였다. 현준이 걸었던 승부의 결과는 현준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민국대 의대에 입학하던 날 현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몹시도 흡족한 웃음을 지었더랬다. 자신의 대를 이어 외과의가 될 거라는 아버지와 성격상 내과가 맞을 거라는 내과의사 어머니에게, 현준은 그저 누군가를 꼭 만나야 했기에 민국대 의대에 진학했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부모님 나름대로는, 3월이면 어느 한 날은 꼭 진탕 술을 마시고 들어왔던 현준의 입에서 은설이라는 이름이 종종 흘러나오는 것을 새겨 들어두셨던 모양이었다.



중1 때 갑자기 사라졌다던, 아들의 같은 반 그 여자아이를 어렴풋이 기억해 낸 어머니가 간혹 은설이라는 애 소식은 들려오더냐며 물어오곤 했다.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아들의 첫사랑’을 어머니는 애틋해했다. 그러나 과자 부스러기만 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던 터라 어머니와의 대화는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아니요.”

라는 짧은 대답만 하고는 현준은 언제나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은설과 현준의 사이는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은설에 대해서 어머니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했다. 다만, 어머니의 물음에 대한 답은 꼭 찾고 싶었고, 어느덧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가 새로 생길 때마다 가입하여 틈날 때마다 뒤져보는 것이 현준의 유일한 취미가 되어버렸다. 연락을 하고 지내는 동창-그 동창의 여자동창-여자 동창의 친구로 파도에 파도를 타고 이동하며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긴 생머리 여자들을 찾아 헤맸다.



‘14살의 은설이 성인이 되었으니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니겠는가’하는 현준만의 몽타주가 있었다. 그것과 닮은 여자를 발견하면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홈피를 뒤져서, 끝내는 그 여자의 이름과 나이 따위 등을 알아냈지만, 결과는 항상 ‘이은설이 아니다’였다. 뒷모습만 보았을 뿐인데도 마음이 쿵쾅거렸던 여자마저도 은설이 아니었다.

지난 15년 간 자신이 헛다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니 현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5일 전, 진료실에 들어 선 은설은 중학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김새에 세월의 흔적만 얹어진 모습이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지금은 자그마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법한 체구. 20년 전의 은설을 다시 만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귀여웠어.”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뱉어내고선, 현준은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철든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는 단어였다. 10번의 시험관 시도 끝에 임신에 성공한 산모가 아기를 안고 찾아왔을 때에도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 ‘귀여운’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서른네 살의 은설은,

귀여웠다.

“어떻게 14살 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유일하게 변한 것이 있다면 완숙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어른스러워진 목소리와 말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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