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생각해 보면 은설의 이미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14살의 은설은 성숙하고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또래들 사이에선 키가 큰 편이었고, 2차 성징도 빨랐다. 유난히 성장이 느렸던 현준과 나란히 서있으면 몇 학년 위 누나라고 해도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현준과 차이가 났었다.
“내 도시락 반찬 지켜줄 때, 그 카리스마도 참 멋졌었는데.”
그때의 모습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교사’라는 은설의 직업이 ‘의사’보다는 훨씬 더 잘 어울렸다. 넘치는 카리스마로 반 아이들을 이끄는 은설의 모습을 상상하며 현준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은설이 멋진 사람인 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범접하기 어려운 동경의 대상처럼 은설을 바라보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
현준은 서랍 속의 자그마한 손거울을 꺼내어 왼쪽과 오른쪽 얼굴을 번갈아가며 훑었다.
“그때보단 나아진 모습이어서 다행이군.”
이만하면 은설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건 아닐 거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20년 전처럼, 은설은 여전히 완벽해 보였다. 은설은 여전히, 현준이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결혼을 했다니···”
화가 났다. 뜻하지 않게 결혼을 했던 것은 현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이제야 은설을 만나게 한 빌어먹을 ‘우연’에.
“선생님임-. 선생님?"
넋 놓고 딴생각에 빠져있던 현준이 간호사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7시 30분.
“첫 환자분 진료실로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네. 첫 환자분 입장.”
간호사의 물음에 현준이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냥하게 웃으며 간호사가 데리고 들어온 환자는, 은설이 아니었다.
두 번 째도, 세 번 째도. 오전 진료가 거의 마무리될 때까지 은설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바뀐 건가, 아니면 조퇴를 하고 오려는 건가.’
손이 현준의 의식과 상관없이 자꾸만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은설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현준은 이내 핸드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놓았다.
‘의사는 환자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결혼한 첫사랑에게 때 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두 가지 생각이 현준의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후, 이은설 기다리던 20년 중 오늘이 가장 힘든 날이네.”
얕게 한숨을 쉬는 현준의 얼굴에 힘 빠진 미소가 돌았다.
‘이러다 아침 진료 못 보고 출근하겠네.’
5시 반에 일어나 서둘러 준비했는데도 출근 준비가 자꾸만 늦어져 은설은 속이 상했다. 너무 오랜만에 고데기를 꺼내 들어선 지 손놀림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눈썹도 오늘따라 자꾸만 비뚤어져 보였고, 몇 번의 수정 끝에 완성한 눈썹은 짱구처럼 너무 진했다. 결국을 모두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나서야 좀 볼만한 눈썹이 완성되었다. 어제 미리 골라 놓았던 블라우스는 막상 입어보니 H라인 치마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뭐야, 어깨부터 종아리까지 드럼통이네.”
은설이 부산을 떠는 소리에 일찍 잠이 깬 준수가 침대에 누운 채로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오늘 학교에 무슨 행사 있어?”
얼굴 근육을 몽땅 다 풀기라도 하려는 듯 잔뜩 찌푸리며 하품을 하는 준수의 얼굴이 못생길 대로 못생겨졌다. 떡진 머리가 눌려 까치집이 제대로 올라앉은 준수의 모습이 싫어서 은설은 괜한 짜증을 부렸다.
“몰라. 학교에 무슨 손님 온다고 정장 입고 오래잖아. 뭐 장학사라도 오는 건지. 더 자. 나 땜에 일찍 깼다고 또 뭐라 하지 말고.”
“내가 뭘 뭐랬다고 그러냐.”
잘못한 것 없이 일어나자마자 짜증을 들은 준수가 삐쳤는지 이불을 다시 끌어올려 덮으며 은설을 등졌다. 삐친 준수를 그냥 두고 출근하는 것은 너무 찝찝했다. 화장대 앞에서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은설은 결국 침대 위로 올라가 돌아누운 준수의 등을 쓸어주며 기름진 볼에 사과의 뽀뽀를 했다.
“미안. 지금은 내 잘못 인정. 아침 내내 뭐 하나 착착 되는 일이 없었어. 자기까지 삐치게 해버리고 말았네.”
뜻대로 진행되지 않은 출근 준비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자신의 탓이라며 준수를 달래고 나서야 은설을 방을 나설 수 있었다.
“휴대전화, 집열쇠, 차키. 응? 이게 왜 여기 있지?”
현관에 서서 마지막 가방점검을 하다가 은설은 결국 절대로 봐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교실 열쇠였다. 다 잃어버리고 하나 밖에 안 남아서 반드시 숙직실 안 반별 열쇠함 안에 넣어 두어야 하는. 교탁 밑에 두고 온 교무수첩을 찾느라 잠깐 꺼내 쓰고, 퇴근길에 도로 가져가 두려던 것이 그만 집까지 은설을 따라와 버린 듯했다.
“이놈의 건망증을 그냥!”
열쇠를 쥔 은설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교실 열쇠는 지금 은설에게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대로는 출근 전에 병원에 들를 수가 없다. 병원에 갔다가 출근을 하면, 조례시간 직전까지 반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아니, 교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다른 반까지 여기저기 쳐들어가 2학년 전체를 어수선하게 만들며 돌아다닐 애 녀석들을 생각하니 머리카락이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그 사태만은 정말 안 돼!”
애써 고데기까지 말아가며 한 시간 넘게 준비했던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마지막 수업 교환하고, 부담임 쌤한테 종례부탁 하면 조퇴하고 병원에는 갈 수 있겠지만 그땐 내 머리도 다시 쑥대머리가 되어 있겠지... 화장은 번들번들 다 번져있을 거야.’
은설은 휴대전화를 들어 현준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었다.
“아, 예약 진료가 아니었지.”
은설은 현준에게 보내려던 메시지를 도로 지웠다.
“오버하지 말자고.”
은설은 오늘 아침 유난스러웠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5시 30분에 일어나 풀메이크업을 한 것도, 고데기를 한 것도, 오후 늦게나 진료를 받으러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현준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도. ‘진료를 받겠다’는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후, 은설은 단 한 번도 현준에게서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로지 의사와 환자 사이’라는 선을 확실히 긋고 있는 것은 은설이 아니라 오히려 현준 쪽이었다. 은설은 수지가 말한 ‘양념’을 떠올렸다.
‘양념 맛에 취해서 나 혼자 오두방정이네.’
은설은 자신의 모습이 다이어트하느라 염분 제한 하다가 짭짤한 과자 한 입 얻어먹었을 때와 같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정상으로 돌아가자. 차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지금 출발하면 나보다 먼저 등교한 애들은 없을 거야. 일찍 서두른 보람은 거기서나 찾자.”
은설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며 신발장 안에서 가장 낮고 편한 구두를 꺼내어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