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버려도 괜찮을 것들.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그래서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나왔어?]


준수가 짜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은설을 반쯤 나무랐다.


[아니, 정말로 구조가 괜찮아 보였다니까. 복층이 양쪽으로 있었단 말이에요. 더블 복층이었다고.]


삐뚜름히 침대에 누워 있던 은설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살 것도 아니면서 전화번호는 왜 적어주고 나왔어.]

[살 수도 있을 거 같았어요. 위치 대비 가격이 나쁘지가 않더라고. 이 집 전세금 빼면 그거 사겠던데.]

[그런데 오래 살면 답답해요, 이 사람아.]

[둘이 살긴 딱으로 보이던데.]

[지금 집도 좁아서 더 넓은 데로 이사 가고 싶다며.]

[그건 애가 태어날 걸 생각해서 한 말이고.]

[······.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요. 그냥 좀 고민 중이야.]

[애기 낳는 거?]

[정확히는 난임치료받는 거.]

[······. 혼자서 너무 많이는 고민하지 마요. 곧 있으면 나 돌아가니까. 그건 그때 같이 고민해 보자고.]

[정말? 날짜 정해졌어?]

[응.]

[언제?]

[이달 말일. 아니 30일.]

[와아! 연말과 연시는 신랑과 맞겠네요!]

[그니까요. 그러니까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지 말고. 그건 나 있을 때 나랑 같이 하면 되니까. 지금은 신랑 맞을 준비 하면서 즐겁게 시간 보내고 있어요.]

[준비야 늘 되어 있지. 신랑만 오면 돼요.]




준수가 마지막까지 오피스텔은 안된다며 못을 박긴 했지만 통화는 유쾌하게 마무리되었다.

배터리가 다 닳은 휴대전화를 충전기 위에 올려놓고 나서, 은설은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오피스텔 팸플릿을 다시 들어 펼쳤다.

“이거 진짜 괜찮아 보이는데. 구조도를 좀 보여줄 걸 그랬나? 복층에서 서서 걸어 다닐 수 있는 데가 흔치 않은데.”

아이가 없다면 집은 크지 않아도 괜찮다.

운전을 할 줄 아니까 지하철이 좀 먼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주변에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학원가, 키즈카페 그 어떤 것도 없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집값이 오를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위치라 해도, 준수와 둘이 살기에 괜찮은 곳이라면 그마저도 신경 쓸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 카페거리 근처 아닌가? 두리산공원까지 도보 5분. 위치도 좋은 거 같은데.”

은설이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곧 벌떡 일어나 방안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침대랑 화장대랑 이거 1층 방 안에 다 들어가려나 모르겠네. 여차하면 그냥 버려야겠다. 혼수라고 나름 좋은 거 산거긴 한데. 아냐, 다 짐이야. 작은 집에선.”

가구를 대충 정리한 은설은 붙박이장으로 가 건성건성 옷들을 뒤적였다.

“절반 이상은 버려야겠네. 거기 붙박이장이 별로 안 커서. 준수 씨랑 내 거 외투 몇 벌만 넣어도 옷장이 터지려고 그럴 거야.”

방을 나서는 은설에게선 콧노래까지 나오고 있었다.

거실 쪽은 쳐다도 보지도 않으면서 은설이 말했다.

“다 버리고.”

주방으로 들어선 은설이 한참을 서서 고민한 것은 식탁이었다.

“거실에 책상 대신 식탁을 놓고 다용도로 쓰는 게 오히려 공간 활용 하기가 좋으려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은설은 그냥 싱크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수납장 하나하나를 열어보며 은설이 또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꺼내 쓰지도 않으면서 그릇은 왜 이렇게 많이 산 거야. 사은품으로 받은 것도 죄다 모아 놓고. 이러니까 장이 터지려고 그러지.”

주방 살림의 90퍼센트는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없으면 바리바리 장을 봐오는 일도, 며칠씩 먹을 음식을 만들어 쟁여 두는 일도 다 없을 것이었다.

은설은 미래에 있을 만일을 대비해 이제껏 모아두었던 부엌살림들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다 버려야지.”




커피가 당겼다.

머리로만 했을 뿐인데도, 살림정리가 은설을 몹시도 피로하게 한 모양이었다.

찬장을 열어보다가 친정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사다 놓은 믹스커피를 발견했던 것이 은설의 눈앞에 자꾸만 아른거렸다.

“피곤할 땐 믹스지.”

커다란 머그잔에 한 봉을 털어 넣고, 두 봉 째 믹스를 뜯을까 말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은설은 결국 그것을 찬장에 도로 넣었다.

“살쪄.”

난임치료를 받으며 이미 찔 대로 쪘던 살이 두 번의 유산을 회복하면서 더 불어난 상태였다.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던 터라 근육도 얇아져 온몸의 살이 흔들면 흔드는 대로 후들거렸다.

"한 입을 먹더라도 맛있게 먹어야지."

진한 맛을 좋아하는 은설이 끓인 물을 쫄쫄거리며 아주 조금만 따랐고, 커다란 머그잔에 탄 믹스커피는 바닥에 깔려 있는 것처럼 양이 적었다.

선 채로 그 자리에서 커피를 다 마셔버린 은설이 물로 대충 닦은 머그에 다시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았다.

"이건 좀 천천히 마셔야겠다."

은설이 핫팩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그잔을 두 손으로 비비며 거실 소파에 살포시 앉았다.

“얘는 진짜 가져가고 싶은데. 에효, 그 집엔 안 어울리겠어.”

벌써부터 아쉬운 생각이 드는지 은설이 소파 가죽을 쓰윽쓰윽 쓰다듬다가 엉덩이를 조금 더 소파 깊숙이 밀어 넣으며 등받이에 상체를 뉘었다.

이토록 좋은 것이지만,

버려야 했다.

작은 집으로 들어가려면.




은설은 아이가 없는 준수와의 미래를 상상했다.

‘일단은 큰 집 사느라 있는 대로 대출받고 허덕이는 일은 없겠지.’

낮에 본 오피스텔이 아니어도, 갈 곳은 많았다.

준수가 원하는 대로 강원도에 더 가까운 양평 어딘가에다가 작은 전원주택을 짓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은설의 머릿속에 개들과 고양이들이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앞마당의 풍경이 그려졌다.

TV에 나온 어느 부부처럼 근사한 캠핑카를 하나 마련해서 온 세상을 떠돌며 보헤미안 같은 삶을 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준수 씨는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수 있겠지.'

준수가 사업이 변변한 성공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의 도전을 응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둘 뿐이라면 일곱 번을 넘어지든 여덟 번을 넘어지든 다시 일어나는 일이 두렵지 않을 터였다.

은설의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둘이서야 뭐 내 월급하고 연금으로 죽을 때까지 입에 풀칠은 하고 살 수 있을 테니. 법이 바뀌어서 연금은 좀 모자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자라면 역모기지라도 받아서 쓰다가 죽을 때 은행에다가 집을 줘버리면 그뿐이었다.

미래의 삶에서 아이를 배제하고 나니, 은설은 모든 것이 가볍고 홀가분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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