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뉴스에선 연일 jk그룹 후계자의 숨겨진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뉴스 중간에는 ‘모 대형 종합 병원 이사장의 딸 한 모 씨와 열애 중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었다’는 기자의 설명도 나왔다.
“이제 루머가 되었군.”
퇴근길, 로비 한편에 마련된 TV 앞을 지나며 현준이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곧 도착할 송년회 자리에서 듣게 될 말들과 그에 대한 자신의 적절한 반응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외국에라도 다녀왔던 녀석들은 ‘언제 이혼을 했느냐’는 뒷북을 칠 것이었다.
소문에 민감한 편인 여자 동기들은 미주의 열애설과 각종 루머 때문에 그간 현준이 불편한 마음으로 지낸 것은 아닌지 안부를 물을 것이다.
‘짓궂음’은 배움의 정도와 상관관계가 없으므로 몇몇 녀석들은 '들고 있던 떡을 왜 바닥에 내팽개쳐서 남이 주워가게 만들었느냐'며 변죽을 올릴 것이 분명했다.
“jk그룹 주식을 좀 사뒀는데 그게 꽤 많이 올랐어.”
현준을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모든 동기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미주한테 소스라도 얻었던 거야, 뭐야?”
“노코멘트.”
jk그룹 후계자의 가족사에 대한 뉴스 다음에는 어김없이 그가 추진하고 있는 바이오산업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그중에는 이산병원과 합작하여 진행하는 해외 메디케어센터 사업에 대한 뉴스도 있었다.
기자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실인 것처럼 돌던 루머가 실은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해프닝이라 설명했다.
'현준이 던진 미끼를 문' 동기들의 화두가 자연스럽게 주식 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곧 일찌감치 개인병원을 개업한 동기들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토로가 이어졌다.
현준은 페이닥터를 하고 있는 동기들 틈에 섞여 한 친구의 이직 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을 나눴다.
흥이 나는 송년회가 아니었으므로 자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있는 동기 몇몇이 9시가 되기 전에 자리를 뜨려 했고, 현준도 그들 틈에 섞여 일찌감치 송년회에서 빠져나왔다.
“넌 왜 벌써 나와?”
“다들 얼굴 봤으니 됐다 싶어서. 신나게 놀고 그럴만한 기분은 아니어서 말이야.”
“아, 그래 그렇겠다. 이해해. 노는 것도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더라고.”
가장 먼저 결혼해 둘째까지 낳고 최근에서야 다시 취업을 한 여자 동기가 ‘사정은 다르지만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며 현준을 위로했다.
그리고 더는 현준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정신없게 만드는 주범, 두 아이가 주는 소소한 행복들에 대해 말하며 가볍게 대화를 이어갔다.
“택시 왔다. 내년에 또 봐. 내년 송년회에도 내가 나올 수 있으면 말이야.”
“그래. 조심히 잘 들어가고.”
동기를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혼자 덩그마니 번화가 한복판에 선 현준은 은설 생각이 났다.
작년 겨울, 은설의 구두가 망가져버렸던 그 길이었으므로.
현준의 손이 자연스럽게 은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자연스레 전화도 하고 만날 수도 있는 사이.
14살의 봄날처럼 다정하고 가까운 사이.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의 풋풋함처럼,
현준은 은설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차 한 잔 줄 수 있어?]
[차야 두 잔이라도 줄 수 있지. 근데······. 괜찮아, 너?]
[나? 왜?]
은설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지만 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뉴스. 마음에 걸려서.]
[아아, 그거? 이미 다 알고 있던 것들이야. 신경 안 쓰고 있었어.]
[그렇구나.]
은설이 다행이라는 듯 짧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현준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은설이 더 보고 싶어졌다.
[갈게. 지금.]
[지금?]
[응.]
[글쎄······. ]
[글쎄라니. 갑자기 왜 그래?]
[가볍게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뭐를?]
[별 건 아니고. 전에 거의 매일같이 우리 집에 오다가 하루 거른 날 있잖아. 그날 일에 대해서 좀 물어보고 싶어서.]
[그랬었나? 내가?]
[응. 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냐. '응, 아니'로만 대답해도 되거든.]
[응.]
[jk그룹 후계자와 사실혼 관계에 있는 여인이 후계자가 마련해 준 거처에서 출산했다는 뉴스 혹시 봤어?]
[그것도 뉴스에 나왔어?]
[응. 그러니까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 거지?]
[응.]
[그럼 혹시 그날, 그러니까 우리 집에 안 온 날이자 jk그룹 후계자의 쌍둥이 자녀가 태어난 날. 혹시 너도 거기에 있었니?]
[······. 응.]
[어쩐지! 감이 오더라니까!!!]
[그랬구나. 이야, 거 참 신기하네.]
[얼른 와. 멋진 일 하고 다니는 류현준아. 따뜻한 코코아라도 한 잔 타줄 게.]
[응! 한 30분쯤 걸릴 것 같아.]
현관을 들어선 현준의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마침 문 연 곳이 있어서.”
케이크를 내미는 현준의 손놀림에선 뿌듯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오, 여기! 우리 동네서 제일 맛난 케이크가게야.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늦게까지 열었나 보구나. 무슨 케이크로 샀어?”
은설의 질문에 현준이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아, 그러니까 그냥 트리모양 장식이 꽂혀 있는······.”
얼버무리는 현준을 보며 은설이 배시시 웃었다.
'깜박했네.'
케이크 시트의 맛, 시트 사이사이 들어 있는 과일의 종류, 케이크 위에 올려진 생크림의 퀄리티를 생생하게 중계하며 은설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려주는 사람은, 준수였다.
'무슨 케이크'인지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현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질문임을 은설은 한 템포 늦게 깨달았다.
"그냥 맛있어 보이는 걸로 골랐어."
“우와, 얼른 먹자. 궁금해 죽겠어. 어서 들어와!”
은설이 현준을 위해 기대를 한껏 부풀려 말했다.
식탁 위, 물을 미리 끓여 놓은 전기포트에서는 푹푹 거리며 김이 오르고 있었다.
드립 커피와 홍차, 녹차티백이 예쁜 찻잔 세트와 함께 나란히 세팅이 되어 있었고, 현준은 은설에게 묻는 일 없이 주로 자신에게 내어주던 찻잔 앞에 자연스레 앉았다.
"코코아는 없어. 내가 다 먹어버렸더라고."
현준이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는 해명을 하면서 은설이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와! 쿠키인데? 니가 말한 트리모양 장식 말이야.”
은설이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케이크엔 홍차지. 넌?”
“커피.”
“그것도 탁월한 선택이야.”
“녹차 마시겠다 했어도 그렇게 말할 거였지?”
현준이 은설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로 확인을 했다.
“아니, ‘역시 제일 비싼 게 뭔지 잘 알아보는 군.’ 하려고 했어.”
“녹차를 마실 걸 그랬네.”
“얘기 끝났어. 이미 커피 티백에다가 물 부었어.”
은설이 드립용 커피 티백이 걸쳐져 있는 잔을 현준 앞으로 밀었다.
무심한 듯 커피잔을 받아 들며 현준이 은설에게 물었다.
“내일은 뭐 해?”
“그래도 이브니까. 찬정에 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려고 했는데. 왜?”
‘같이 놀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스스로 놀란 현준의 눈이 당황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한껏 확장되었다.
뒷수습을 하려는 듯 황급히 꺼낸 말은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아냐. 그냥 궁금해서.”
은설이 현준의 속을 짐짓 모르는 체하며 현준의 내일 계획을 물었다.
“넌?”
“글쎄, 아직 특별히 정해둔 건 없어.”
대답하는 현준의 말투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은설은 알아채지 못한 채를 하며 현준에게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너도 오래간만에 가족과 함께 보내보는 게 어때? 부모님께 재롱이라도 떨어드리고······.”
“아직 안 돌아오셨어.”
“정말?”
“거기가 잘 맞으시는가 봐.”
현준이 조금 퉁명스레 대답을 하며 고개를 은설이 있는 곳이 아닌 거실 쪽으로 돌렸다.
새하얀 벽지가 노란빛의 조명을 받아 한껏 따뜻한 분위기를 내는 것은 여느 날과 같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왜 거실이 전보다 좀 휑해 보이지?”
“청소했어.”
“하하, 청소 좀 했다고 거실이 갑자기 휑해 보일 리가 없잖아.”
“소품들을 정리해서 그럴 거야.”
“아. 그렇네.”
은설의 말 대로 선반이나 코너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오브제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새해를 맞아서 거실을 새롭게 꾸며 볼 참인 거야?”
“아니. 짐 줄이는 연습 겸 정리를 좀 했어. 버릴 건 버리고. 이사를 좀 가볼까 해서.”
“이사를 간다고? 어디로?”
현준은 은설이 애초에 지금 병원을 택했던 이유가 집과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랬던 은설이 이사를 고려한다는 것은, 현준에겐 어쩌면 은설이 더 이상은 자신에게 진료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냐. 준수 씨 돌아오면 상의해서 결정해야지.”
“임준수 씨가 곧. 귀국을 하는가 보구나.”
“응.”
현준은 망설임 없이 은설에게 전화하고, 은설을 만날 수 있는 날들이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현준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꾸만 마음이 다급해져 갔다.
제 멋대로 뛰는 심장박동을 조절해 보려 현준은 거실 한편에 꺼내져 있기만 할 뿐 세팅이 되어 있지 않은 트리장식 앞으로 자신의 위치를 옮겼다.
“이건 왜 이렇게 둔 거야?”
“아, 그거. 버리려고. 버리려고 하다가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올해까지는 써야겠다 싶어서 거기다가 둔 거야."
"아······. 근데 내일이 이브잖아."
"그러게 말이야. 요즘 너무 게을러져서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둔 채로 지금까지 와버렸네. 그냥 치워야겠어.”
대답을 하는 은설이 멋쩍게 웃었다.
“괜찮다면 내가 좀 만들어 봐도 될까?”
“응?”
“어릴 때 이후로 직접 트리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오랜만에 한번 해보고 싶네. ”
“해주면 나야 좋지.”
은설이 환히 웃으며 현준에게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