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그리고 고마워.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트리를 세우며 현준은 어째서 은설이 이것에 손을 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꽤 크구나.”

바닥에 누워 있을 때도 꽤 커다랗다고 생각했던 나무는 옳게 세워두니 현준의 키를 훌쩍 넘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엄두를 못 냈던 거군.”

“그래. 내 무의식이 도전을 포기했던 거였어! 하긴 나 원래 게으른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은설이 억울함을 푼 사람처럼 의기양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게을러진 게 맞는 것 같기도 해. 나무야 그렇다 치지만 이런 장식들은 어디에라도 충분히 걸어둘 수가 있잖아. 이렇게······.”

현준이 동그랗고 반짝이는 빨간 오너먼트를 질끈 묶어둔 은설의 포니테일 위에 걸었다.

“악, 뭐야.”

“그러고 있으니 루돌프 같다. 빨간 코는 아니지만.”

“······. 어? 뭐야. 이것도 나뭇 가진가······.”

은설도 질세라 까치발을 살짝 들어 현준의 양쪽 귀에 노란 별을 달았다.

“오, 금 귀걸이 엄청 잘 어울린다.”

“이런 건 사양하도록 할게.”

하면서도 현준은 은설이 달아 놓은 귀걸이를 굳이 빼지 않았다.

현준을 보며 은설이 즐거워하고 있었고,

현준은 그저 환히 웃는 은설의 얼굴을 최대한 많이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현준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바로 그 장면이었으므로.

트리에 단 조명에선 따뜻한 불빛들이 춤을 추듯 깜박이고 있었고,

은설과 현준은 한껏 웃으며 장식한 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크리스마스 장식이 잔뜩 올라 있는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늑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에 취한 현준이 용기를 낸 것인지 아닌지도 잴 수 없을 만큼 불현듯 은설에게 말했다.

“사랑해.”

“······.”

눈이 좀 더 동그래지긴 했지만, 은설은 현준의 고백을 듣고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랑해. 은설아.”

“고마워.”

현준에게 화답한 은설의 얼굴에선 더없이 차분하고 단정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현준도 이미 느끼고 있던 대로의 대답이었다.

“그럴 것 같았어.”

“······.”

“이은설은, 기쁘고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고마우면 고마운 대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현준의 기억이 14살 여름, 지금처럼 느닷없이 고백했던 그날로 돌아갔다.

처음으로 받아 본 고백이라며 들떠했던 은설이 깡총이듯 걸음을 걸으면 그때마다 찰랑이던 긴 생머리가 저녁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었다.

한없이 기뻐하고 한없이 즐거워하던 은설은, 그때는,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너는 지금. 내게. 고마운 거로구나.”

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설이 새로 내린 커피와 차를 트리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현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슬픔도, 화도, 서글픔도, 아쉬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현준은 물끄러미 크리스마스트리의 깜박이는 조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설도 현준의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현준이 은설 쪽으론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은설에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걷어가라. 초라하다. 내가 좀.”

“네게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맙고 미안하단 뜻은 아니었어.”

“그럼?”

“네 마음속에 ‘사랑’의 기준을 나로 생각해 줘서 고맙고, 그게 미안하단 뜻이었어.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참 힘들었을 거라는 걸 아니까."

현준은 잠자코 은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도 그랬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이 너였어.”

“내가, 너의 기준이었어?”

“응. 너처럼. 류현준이 아니라면 류현준처럼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근데 왜? 왜 나를 선택하지 않는 거지? 임준수 씨보다 늦게 다시 나타난 게 그게 문제인 거야?”

억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현준의 고개가 사슴 같은 그의 목 길이만큼 떨구어졌다.

위로하듯 현준의 등을 몇 번 쓸어준 뒤, 은설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었어. 너에게 하듯 온전히 내 마음을 줄 수가 없어서."

"······."

"처음엔 좀 아꼈던 것 같아. 언젠가는 다시 너를 만날 테니까 그때를 위해서라도 내 마음을 다 주지 말고 좀 남겨둬야 한다고. 제일 중요한 건 내주지 말아야 한다고.”

현준은 미주를 생각했다.

미주에게 했던 자신의 행동이 꼭 그러했다.

은설에 대한 미련이 미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어 주지 않아야 한다며 현준을 다그쳤었다.

“그러다 너를 다시 만나는 일이 어려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땐, 새로 만난 사람이 너처럼 내 마음을 다 가져가 주기를 바랐었어. 근데 그것도 쉽지가 않더라고."

"알아, 그건. 나도······."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내 성격 탓일 수도 있고, 그럴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내 인생에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나는?”

“너도 첫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스타일은 아니······. 넌 14살이었잖아. 첨 봤을 때.”

현준이 한번 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류현준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준수 씨를 만나서 결혼이라는 걸 했어.”

“그런 불행한 선택을 왜 했어. 바보같이.”

은설이 부드럽게 웃으며 도리질을 했다.

“나도 내가 불행할 줄 알았어.”




‘줄 알았어’는 실현되지 않은 예상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었다.

“그런데 행복하구나.”

“응.”

“어째서? 아무였다며? 누구라도 상관없어서 선택한 임준수 씨라며?”

“그러게."

현준의 말에 기억이 잠시 예전 어딘가로 돌아가는 듯 은설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은설의 얼굴은 슬픔이나 아쉬움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결혼이라는 걸 하기로 한 사람이니까 기왕이면 최선을 다해 잘해주고 싶다.'처음엔 딱 그 생각."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

"기왕이면 그 사람이 기쁘길 바랐고.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 솔직히 처음엔 미안해서 잘해준 것도 있는 것 같아."

미주에게 꼭 그랬었다.

현준도.

"그러다 그 사람에게 속상한 일이 생기면 같이 울고,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뛸 듯이 기뻐하고. 그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밥을 짓고. 그렇게 되더라고."

그러나 현준은 하지 않은 일.

은설은 준수에게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빈 틈을 살펴주고 채워주면서 나도 기뻤어. 그러다 알게 되었어. 지금까지 내가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애를 쓴 적이 없었다는 걸."

"······."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공을 들이고 아꼈던 적이 없었어. 14살 때 만난 첫사랑 류현준 이후로 말이야. 그러고 나서 그때까지는 류현준에게서만 느꼈었던 온 세상이 내 것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충만감을 준수 씨에게서도 느꼈어."

“······.”

"머리부터 발끝까지 류현준과는 눈곱만큼도 닮은 구석이 없는 그 사람한테서.”

"······."

“현준아, 나는 지금 그 사람을 사랑해.”





현준은 그제야 자신이 넘을 수 없는 벽의 주인이 준수가 아닌 은설임을 깨달았다.

은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내게 사랑은 내가 아끼고 공들인 만큼 커지는 감정. 그러니까 내가 결혼한 사람이 임준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해도 나는 아마 사랑을 했을 거야."

"······."

"어쩌면 그 사람 치우고 너를 다시 내 옆에 두면 또 너를 다시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은설이 다음 말을 아꼈다.

“······. 그러고 싶진 않구나.”

“응.”

“그런데 왜 다시 나를 만났어? 난임 시술 때문에?”

“그것 때문이었다면 너를 진료실 밖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겠지.”

“그럼 왜?”

“니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을 공허함과 아쉬움을 이해했으니까. 그것이 채워지길 바랐어. 어느 정도라도. 그리고 너를 다시 만나고 나서 내가 깨달았던 걸 너도 곧 알게 될 거라 생각했어.”

"그게 뭔데?"

“지금의 내가 14살의 이은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거.”

“······. 다르지 않아.”

“아냐, 달라. 그리고 너도······. 너도 내가 알던 14살의 류현준은 아니야.”

“······.”

“우린 그냥 눈앞을 추억으로 가려 버리고, 마치 예전의 우리를 다시 만난 것처럼 행동했을 뿐야.”

“······.”

“나는 너를 14살 때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좋아할 수가 없어. 이제 너는, 내가 챙겨주고 보듬어줄 것이 많던 그 어리숙하고 자그마한 남자아이가 아니니까.”

"나한테 너는 예전과 똑같아."

"아냐. 달라."

현준의 시선이 은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한번 더 꼼꼼히 살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지 않았다.

맑고 청아했던 목소리는 조금 더 굵어지고 대신 서른 중반을 넘긴 여자의 완숙함이 베어나고 있었다.

"다르지, 않아."

현준은 그제야 은설의 변한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선 끝맺음 없이 끝이 나버린 그 감정이 네게선 제대로 정리가 되길 바라.”

“나쁘네. 오늘을 기다리면서 계속 나를 만난 거라니. 나쁘다, 이은설.”

현준이 미움 섞인 눈으로 은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너를 보면 꼭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14살 이은설이 정리가 되어야만 너에게도 그다음이 있을 수가 있다는 걸 아니까.”

“내게 다음이 있겠니?”

현준이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린 사람처럼 목소리에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미 있잖아. 이은설만큼 아니, 그 보다 더 애쓰고 공들였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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