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이브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진료실 창문 밖으로 얼음처럼 청명한 겨울하늘이 보였다.

“환기를 좀······.”

현준이 빼꼼히 연 창문 틈으로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악.”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고기압의 영향으로 날은 맑고 바람은 몹시 찼다.

“놀맛 안 나는 크리스마스이브구나. 잘 됐네.”

심통 맞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현준이 진료실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로 창을 향해 앉아, 진료를 시작하기 직전의 망중한을 즐겼다.

지난 20년을 끌어왔던 첫사랑이 어제로 끝이 나고,

그리고 다시 새날이 시작되었다.

‘결국은’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지 ‘드디어’라는 말을 붙여야 할지 헷갈릴 만큼,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시원 섭섭했다.

"선생님 창문 닫으세요. 이렇게 추우면 환자들이 싫어해요."

정간호사가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현준이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창문을 닫으며 정간호사에게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퇴근하고 뭐해요?"

"둘째가 오늘 생일이라 마트 가서 선물 사주고 오려고요."

"정간호사 둘째도 있었어요?"

"에에? 선생님하고 밥 먹으면서 우리 애들 얘기 꽤 많이 했잖아요."

"그게 다 한 명 얘긴 줄 알았어요."

"에이, 샘 너무 무심하시다."

현준이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고, 정간호사도 장난스레 몇 마디 더 타박을 하곤 총총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현준은 평소 잘 쓰지 않던 '선물 보내기'아이콘을 눌러 정간호사에게 아이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 케이크를 보냈다.




연휴를 앞둔 탓인지 시술스케줄이 꽤나 많이 잡혀 있었다.

첫 인공수정시술을 앞둔 환자부터 세 번째 난자채취를 하는 환자, 일곱 번째 이식시술을 앞둔 환자까지.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이들에게 현준은 전보다 훨씬 세심하고 다정한 격려를 전하며 시술에 임했다.

"선생님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그래 보여요? 연휴 앞두고 나도 모르게 신이 났나?"

"아, 맞네. 이번 연휴 중엔 시술하러 잠깐 나오시는 날도 없죠?"

"옙."

현준이 가벼운 목소리로 기분 좋게 대답했다.

"실은 아침에 눈도 퉁퉁 부으시고 얼굴도 꺼치르르 해 보이셔서 걱정을 좀 했었어요. 이러다 오후에 시술취소 연락 돌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아,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얼버무리는 현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정간호사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암튼 괜찮아지셔서 다행이에요. 우울한 이브 될까 봐 조마조마했었어요. 하하."

"네. 하하."

운전대를 붙잡고 원이 남지 않을 때까지 울었던 지난밤에 대해선 정간호사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즐거운 연휴를 앞둔 크리스마스이브였으므로.




"선생님, 오늘 마지막 진료는 예약진료인 거 아시죠?"

"아, 네."

예약제가 아닌 병원에서 예약진료를 받아주는 환자는 유일하게 미주뿐이었다.

퇴근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미주가 현준의 진료실로 들어섰다.

"삼촌 먼저 뵙고 오느라요. 오늘 말씀이 너무 길어지셨어요."

미주는 깍듯한 말투로 예약시간보다 십 분쯤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알아. 항상 거기 먼저 들었다 오는 거. 원장님은 잘 계시지?"

"너무 루즈하게 근무하는 거 아녜요? 자기 병원 원장님 안부를 나한테 물으면 어째요? 이렇게 근무할 거면 우리 쪽으로 이직을 하라니까. 잘릴 걱정은 안 하게 해 줄게요."

예상치 못한 현준의 농담에 미주가 현준 앞에서 어색하게 잡고 있던 각을 풀며 장난스레 말을 받아쳤다.

현준이 미주에게 단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었던 '격의를 모두 거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맡고 있는 환자들 다 졸업시키면 한번 생각해 볼게."


[이은설 말고, 세상 더없이 아끼고 공들일 사람을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14살 이은설에게 했던 만큼만 그리하면 분명히 그 사람 사랑하게 될 거야.]


트리 앞을 벗어나려는 현준에게 은설이 남긴 마지막 이별의 말이었다.

현준은 자꾸만 귓가에서 리플레이되는 그 말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영원히 끝’이라는 느낌이 현준의 심장 한가운데에 각인이 되는 듯했다.

은설의 말 대로 ‘20년 만에 이루어진 제대로 된 이별’이었다.




급작스레 괴로울 정도로 가슴이 조여 오고 호흡이 꼬였다.

“후우-.”

“진료 보다 말고 왜 그래요?”

“응?”

“왜 안 하던 행동을 하고 그래요? 불안하게······. 어디 아파요?”

“아냐.”

“진짜?”

“응.”

현준의 대답과 상관없이 미주가 현준에게 달려들어 아랫눈꺼풀을 뒤집어 살피며 물었다.

“진료실에 혈압계랑 산소포화도 측정계 있죠?”

“아니······. 있어도 없어.”

현준이 자신의 앞에 바짝 다가선 미주의 어깨를 슬며시 밀어 둘 사이의 간격을 다시 진료 책상 넓이만큼 벌리며 말했다.

“여기가 내 진료실인 걸 잊은 건 아니지? 산. 부. 인. 과.”

“그게 뭐가 중요해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지금 딱 봐도 정상이 아닌데. 가슴에 통증 있고 그렇진 않아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 심장 지금 정상 맞아.”

“심장내과 의사 앞에 두고 자가진료하기예요?”

“원인을 알아. 그러니까 미주가 날 진료할 필요는 없다고.”

“어제오늘 뭐 스트레스 크게 받은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뭐. 비슷해.”

“스트레스 때문에 부정맥 비슷한 증상이 올 수 있기는 하지만······. 뭔데요? 무슨 일이길래 천하의 류현준이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지?”

“······.”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우리 사이가 미주알고주알 뭐 그럴 사이 아니긴 하죠. ······선배 가끔 새초롬한 표정 짓고 그러는 거 알아요? 사람이 자기 얼굴은 못 보니까 본인은 잘 모르죠? 지금 표정 완전히 새침데기 같아요.”

미주가 괜한 트집을 잡아 현준을 나무랐다.

“······. 그래서 지금 나한테 뭘 바라길래 이러는 건데?”

“진료 끝났으면 그만 일어나죠. 밥이나 같이 먹어요. 이브 날 청승맞게 집에서 혼자 술 마시고 그러지 말고.”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번화가의 레스토랑들은 예약 없이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주는 부러 사람이 북적이는 곳만 찾아 들어가려 했다.

결국 골목 안쪽 중에서도 끝자락에 숨어있는 작은 펍에 이르러서야 둘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할 수 있었다.

“여기 숨은 맛집이네요.”

시금치가 잔뜩 올라가 있는 샐러드 피자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미주가 낭랑히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연말을 맞아 각자의 동기모임에서 만난 선후배들의 소식을 전하는 아주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영은언니도 한번 만나봐야 하는데. 하후 때······.”

미주가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10시가 넘어가자 미주의 얼굴에선 피로한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학부 때 영은언니가 후배들 진짜 많이 챙겼거든요.”

“가자. 이제 그만 마음 써도 돼.”

“뭘요?”

“신경 쓰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지금 어디 이상이라도 있을까 봐 찜찜해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 당신.”

“어떻게 알았어요?”

“눈빛이 딱 진료실에서 환자 보는 의사 눈빛이야.”

“혼자 두기 불안해서요. 이것도 직업병이라니까. 덕분에 이브날 청승은 면했어요, 우리 둘 다. 그쵸?”

“그러게.”

미주가 함박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현준이 미주를 따라서

웃었다.




“준수 씨이! 여기! 여기! 꺄악!!!”

입국게이트를 들어서는 준수를 향해 호들갑스럽게 두 손을 흔들며 은설이 환영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정작 준수가 자신의 옆까지 다가왔을 땐 포옹을 하는 대신 준수의 손에 들려 있던 짐을 뺏어 들었다.

“히익. 무거워.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면세점에서 산 선물들이지.”

“오, 내 꺼였구나!”

“전부 다는 아니니 김칫국물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쳇. 좋다 말았네.”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하면서도 은설은 준수의 팔에 반쯤 매달려 있었다.

고단했을 여정에 대해 묻고, 또 혼자 적적하게 보냈을 지난 시간에 대해 궁금해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은설의 차 안에서 둘은 두 달여 만에 재회한 회포를 풀었다.

“우리 마누라 목소리에 신이 가득하네. 신랑이 아주 돌아오니 좋죠? 이제 심심해하지 않아도 돼.”

“나 하나도 안 심심했는데?”

“뭐야. 신랑이 돌아온 게 안 반갑단 거야?”

“반가운데, 없었을 때도 심심했던 건 아니었다고요. 히힛.”

“헐. 나 이거 섭섭해야 하는 거야, 잘 지내고 있었다고 칭찬해야 하는 거야?”

“기왕이면 칭찬으로 부탁해요. 매일 원룸, 투룸, 미니멀라이프 검색하면서 남들 어떻게 꾸미고 사나 보느라 바빴어.”

“읭? 오피스텔 갈 것도 아닌데 그런 건 왜 봐?”

준수가 절대로 그곳에 갈 생각은 없다는 투로 못을 박으며 물었다.

“그 오피스텔 아니어도. 나중에 이사를 가게 되면 집을 좀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지.”

“······. 뭐 벌써부터 그런 준비를 하고 그래.”

“그냥요.”

인천대교의 시작부터 끝까지 둘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안에서 각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하느라 머릿속이 자꾸만 혼자서 바쁘려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깐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고요한 차 안의 정적을 깬 것은 은설의 배에서 울리는 ‘꼬르륵’ 소리였다.

“우렁차네. 배고파?”

“응. 오늘 끼니를 아직 한 번도 안 먹었어.”

“진작 말하지. 공항에서 뭐라도 먹고 나올걸.”

“준수 씨 만나자마자는 정신이 팔려서 배가 고픈 걸 까먹고 있었어요.”

“신랑이 그렇게 반가웠어?”

“응.”

“고맙네요.”

“별말씀을.”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점저는 내가 쏠게요. 신랑은 족발이 먹고 싶은데. 어때요?”

“오, 야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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