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해볼 수 있는 것들, 겪을 수 있는 것들 모두 다 한 거 같아.”
체념한 듯 담담한 은설의 말에 수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가만히 있어도 ‘훅훅’ 내뱉어지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수지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었던 상체를 들어 자세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난 무조건 니 편.”
“응?”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난 무조건 니 생각을 지지할 거라고. 맞춤형으로다가.”
수지의 설명을 들은 은설이 피식하며 웃음을 흘렸다.
“근데 나 아직 결심은 못했는데.”
“그래? 그럼 결심하면 전화해. 무조건 힘나게 해 줄 테니까. 혹시 나중에 마음이 변해서 니 결심 번복하게 되면 그때도 나랑 만나. 그때도 니 맘에 쏙 들게 니 편 되어 줄 테니까.”
수지가 큰 결심 후 들이키는 독주처럼 접시 위에 남아 있던 당근 케이크를 몽땅 집어 한 입이 틀어 넣었다.
“우리 수지 요새 태교 엄청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말마다 어쩜 그렇게 이뻐?”
“응. 요새 너무 좋은 거만 보고 듣고 살았더니, 입에서 보석이 툭툭 튀어나온다야.”
“그래서 태교는 재밌어?”
“지루해. 내 성질에 잘 맞는 활동은 아냐. 부뜰이가 얼른 밖으로 나와서 지가 알아서 책도 읽고 음악도 틀고 좀 그랬으면 좋겠어.”
“예정일이 얼마나 남았지?”
“3주쯤.”
은설은 3주 후면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바쁘고, 정신없고, 옆에 아기가 누워 있는.
은설의 상상 속에서 투명한 오색의 하트가 비눗방울처럼 날아다니며 수지의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퇴근을 한 형석이 감동으로 벅차오른 얼굴을 하고, 아이를 안은 수지를 향해 달려왔다.
‘어쩌면 내 인생에선 없을 장면이겠지......’
은설이 잠시 고개를 돌려 자꾸만 씁쓸해지려는 표정을 감췄다.
“다음 약속은 어디야?”
“홍대.”
“너무 먼데? 갈 수 있겠어?”
은설이 휘둥그레한 눈을 뜨며 터질 듯 솟아올라 있는 수지의 배를 바라보았다.
“형석이가 데려다준대. 지금은 집으로 가는 거야.”
“아아, 그럼 다행이고. 지금은 집으로 간다니 맘 편히 이거 줄 수 있겠군. 받아.”
“이거 뭐야? 나 주는 거야?”
“니 꺼 아니고. 부뜰이 꺼.”
“오호~ 고마워.”
“좀 큰 걸로 샀어. 제일 작은 사이즈는 이미 많이 받았을 거 같아서.”
“땡큐! 우리 은설이 센스쟁이네?”
“학교 선생님들이 다들 그렇게 선물하더라고.”
“아하! 역시 워킹맘들이 많은 직장이라 보고 듣는 게 많구만.”
지하철역까지 수지를 데려다주며 은설이 말을 이었다.
“배우는 건 많은데 써먹을 데가 별로 없다.”
“나를 가르쳐.”
수지의 말에 은설은 피식 웃음이 났다.
수지이기 때문에 나는 웃음이었다.
“그렇게까지 써먹고 싶진 않아.”
“글쿤. 엄마한테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은설이가 알려준 거라고 니 핑계 좀 대려고 했더니. 울 엄마가 ‘이거 은설이가 얘기해 준 거야.’ 이러면 좀 수그러드는 게 있거든. 이은설이는 선생님이니까, 하하. 실은 요새 나 엄마랑 거의 매일 싸우고 있거든."
“왜?”
“내가 온갖 책이며 블로그 보면서 공부해 가지고 부뜰이 신생아용품 준비하고 있는데, 울 엄마가 자꾸 이거는 필요도 없는데 왜 샀냐, 저거는 왜 겨우 요만큼만 사놨냐 그러면서 자꾸 감 놔라 배 놔라 해가지고.”
“부뜰이가 첫 손주인 거지?”
“응. 양가에서 다 그렇지.”
“너 보다 더 기대들 하시고 계시겠네, 어르신들께서. 중요한 거 아니면 맞춰 드려.”
“이상하게 남의 블로그는 믿어도 울 엄마 말은 못 믿겠어. 다 30년 전에 애 키우던 걸 기준으로 말하는 거 같아서.”
수지는 개찰구 앞에 이를 때까지 여러모로 잘 맞지 않는 엄마와의 갈등을 토로했다.
“이제 시작이겠지? 어쩜 시어머니 하고도 이러겠지? 지금까진 정말 참 '굿시어머니'셨는데 말이야.”
수지의 물음에 은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미리 걱정은 하지 마. 막상 부뜰이 나오면 천군만마 같은 지원군이 되어주실지도 모르잖아.”
“에효.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정말.”
수지가 손을 한껏 뻗어 배가 철봉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개찰구 안으로 들어섰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수지를 지켜보던 은설은 수지가 무사히 건너편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무리 인사를 했다.
“순산해.”
“응. 땡큐. 부뜰아 이모한테 인사해. 이모, 다음번에 만날 땐 얼굴 보면서 인사해요. 빠빠이.”
“부뜰아, 쑴풍하고 잘 나와야 해. 나오면 이모가 또 선물 사줄게에~.”
수지의 농에 맞춰 은설도 수지의 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계단 아래로 수지의 머리끝이 사라질 때까지, 수지가 무사히 내려가는 지를 지켜보았다.
은설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더 빨랐다.
수지를 지하철 개찰구 앞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은설은 버스정류장이 나올 때까지 터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내내 부뜰이 맞을 준비 이야기만 했던 수지가 얄미웠던 것도 아니었다.
수지의 이야기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도 진심이었다.
다만, 왠지 모를 헛헛함과 쓸쓸함.
아니 왜 인지 이유를 알고 있는 헛헛함과 쓸쓸함이 씁쓸했다.
‘이런 감정에도 적응을 해야 하는 거겠지. 난임치료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면······.’
“구경 잠깐 하고 가세요. 전화번호 안 적고 구경만 하고 나와도 이거 그냥 드리는 거야.”
“에?”
멈칫하는 은설의 빈틈을 알아챈 아주머니가 아주 능숙하게 팔짱을 끼고 은설을 이끌었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은설의 손에는 벌써 아주머니가 건넨 미용티슈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티슈 두 곽이랑 -이거 질도 좋은 거야. 엄청 부드러워. – 부직포 행주 다섯 장짜리랑 휴대용 물티슈 다섯 개 들어 있는 거예요. 걍, 잠깐 구경하고 이거 받아가요, 언니.”
아가씨로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애엄마인 것 같지도 않은 은설에게 아주머니는 자연스럽게 ‘언니’라는 호칭을 썼다.
“결혼했어요? 신혼부부?”
“예, 뭐. 신혼은 아니고.”
“애기는?”
“어···없는데요.”
“아유, 그럼 딱이네.”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에 아주머니는 은설을 오피스텔 홍보관의 안내 담당자에게 넘겼다.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설 또래의 여자가 은설에게 과한 감사인사부터 했다.
“실은 이모님들께서 힘들게 아르바이트하고 계신 거거든요. 집에서 살림만 하시던 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길에서 모객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들어와 주신 것만으로도 고객님들께 감사하더라고요.”
“아, 예.”
졸지에 ‘선한 사람’이 된 은설은 어느새 여자를 따라 순순히 오피스텔 모델하우스를 구경하며 성실히 여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