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기대는 접는 편이 낫겠어요.”
“왜? 느낌이 그래?”
준수의 물음에 은설은 준수가 사 온 김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심드렁히 ‘응’이라고 대답을 했다.
“아예 느낌이 안 오는 거면 저번 같은 자궁 외 임신도 아닐 테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네요.”
준수가 어떻게든 긍정적인 쪽으로 이야기를 하려 애를 썼다.
“그런 거면 좋겠는데······. 오전부터 갈색혈이 나와요.”
“그건 또 뭐야?”
“시커멓게 변한 피. 출혈된 지 오래되어서.”
여기까지 들은 준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지금 타이밍에선 새빨간 피가 더 나쁜 거예요. 소량의 시커먼 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대. 아까 병원에 전화해봤어. 어차피 모레가 진료 보는 날이니까 가서 검사해 보면 알겠지.”
“검사를 왜 미뤄. 이상 있는 거 같으면 빨리 가서 조치를 취해야지.”
“이렇게 극초기는 하루 이틀 검사 늦게 받는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요. 뭐가 보이지도 않는 걸 뭐. 지금 가봐야 피검사나 하겠죠.”
“임신테스트는?”
“아직.”
“왜?”
“그냥. 빨리 알기 싫어서.”
갈색혈은 생리라기엔 지나치게 양이 적고, 착상혈이라고 하기엔 인터넷에서 알아본 정보보다 양이 좀 많은 듯싶었다.
이렇다 할 통증도 없이 팬티라이너에 계속 묻어나고 있는 갈색혈의 흔적을 보며 은설은 마음이 부쩍 울적해진 상태였다.
“속상함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운 심정이에요. ‘에휴, 이렇게 마무리가 되나 보구나.’ 뭐 그런 마음?”
준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준수 씨는?”
은설이 상황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준수에게 부러 질문을 했다.
“아무 생각 없는데? ‘그냥 그런가 보다.’ 그러고 있는데?”
“거짓말. 왜 아무 생각이 없어? 이제 우리 인생에 자식이 없는데.”
“없으면 없는 거지, 뭐. 광식이형 기억나지? 그 형네도 시험관 하다가 접었잖아. 광식이 형이 그러는데 접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대."
"그렇대?"
"50살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잘려도 자긴 괜찮다고. 기를 쓰고 돈 벌 이유가 사라지니까 세상이 편안하고 아름다워 보인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대?”
준수가 전하는 말에 은설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도 내일모레부터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겠지. 다른 걱정 안 하고, 하고 싶은 일만 마음껏 하면서 살 수 있을 테니.”
“그럼 나도 일찌감치 명퇴하고 준수 씨랑 여행이나 실컷 다니며 살래요. 아버지 친구분 중에 경복이 아저씨라고 아이 없이 두 부부만 사는 분 계시거든?"
"아, 그 은행지점장까지 하셨다는?"
"응. 엄마 말로는 그 집이 제일 고민이 없대. 모아둔 돈도 많고. 반찬 해달라 애 봐달라 보채는 자식도 없고. 심지어 금슬도 여태 좋대. 속 썩이는 자식이 없어서 그런가 보대.”
“거 봐요. 자식이 부부 사이의 애정도나 행복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니까.”
“맞아.”
준수와 은설은 마치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맞은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야 할 둘의 미래에 대해 두서없이 의견을 나누다가 티격거리기도 하고,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게 하려 애를 썼다.
“갈색혈이 사흘째 계속 조금씩 나오고 있어.”
“양이 더 늘지는 않고?”
“응.”
은설의 말에 현준의 쫑긋이 귀를 세운 토끼처럼 반응을 했다.
“테스터 혹시 해 봤어? 흐린 지 진한 지?”
“아니.”
“피검사 결과 나와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착상되는 과정 중에 자궁 내 피고임이 일어나기도 해. 고여 있던 게 조금씩 새어 나오면 갈색혈이 꽤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어.”
“그래? 그럼 혹시 나 또 소파수술 해야 하는 거야?”
“아니. 정상적인 임신 과정 중에도 그럴 수 있다고.”
현준의 입에서 나온 ‘정상적인 임신의 과정’이라는 말에 은설의 표정이 고무되었다가 순식간에 다시 침착해졌다.
“그런 얘긴 나중에 해줘. 괜히 기대만 잔뜩 했다가 실망하면 어떻게 해.”
“알았어. 결과 나오면 전화할 게.”
“니가 직접?”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아, 그렇구나. 고마워.”
은설이 알아볼 수 있을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현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춰?]
[공력이 높다 보니 천리안으로 다 지켜볼 수가 있는 거지, 마누라를.]
[안 웃겨요.]
[쳇, 마누라가 웃을 줄 알았더니만. 친구가 뭐래?]
[걔도 정확히는 모르지 지금은. 이따 피검 결과 나오면 전화해준대요.]
[아픈 건 아니라는 거지?]
[그것도 피검 결과 나와봐야 알아요. 지금은 초음파로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때라 피검사 밖에 안 했어요.]
[괜히 불안하네. 전화는 언제 해준대?]
[오후 늦게요. 4시쯤?]
[기왕 외출한 김에 기분 전환 하고 점심도 맛난 거 사 먹고 들어가요. 너무 무리해서 돌아다니지는 말고.]
[응.]
은설이 이제 막 문을 연 쇼핑몰 아케이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쇼핑몰 안은 고요하게 느껴질 만큼 한산했다.
은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커플 잠옷을 파는 속옷가게와 유아용품점을 번갈아 들어가며 두서없는 아이쇼핑을 했다.
은설의 머릿속에 두 사람이 서 있는지, 세 사람이 서 있는지에 따라 발길 닿는 곳이 달라지고 있었다.
아직 은설과 준수의 앞날에 확실하게 정해진 한 바가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 가지 콘셉트를 정해 쇼핑을 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현준의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은설은 '그저 늦은 오후에 걸려 올 연락을 받고 상처받지만 않으면 될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주말이면 자리가 없어 들어갈 엄두도 못 내었던 카페의 가장 예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은설이 커피가 들어가지 않은 라테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혼자 먹어서 그런가 기대만큼 맛은 없네.”
하릴없이 앉아 쇼핑몰 풍경을 구경한다고 해서 시간이 더 잘 가는 것도 아니고, 잡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은설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은설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떨어뜨렸다.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 그런가 되게 피곤하네.”
졸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깊이 잠들어 버리면 현준의 전화를 놓칠 수도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일어나려 애를 썼지만 피곤에 전 몸이 좀처럼 은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전화라도 받고 나서 자야······.”
혼잣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은설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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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진 수박밭을
바다 위의 돛단배처럼 유유자적 돌아다니던 은설은
수박밭의 주인인 듯한 쪽진 머리의 할머니가
웃는 얼굴로 알려준 자리의 수박덩굴 속을 헤쳐 보다가
수박만큼 커다란 알밤 두 알을 주워
양쪽 품으로 끌어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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