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같이 가자, 어디든.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은설과 준수가 진료실을 나서자마자 현준은 진료책상 위에 깔려 있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번 더 확인했다.

‘분홍색이라니.’

고개를 든 현준의 눈에 수십 개의 분홍 점들이 들어왔다.

현준은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물에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홍색 카디건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카디건 되게 마음에 드시나 봐요. 며칠 째 그 옷만 입고 오시네요.”

정간호사가 짓궂게 알아본 티를 냈다.

“아, 네. 이제 곧 봄이라서요.”

대충 말을 내뱉고 1초도 되지 않아 현준의 얼굴색이 카디건만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곧 봄이라서 분홍색 카디건을 입었다니! 어째서 그런 미친 소리를······.’

현준은 제멋대로 돌아간 자신의 뇌와 입에 주먹이라도 한방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정간호사는 현준의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맞네요. 이제 곧 봄이네. 그러고 보니 선생님 카디건이 꼭 벚꽃색 같아요. 색감 너무 고급지다. 우리 선생님은 패션센스까지 완벽하시다니까.”

낭만이 가득 찬 얼굴을 한 정간호사가 현준을 한껏 치켜세웠고, 현준은 더욱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정간호사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네, 그럼 다음 환자.”

“다음 환자 한미주 씨인데 방금 전에 못 온다고 연락 왔어요.”

“또요?”

미주에게 또다시 낭패를 당한 현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엔 응급환자 때문이라고 사유도 전하셨어요. 내일 마지막 환자로 예약 가능하냐고 물으셔서 선생님께 여쭤보고 연락드린다고 했는데. 어찌할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정간호사에게 마지못해하는 듯 마는 듯 답을 준 뒤, 현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 옷을 내일 또 입고 와야 하는 건가.’

벌써 세 번째 미뤄진 미주의 진료 때문에 현준은 같은 카디건을 사흘 연속 입고 있는 중이었다.

그저 미주 앞에서 ‘당신이 선물해 준 카디건을 내가 이렇게 잘 입고 다니고 있다’는 티를 한번 내고 싶을 뿐이었다.

현준의 그 소박한 계획이 자꾸만 변경되는 미주의 일정 앞에 오늘도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현준의 코가 무의식 중에 큼큼 거리며 팔뚝언저리의 냄새를 맡았다.

사흘 치 향수가 쌓인 자리에선 슬슬 향기가 아닌 냄새가 나려 했다.

더구나 오늘은 난임클리닉의 윗선부터 말단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회식 아닌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무엇을 먹든 냄새가 베일 것이 분명했다.

고민에 휩싸인 현준이 불안한 듯 이마 라인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 마치 구세주와 같이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정간호사가 현준에게 구원의 음성을 들려주었다.

“옆건물 2층에요. 약국 옆에. 거기 세탁소가 하나 있는데요. 비싸서 좀 그렇긴 한데 옷 맡기면 한 시간 안에 세탁해서 가져다까지 주는 서비스를 해요.”

“진짜요? 그런 게 있어요?”

정간호사의 말을 들은 현준이 벚꽃처럼 환해진 얼굴이 되어 거듭 확인을 했다.

“병원 주변이 죄다 산후조리원이잖아요. 양복 입고 출근하는 남편들이 많이 이용 하나 보더라고요. 거기 새벽 일찍 문 여니까 내일 출근할 때 맡기고 오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되겠네요!”

인류의 난제를 해결한 영웅을 보듯 정간호사를 바라보던 현준의 머릿속에 불현듯 카디건 세탁법보다 더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근데 정간호사······.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뭣 때문에 고민하는지?”

정간호사가 살짝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선생님만 몰라요. 한미주 씨랑 선생님이랑 재결합한다는 소문 돌고 있는 거.”




마지막 진료 환자로 미주가 오면 정간호사는 눈치껏 자리를 오래도록 비웠다.

“솔직히 예쁘죠?”

“뭐가?”

차트를 살피는 동안 느닷없이 들어온 미주의 질문에 현준이 의연한 체를 하며 무심히 되물었다.

“그 카디건요.”

“글쎄. 그냥 생각 없이 잡히는 대로 입고 나와서······.”

“거짓말. 벌써 세탁 한 번 했네. 드라이클리닝 했나 봐요? 세탁소 냄새 나. 뽀송한 걸 보니까 세탁하곤 오늘 첨 입었나 본데? 맘에 들었네, 이 옷.”

“싫진 않아.”

“응 좋아. 이렇게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면 어디 덧나요?”

“덧나. 마음에······. 미안한 게 많아서 좋단 말도 잘 안 나와. 미안해서 덧났어, 벌써.”

“······. 왜 그래요, 새삼스레? 농담을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쳐요?”

“농담 아냐. 진짜야. 진짜로······. 진심으로 미안해. 미주한테.”

“여기서 ‘뭐가요?’라고 물어봐야 선배도 딱 부러지게 설명은 못하겠죠? 나한테 구체적으로 뭐가 미안한 지.”

“응. ‘그냥 다’ 이 말 밖엔 못해, 지금은. 내 능력 밖이야.”

“‘그냥 다’가 정답이지, 뭐. 나한테 잘해준 게 하나도 없었잖아.”

“진료는 빼 줘. 그건 진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잘하려고 노력했어.”

“이 봐, 이 봐. 이 대목에서 눈치 없이! 진료는 잘해줬단 얘긴 왜 해요?”

“미안. 이것도 정식으로 사과할게. 눈치 없어서 미안해.”

“됐어요, 사과한다고 뭐 달라져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나 가도 되죠? 더 있어 봐야 쓸데없는 얘기만 길어지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미주가 말을 이었다.

"카디건 잘 어울려요. 사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지금처럼 잘 입고 다녀요. 사과는 그걸로 대신 받을 테니까 인증샷 종종 찍어 보내고요. 알았죠? 그럼 잘 지내요, 선배.”

“잠깐!”

쿨하게 일어서는 미주를 따라 자리에 우뚝 선 현준이 당황스레 급해진 목소리로 미주를 불러 세웠다.

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던 현준의 목소리 톤에 놀란 미주가 눈이 동그랗게 된 채 우두커니 현준을 바라보고 섰다.

“······.”

“······.”

“······.”

무작정 미주를 불러 세운 스스로에게 당황을 한 듯 현준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현준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 못한 미주가 이유 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먼저 현준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같이 가자.”

“응?”

“같이 가자고.”

“······.”

“같이. 어디든.”




“이제 말씀드려도 되겠지?”

침대에 누워 젤리곰처럼 생긴 태아 사진 두 개를 보고 또 보며 은설이 준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의사 친구도 그랬잖아. 9주 넘기면 웬만한 고비는 다 넘긴 거라고. 말씀드려요. 너무 늦게 얘기하면 또 그것도 섭섭해 하셔들.”

“응. 내 생각도 그래요.”

은설이 몸이 무거워진 티를 내며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 얘네들 사진 찍어서 보내드리게. 한 화면에 같이 있는 사진이면 좋을 텐데. 현준이가 전부 다 따로 찍어 놨어.”

“자세히 보느라 그랬겠지. 이게 뭐 검사 결과 확인하느라 찍는 거지, 기념사진이 아니잖아.”

“그래도. 한 장만 더 찍어줬으면 좋았겠다 그런 거지, 뭐.”

“그럼 아까 말하지 그랬어?”

“······. 그건 왠지 좀 민망해서. 민폐 같기도 하고.”

“별거가 다 민폐다. 친구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해줄까. 안 친한 거 맞아, 둘이.”

준수의 말마따나 은설은 어쩐지 조금씩 점점 더 어색해져 가는 현준을 생각했다.

“수지가 그러는데 형석이 말로는 한미주 씨랑 다시 잘 되는 분위기 같대.”

은설이 초음파 사진을 휴대전화로 옮겨 담으며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로 준수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치? 내 말 맞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에 쾌감을 느꼈는지 준수가 홈런이 빵빵 터지는 자이언츠팀의 야구경기를 볼 때처럼 흥분을 했다.

“누가 보면 아들 장가 들이는 줄 알겠어요.”

“왜? 은설 씨는 섭섭해?”

“아니! 내가 섭섭할 게 뭐가 있어?”

“뭘, 얼굴에 섭섭한 티가 팍팍 나는구만. 괜찮아요. 나도 내 여자 동기들 시집갈 때 다 섭섭했어. 아, 이제 얘랑은 다 놀았구나. 뭐 이런 아쉬움이 있지.”

“각자 자기 가정 꾸리고 살면 싱글일 때처럼 그러기는 힘들지.”

은설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부쩍 우울해진 표정이 되어 준수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더 그렇겠지? 쌍둥이 태어나면 한 일 년은 외출도 잘 못 한대요. 친구, 동기, 동료 아무리 많아도 결국 내 옆자리 지켜주는 건 신랑뿐이겠지?”

“장모님, 장인어른, 울 엄마, 울아버지도 포함시켜요. 삐댈 수 있을 만큼 삐대보자.”

“그건 그거고.”

“수지 씨더러 맨날 놀러 오라고 그러자.”

“걔 코가 석자야, 지금.”

“내가 잘할게.”

“약속했어요, 지금. 준수 씨 입으로 직접.”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이 말 꺼내게 하려고 지금 일부러 그런 거죠?”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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