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분홍색 카디건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괜히 얘기했나. 16주 넘기고 안정기에 들어서면 주변에 알리는 거라던데.”

마치 금기를 어긴 것만 같아서, 은설은 수지에게 쌍둥이 임신 소식을 알린 것을 조금 후회했다.

하지만 고단한 난임의 과정을 함께 견뎌 준 수지에게까지 그렇게 늦은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잘 되든 잘못되든 결국 은설은 준수에게 기대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선 언제나 수지에게 의지하고 기댈 것이 분명했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섭섭하지. 암······. 잘 얘기한 거야.”

마음 한편에 웅크리고 있다가 문득문득 솟구쳐 오르는 불안감을 은설은 그렇게 누르고 또 눌렀다.




“어서 와. 어서 오세요.”

현준이 친근하게 은설과 준수를 맞았다.

웃는 얼굴의 현준과는 달리 은설과 준수의 표정에선 약간의 긴장이 보였다.

“오늘 심장소리 듣기로 한 날이지?”

현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은설에게 물었다.

“응.”

은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현준이 가벼운 목소리로 은설을 달랬다.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은설아.”

“의사 선생님 말 들어요, 은설 씨. 이 사람 어제 잠도 한숨 못 잤어요. 뭐가 그리 걱정이 되는지.”

준수가 현준의 말을 받아 한번 더 은설을 다그쳤다.

“얼른 초음파 볼게요. 그래야 이은설 산모가 걱정을 덜겠어요. 오늘은 아빠도 같이 들어가시죠. 엄마 위쪽으로 서 계시면 모니터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은설과 함께 초음파를 보게 된 준수는 신이 난 표정이 되었다.

“아기집이랑 난황은 사진으로만 봤는데, 오늘 드디어 라이브 방송으로 애들 만나겠어요.”

긴장된 표정으로 초음파를 볼 준비를 하고 있는 은설에게 준수가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이런저런 농을 던졌다.

“후······. 방송사고 안 나야 할 텐데.”

준수의 농담에도 은설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현준이 입장을 하고, 빠른 속도로 초음파진료를 시작했다.

“자, 엄마 아빠 집중해 주세요.”

슈쿠슈쿠슈쿠슈쿠-.

“들리죠?”

“네.”

“이게 1번 아가 심장소리.”

“어머!”

“허헉!”

슈욱슈욱슈욱슈욱-.

“자 이게 2번 아가 심장소리예요. 약간 다르죠? 그래도 정상이에요.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확인 끝!”

“흐윽-.”

두 개의 심장음을 모두 확인한 은설의 눈에서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한번 더 확인시켜 줄게. 아빠도 모니터 보세요.”

“네!”

준수가 눈물을 훔쳐내며 은설 몫까지 대답을 했다.

“자, 여기 반짝반짝거리는 거 보이죠? 이게 1번 아가 심장이 뛰는 모습이에요. 그리고오······. 여깄네. 요고는 2번 아가 심장이 반짝거리는 모습.”

“이뻐요. 너무 이뻐요오, 선생니임.”

시술실이 아닌데도 은설이 눈물과 콧물을 모두 짜내며 현준에게 존댓말을 했다.

현준도 은설의 기쁨에 장단을 맞췄다.

“네. 이쁜 것뿐만 아니라 심장 소리도 아주 좋아요. 엄마 걱정하지 말라고 애기들이 아주 우렁차게 들려줬어요.”




초음파진료를 마친 현준이 은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했다.

“모두 다 아주 지극히 정상적으로 임신이 진행되고 있어. 그러니 앞서 걱정하면서 괜한 스트레스받지 말고. 잘 먹고 잘 자고. 그것만 신경 쓰면서 일주일 잘 보내고 와.”

“응. 꼭 그럴게.”

“걱정 많은 쌍둥이 엄마 신경 써주느라 형님이 고생 좀 하시겠어요.”

느닷없이 듣게 된 ‘형’이라는 말에 준수가 쑥스럽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까요?”

현준이 웃는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준수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약간 당황해서. 2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님’은 빼요. 동서지간도 아니고 기껏해야 동네 형 뻘인데.”

“네, 형.”

현준과 준수가 호탕하게 웃음을 나누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온 은설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돌아가는 내내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아기들의 건강한 심장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무엇인 불만인 것인지 준수는 은설의 속을 알 수 없었다.

"현준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요. 알겠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준수가 쓰고 있는 안경만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은설에게 되물었다.

"왜?"

"내 친구잖아. 뺏기는 기분 들어서 싫어."

"헐. 지금 류현준이랑 나 사이를 질투하는 거야?"

준수가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장난스레 은설을 도발했다.

왠지 무안해진 은설은 준수의 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티를 내려 애를 썼다.

"질투는 무슨. 난임센터 끝나고 나면 어차피 류현준을 더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부부동반으로 중학교 동창모임 하면 만날 수도 있지."

"그런 모임은 없어요."

은설이 단호한 목소리로 '없음'을 강조했다.




"진짜 왜 그래?"

"뭐가요?"

"나보고는 친구 뺏기는 거 같다고 류현준이랑 친해지지 말라고 그러면서, 은설 씨는 또 류현준 안 볼 거라 그러고. 앞뒤가 잘 안 맞잖아."

"몰라요. 말을 하다 보면 꼬일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나도 이제 현준이 더 볼일 없으니까 준수 씨도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 없다고. 그냥 그런 뜻이야."

"수지 씨 남편이랑 류현준이랑 절친이라며. 잘도 안 만나지겠다."

"그럼 뭐 서우 돌잔치 때나 한번 보겠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냅둬, 이 사람아."

"뭘?"

"사람 인연이라는 게 뜻한 대로 만나고 끊어지는 게 아닌데, 쓸데없는 생각 하면서 스트레스받고 그러지 말라고요."

"류현준이 나 좋아하는 거 준수 씨도 눈치챘었잖아. 왜 이렇게 쿨해요?"

"류현준이 우리 애들 만들어주고 나한테 형이라고도 불렀잖아."

"근데?"

"그럼 끝난 거야, 이 사람아. 남자들 세계에선 그래."

"헐. 뭐래."

은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준수를 쳐다봤다.




준수가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이 입술을 들썩이더니 곧 결심이 선 듯 은설에게 말했다.

"그리고 은설 씨를 '좋아하는' 아니고 '좋아했던'으로 바꿔야 돼요."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가만 기다리고 있어 봐. 류현준 한테서도 곧 무슨 소식 들려올 테니."

"응?"

"느낌이 왔어. 그 자식, 뭐 있어."

"뭐가 있어? 뭐가 뭐야?"

"은설 씨가 질투할 거 같아서 더 말 안 할래요."

"내가 왜 쓸데없이 질투를 해요?"

"진짜 눈치 못 챘어?"

"아, 답답해. 나 눈치 별로 없는 거 알잖아. 그냥 말해 줘요오."

"그 방에 유일하게 분홍색이 섞여 있던 그 자궁모형 말고 분홍색이 하나 더 생겼어."

"분홍색? 뭐지?"

"우리 마누라, 어떻게 나보다 더 눈썰미가 없지?"

"울 애기들 심장소리 듣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어요. 다른 것도 눈에 들어왔다는 준수 씨가 더 신기해, 나는. 그치 애기들아?"

은설이 살짝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애기들아, 눈썰미랑 눈치는 엄마 닮지 말고 이 아빠를 닮거라."

"치. 그러기야? 애들한테까지?"

"좋은 거만 골라 닮으면 좋지 뭘 그래. 그 뭐시냐. 스웨터 말고 그거. 아, 류현준이 입은 카디건. 그게 분홍색이었어. "

"읭? 그랬어?"

"응. 그랬어. 보통의 남자라면 내 돈 주고 내 손으로 저얼~때 안 사는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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