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정확히 ‘둘 만의 일상은 얼어 죽을’이라고 그랬어요, 수지가.”
수지와의 통화 내용을 소소한 수다 삼아 전하면서, 은설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준수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힘들대? 친구야, TV 꺼.”
수지의 안부를 물으면서 준수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TV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은설이 비집고 들어온 쪽 팔을 오므려 은설을 따뜻이 감싸 안는 일에만 집중했다.
준수가 TV를 끄자 은설이 기다렸다는 듯 태교음악을 틀으려 했다.
“친구야, 태교음악 틀어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친구야, 태. 교. 음. 악. 검색해 줘.”
[대교방송으로 검색한 결과입니다.]
“아니. 친구야. 태! 교!”
은설의 목소리에 점점 돋구어진 성질이 묻어나기 시작하자 준수는 슬그머니 은설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 리모컨을 찾아들었다.
준수가 리모컨의 버튼을 몇 번 누르자 곧 은설이 찾던 태교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저거 점점 바보가 되어 가는 거 같아. 그냥 버리는 게 어때요?”
왠지 무안해진 은설이 인공지능 스피커의 성능을 나무라며 자리로 돌아온 준수의 품을 다시 파고들었다.
“우리 꺼 아니에요. 인터넷TV회사 꺼야. 못 버려. 더 좋은 거 나왔다는 얘기 들리면 바꿔 달라고 전화해 볼 게요. 아까 하던 수지 씨 얘기나 더 해줘요.”
“아, 맞다. 죽도록 힘들다든가 뭐 그런 얘긴 안 했어요. 그냥 7개월 후딱 간다고. 지금을 실컷 즐기라고 하던데? 애기들 나오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놀래.”
“그 말은 애들 나오면 은설 씨랑 데이트고 뭐고 다 끝이란 소린가?”
“아마도.”
“수지 씨 얘기니까 믿어야겠지?”
“응. 수지는 형석이와의 신혼이 딱 애기 태어나기 직전 몇 달뿐이었던 게 너무 아쉽대요.”
“그 집은 그렇겠다, 진짜.”
“애기 태어나고 나니, 10년 산 부부보다 더 부부 같아졌다고 그랬어요. 전에 딴 남자랑 10년 살아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대. 전남편은 그냥 오래 사귄 남자친구였대요.”
“헐.”
“그리고. 또 한 가지 알려줄 사실이 있댔는데 그게 뭐게?”
"뭔데?"
“인간의 삶은 아기가 없어도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거. 반드시 아기를 낳아야만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삶의 깊이는 자식을 키우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
“캬, 명언이네.”
“수지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서, 내 새끼 생겨서 좋다는 얘기 좀 해주면 안 되냐는 소리도 못 했어.”
“수지 씨가 쌓인 게 많았나 보구만.”
“그런가 봐. 형석이가 나 몰라라 하는 남편도 아닌 거 같던데. 수지가 난임클리닉을 몇 년씩 다녔던 사람이었다는 걸 누가 믿겠어?”
“상관없다더라고.”
“뭐가요?”
“회계팀 강 부장님하고 우연히 밥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도 우리처럼 시술받아서 딸하고 아들 낳았댔거든. 3년 터울로, 둘 다.”
“시험관을 두 번이나?”
“거긴 두 번 다 한방에 됐대. 그래서 자긴 로또 안 산다고 그랬어. 그때 자기 평생의 운을 다 썼다고.”
“말 되네. 진짜 운 좋네요, 그 부장님.”
“응. 근데 애 낳고 싶은 마음이랑 애 키우는 게 적성에 맞는 거랑은 다르대. 그래서 출산휴가 2달···그 시절엔 2달이었다더라, 참. 끝나자마자 자긴 집을 뛰쳐나왔다고 그랬어.”
“나도 그러려나······. 뭔가 좀 두려워요. 난 무슨 일이든 수지의 2배일 거 아니에요.”
“그건 낳아봐야 아는 거니 미리 고민하지 말아요. 수지 씨 말대로 지금을 즐겨요, 우리.”
준수가 폭신한 자신의 품 속으로 은설을 꼬옥 품어 안았다.
“미안해서 어쩌지?”
토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던 준수가 함께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을 미안해했다.
“괜찮아요. 초음파로 애기 잘 있나 확인하고 오는 게 다인데, 뭘.”
몇 주 째 아침 식사로 주고 있는 시리얼과 우유를 집에 있는 식기 중 가장 예쁘고 귀한 것에 담으며 은설이 말했다.
“그래도. 오늘이 졸업하는 날이잖아. 졸업식엔 꼭 참석을 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준수가 함께 병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을 꽤나 속상해했다.
“그러게요. 은사님이 좀 아쉬워는 하겠네. 준수형이 안 와서.”
“현준이한테 인사 잘 전해줘요. 형님이 무진장 고마워하고 있다고. 오늘 유종의 미를 거뒀어야 하는 건데.”
“직장 다니는 남편이 어떻게 매번 병원엘 다 따라와. 이만큼 같이 다녀준 것만도 대단해요. 그리고 유종의 미는 지금 안 거둬도 돼."
"왜?"
"앞으로 마누라 병원 따라다닐 날이 수두룩 하잖아요."
"아, 맞다. 그렇네. 연차 쓸 거 미리 좀 생각해 둬야겠다. 휴."
준수의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깨에 짊어질 것들이 많아진 준수에 대한 안쓰러움과 기왕이면 씩씩하고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은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럴 땐 그저 아무럴 것 없이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약이었다.
"시리얼 어때? 맛 괜찮아?”
“응. 그래놀라 잔뜩 들어있어서 맛나네.”
준수가 허겁지겁 입 속으로 밀어 넣느라 턱 아래쪽의 식탁에 우유를 방울방울 떨구며 말했다.
“마트에 있는 거의 모든 종류를 다 사 먹어 본 거 같아. 미안해요. 몇 주 째 주는 거라곤 시리얼뿐이라.”
“이거라도 챙겨주는 게 어디야. 하루에도 열두 번씩은 토하는 마누란데.”
“열두 번 까지는 아니야. 다섯 번? 여섯 번?”
“입덧은 언제 괜찮아지는 거지?”
“길면 20주까지.”
“헐. 임신기간 절반이네.”
“응. 그리고 한 달 반짝 잘 먹고, 쌍둥이 임신이면 그다음엔 먹다가 위가 넘쳐서 또 토한다던데?”
“엥?”
“뱃속이 애기들로 가득 차서 음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대요. 조금씩 자주 먹는 수밖에 없대. 오히려 양껏 못 먹는다더라고.”
“헐. 마누라 입덧 끝나면 대게뷔페를 한번 데리고 가려고 그랬더니만.”
“뷔페는 시간제한 없는 곳으로 알아봐 줘요.”
“오키도키. 나 가요. 늦었어.”
준수가 반쯤 선 채로 남은 우유를 들이켜고는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응. 오늘 늦어요?”
서둘러 나서는 준수의 뒤를 총총이며 따라온 은설은 준수의 귀가시간을 물었다.
“가 봐야 확실히 아는데 일찍 올 가능성은 없지 싶어. 운 나쁘면 야근할 수도 있고. 왜?”
“그냥. 신랑이 대게 얘기를 해서 바지락 잔뜩 들어간 크림파스타가 먹고 싶어졌어. 아, 근데 야근이라니. 그것도 토요일에.”
“대신 내일은 꼭 집에 있을게.”
“섣부른 약속 금지. 준수 씨 뜻대로 되는 때가 아닌 거 아니까 섭섭은 안 해요. 신경 쓰지 말고 일 잘하고 와요.”
“움.”
“움.”
쪽.
함께 살았던 5년을 통틀어 가장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중인 준수와 은설이었다.
“이제 좀 사람처럼 보이지?”
현준이 웃으며 가리킨 화면에는 제법 갖춘 실루엣의 아기가 보였다.
“2번 아기는 꽤 활발해.”
“어! 움직인다!”
파르륵 하고 떨리는 아기의 몸짓을 보며 은설이 신기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질렀다.
진료 책상으로 돌아온 현준은 뿌듯함과 아쉬움을 숨기지 않으며 은설의 난임센터 졸업을 축하했다.
“이만하면 아주 튼튼한 아가들이야. 졸업 축하해, 은설아.”
“고마워. 정말 정말. 진심으로. 다 네 덕분이야.”
“아유, 덕분은. 겪을 수 있는 고생은 다 하고 나서 얻은 결과라 미안함이 더 크다, 나는.”
“그건 내 운명이려니.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어. 신의 뜻이 그러한 걸 어쩌겠어.”
“건강한 쌍둥이들의 엄마도 신의 뜻일 거야.”
“그렇게 믿을래.”
은설이 쭈뼛이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현준에게 작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작별 선물.”
“아······.”
작별 선물이라는 은설의 말이 현준으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난임센터를 졸업하였으므로 진료실에서의 만남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작별의 의미는 충분했지만, 어쩐지 은설의 의중은 그것만은 아닌 듯 느껴졌다.
지난겨울, 20년을 이어 온 첫사랑에 완전한 이별을 고한 이후, 어렵사리 이어져 온 은설과의 만남이 이제는 정말로 마무리되려 하고 있었다.
현준은 2년 전 은설과 재회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진료 책상에 앉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은설의 모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생했던 그 모습이 이제는 흐릿하고 아득하게 그려졌다.
지난 2년 간 자신을 휘몰아쳤던 한없는 기쁨과 설렘, 헛된 기대와 괜한 질투가 주마등 위의 풍경처럼 현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날, 오늘과 같은 작별을 떠올리진 않았었다.
하지만 어린 현준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은설이라면, 당연히 선택했을 결말.
현준은 순수했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인연의 마지막 장면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열어봐도 돼?"
"나 간 다음에. 조금 쑥스러워."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다. 마지막 선물."
"오래 간직해야 하는 선물은 아냐.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겨 줘. 이제 갈게."
은설이 한동안 보여준 적 없던 예의 그 차분함으로 마지막 인사를 장식했다.
‘현준의 말 대로 신의 가호가 아기들에게 있기를!’
병원 문을 나서며 은설은 현준이 했던 축복의 말들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렇기만 하다면 아기들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걱정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역시 축복이었던 현준과의 재회를 떠올렸다.
그날, 현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런 축복을 뱃속에 품고 저 문을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인 이곳.
현준이 아니었다면 믿음을 지속하기도 마음을 다잡고 버텨내기도 쉽지 않았을 시간들.
끊어지지 않고 버텨준 아주 오래된 인연의 끈이 지금의 모습으로 자신을 이끌었음을 은설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던 인연이었다.
정중하고 소중하게 기억하고 또 그렇게 이별하는 것이 고마운 그에 대한 예의였으므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그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은설은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따르르르.
"읭?"
생을 통틀어 몇 되지 않는 아련한 이별의 한 장면에 초를 치는 현준의 전화였다.
[왜?]
[이거 니가 만들었어?]
[어. 왜?]
[너무. 달아.]
[레시피대로 정량 지켜서 만든 거야!]
[내 입에 너무 단데...]
[이렇게 낭만을 모르는 캐릭터였어 너? 첫사랑의 추억을 달콤하게 간직하란 의미로 달게 만들었는데, 왜? 맘에 안 드나?]
[너무 많아. 같이 먹자. 어디야?]
[좀 전에 작별했는데. 너무 빨리 다시 만나는 거 아니니?]
[먹고는 싶은 거지? 니가 만들었으니 니 입맛엔 아주 잘 맞을 테니.]
[......]
[사거리 문벅스. 6시 반. 오케이?]
[늦지 마. 신랑 밥 주러 가야 해.]
"흠, 맛있어. 이게 달아?"
"달아. 너무."
"둬, 그럼. 내가 다 먹어치울 테니까."
은설이 둘 사이 가운데에 정확히 놓여 있는 초콜릿상자를 자기 쪽으로 잡아끌었다.
"안 먹는다고는 안 했어."
현준은 다시 상자의 반대편 끝을 당겨 은설의 독점을 방어했다.
"나눠 먹자."
빙긋 웃으며 양손에 초콜릿을 든 현준이 은설에게 하나를 건넸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지만 코끝에 스미는 달달한 초콜릿 향에 저도 모르게 한입을 크게 베어 물고는 은설도 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쓰디쓴 에스프레소와 함께,
상자에 든 초콜릿을 모두 나누어 먹고,
은설과 현준이 쿨하게 일어섰다.
"어?"
현준과 함께 건널목 파란불을 기다리던 은설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현준을 불렀다.
"애들이 움직인 거 같아!"
"그건 그냥 니 주관적인 느낌일 거야. 아직 12주잖아."
"아냐, 방금 뭐가 뱃속을 슥 하고 문질렀어. 이렇게."
은설이 새끼손가락을 아주 살짝만 대어 현준의 손등 위를 그었다.
"내가 태동에 대한 임상이 적어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대해선 잘 모르는 걸로 할게."
현준이 한 말의 뉘앙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은설이 제멋대로 내린 결론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어머! 나 첫 태동 느낀 건가 봐. 12주에 태동 느낀 가면 진짜 엄청 빠르긴 한 건데. 헉!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애들이 난리가 난 건가? 어머 어떡해!!"
은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아기를 품은 여염의 여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호들갑스레 부산을 떨었고, 현준은 그런 은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웃었다.
"이제 진짜 헤어지자."
웃음을 그대로 머금은 채로 은설이 말했다.
"그래."
대답하는 현준의 눈에도 촉촉한 미소가 있었다.
"안녕, 현준아."
"안녕. 은설아."
안녕, 달고도 쌉쌀했던 나의 첫사랑.
안녕.
이제
진짜
.
.
.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