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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두 번째 진료(3)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쑥대머리에 번들거리는 기름기 위로 덧발라져 뭉친 피부화장, 면봉으로 지우고 파우더로 덮어도 여전히 거뭇한 눈가.

“이러고 류현준 만나야 되는 거야?”

번진 화장을 솜씨 닿는 데까지 수정을 한다고 했지만, 손을 대면 댈수록 얼굴은 더 가관이 되었다.

'솜씨 없는 아낙이 만든 담요 같구먼.'

마지막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던 은설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누덕누덕 기운 퀼트 담요를 떠올렸다. 그러나 더는 방법이 없었다.

'소개팅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뭘.'

절반쯤 마음을 정리하고, 수업이 있는 교실로 올라가니 다행히 귀인이 앉아 있었다. 눈치를 살피며 전문가용 메이크업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학생이 은설의 시야에 들어왔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은설의 시선에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아이는 손을 재빠르게 놀리리 못했다. 메이크업 도구들은 딱 봐도 새것이었고, 자칫 잘못 떨어뜨려 흠이라도 날까 봐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은설은 부러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천천히 해.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어. 정리 끝나면 문학책 펴는 거 있지 말고."

"네."

풀메이크업을 하고 있던 아이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순했다.

"이쪽으로 진로를 정한 거야?"

"네."

"멋있다, 너."

딱 그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진도를 마치고, 5분쯤 남은 수업 시간을 아이들의 몫으로 돌려주었을 때 미래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슬그머니 은설에게로 다가왔다. 손에 몇 가지 몇 가지 도구를 들은 채로. 순하고 느린 목소리로 학생이 은설에게 물었다.

"선생님 오늘 중요한 약속 있으시죠?"

"그건 왜 물어?"

"화장이요. 원래 잘 안 하시잖아요."

"아아. 응. 근데 망해서 좀 속상해."

"제가 좀 수정해 드릴 수 있는데. 샘 괜찮으시면요."

"해주고, 샘 교과서에 싸인 하나 하고 가."

"왜요?"

"나중에 너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티브이에 나오게 되면 나 저 사람한테 메이크업받아봤다고 자랑하고 다니려고."

'피식'하고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아이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은설의 눈가에 면봉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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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마감 시간 직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은설은 마지막 차례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은설이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고, 몹시 반가운 듯한 눈빛을 장착한 현준이 은설에게 물었다.

“조퇴하고 오셨나 봐요?”

“네.”

개인적인 질문은 일절 않던 현준에게서 ‘조퇴’ 이야기가 나오자 담당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했고, 눈썰미 좋은 현준도 간호사의 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원래 아침에 진료 보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출근을······.”

“이은설 씨, 안쪽 진료실로.”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려 하는 은설의 말을 끊고 현준이 다짜고짜 안쪽 진료실로 은설을 밀어 넣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 진료실로 들어선 은설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안쪽 진료실까지 걸어오는 동안은 하던 말이 잘려버린 탓 때문이었지만, 진료용 치마를 들고 있는 지금은 밖에 있는 저 의사가 류현준이라는 사실이 은설의 얼굴을 굳게 했다.

‘한 번은 더 넘어야 할 산인 거 알고 시작했잖아, 이은설.’

굴욕의자 앞에서 은설을 기다리고 있는 간호사 때문에라도 오래 망설일 수가 없었다. 진료용 치마로 갈아입고, 굴욕의자 위로 올라앉으려는데 은설의 귀에 심장이 방망이질 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오늘, 긴장 많이 되시나 봐요. 좋은 얘기 들으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은설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간호사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간호사가 은설을 따뜻하게 위로했다. 전처럼 꼼꼼히 가림막을 설치하고 간호사가 현준을 불렀다.

“준비 됐습니다.”

현준이 진료실로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초음파 시작합니다.”

라는 말과 거의 동시에 현준이 진료를 시작했다.

“아악.”

“힘주시면 안 돼요. 그럼 아파요.”

“네. 아악.”

“힘주면 안 된다니까.”

당황한 은설이 급기야 거치대에서 종아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은설 씨!”

현준이 초음파기를 간호사에게 넘기고 은설의 무릎을 잡았다.

“이은설 씨, 릴랙스.”

“······.”

“릴랙스······. 자 여기 내가 손으로 누르는 데 있죠. 거기부터 힘을 빼봐요.”

현준이 은설의 무릎과 오금을 잡고 지그시 눌렀다.

“종아리 아래로 힘 빼고. 그렇지. 잘했어요. 그다음에 허벅지 근육 쪽도 힘 빼시고. 그다음에 엉덩이에 힘 빼고 의자 깊숙이 푹 앉는다는 생각 하면서. 네, 잘했어요. 이 상태 유지. 지금부터는 딴생각을 좀 해봐요. 저녁에 뭐 먹을까 뭐 그런 거······.”

많이 달래 본 솜씨였다.

현준이 능숙한 산부인과 의사임을 은설은 새삼 깨달았다. 초음파 기계가 다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3분 전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현준이 재빠르게 초음파 사진 서너 장을 찍고 진료를 마무리했다. 현준이 안쪽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 간호사가 가림막을 걷었다. 당황했던 기색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은설을 내려다보며 간호사가 달래는 말을 했다.

“에구, 많이 놀라셨나 보다. 원래 이게 그날그날 컨디션 따라 통증 정도가 달라요. 비슷한 분들 많으시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상냥하게 웃고 있는 간호사의 눈이 ‘그럴 수 있어, 괜찮아, 걱정 마.’라고 말하는 듯했다.

“네”

간호사의 위로가 고마웠지만, 은설은 더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이 온통 ‘창피’와 ‘쪽팔림’이란 단어로만 가득 차서 다른 말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은설이 현준의 진료 책상 앞에 앉았을 때, 현준은 은설에게 설명할 것들에 대해 이미 정리를 마친 듯했다.

“자, 여기 보세요. 난포가 두 개 보이죠. 하나는 지름이 2.4센티미터, 나머지 하나는 1.2 정도 되어 보이고. 1.2짜리는 도태될 거예요. 여기 2.4센티짜리 난포가 오늘에서 내일 사이에 터질 거고요. 그러니까, 오늘, 하고 이틀 뒤. 관계하시고 임신이면 임신 사실 인지하시는 대로 바로 병원 오시고, 아니면 생리 시작 후 12일 뒤에 다시 진료 오시면 됩니다.”

“네.”

현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하게 진료했다.

‘간호사가 있어서 그런가?’

그렇다 해도.

은설은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걱정 마’라는 위로를 간호사가 아닌 현준에게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엥? 내가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지?'

무심히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현준을 바라보며 은설은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그래, 병원 오는 길이 재밌었으니 그걸로 됐지.’

“나가 보셔도 돼요.”

현준이 숙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은설에게 말했다.

“아, 네. 진료 아직 안 끝난 줄 알고. 안녕히 계세요.”

당황한 은설이 현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간호사가 은설보다 먼저 진료실 문을 향해 걸었고, 뒤이어 은설도 돌아서려는데, 불쑥 현준의 손이 은설의 손을 잡았다.

‘응?’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던 현준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빼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진료실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은설도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손에 들린 작은 쪽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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