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사거리 문벅스 6시 30분]
오늘도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짜식, 센 척하기는! 내가 다른 약속 있으면 어쩌려고..”
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있지만, 생길 뻔했던 약속은 진즉에 다음 주로 미뤄둔 상태였다. 어쩌면 오늘도 현준과의 차 한잔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계산으로.
준수에게선 오늘도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다며 매일 늦게 들어와 미안하다는 연락이 왔다.
"안 미안해도 괜찮은데. 아! 아니구나!!"
현준이 내어 준 숙제가 있었다, 절대로 미뤄선 안 되는.
은설이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려 ‘꼭’을 강조하여 답신을 보냈다. 지금 당장의 설렘이 재미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많은 난임클리닉 의사 중에서 굳이 현준을 골라 택했던 이유까지 잊어선 안 될 일이었다.
“죽어라 야근하고 와서, 준수 씨는 또 숙제도 해야 하네.”
은설은 왠지 준수에게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방문이어선지 문벅스까지 오는 길이 꽤나 가깝게 느껴졌다. 지난번처럼 4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은설은 현준의 쪽지를 다시 한번 더 보았다. 20년 만에 보는 현준의 글씨였다. 많이 다듬어지고 어른스러워진 글씨체였지만, 세로 막대기를 세우고 반원을 그려 만든 ‘ㅁ’이라든가, ‘z’ 자 모양으로 휘갈겨 쓴 ‘ㄹ’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은설은 자신이 현준의 글씨모양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스레 놀랐다. 어릴 적 기억은 절대로 잊히지 않는 노래가사처럼 때론 지나칠 정도로 세세할 때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도 현준은 작은 쪽지를 지우개 밑에 붙여 남몰래 은설에게 주고는 했었다. [물 좀 주라] 같은 부탁이나, [이따가 도서관 갈래?] 같은 약속말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가끔은 뜬금없이 [메롱] 같은 둘만의 암호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은설이 손해 날 것은 없었다. 자신도 현준과의 만남을 무료한 일상의 양념처럼 여기려 했으니까, 현준이 은설의 의사를 묻지 않고 놀이상대로 삼았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현준의 추억놀이에 동참할 수 있음이 은설은 즐거웠다.
현준을 만날수록 은설은 마음이 조금씩 중1 때로 돌아가는 듯했다. 애틋하고 아쉬웠던 첫사랑으로서의 추억은 흐릿하다. 하지만 항상 함께 웃고, 놀고, 먹고, 공부하던 다정한 짝꿍으로서의 기억은 현준을 다시 만난 이후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마치 지금의 준수처럼 그때는 현준이 은설에게 그랬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었어?”
“어머, 언제 왔어?”
“지금. 방금 전에. 아직 의자에도 안 앉았잖아.”
“에구. 어서 앉아.”
은설이 앞에 두었던 트레이를 재빠르게 옆으로 치웠다.
“뭐 마실래? 오늘은 내가 사줄게.”
지갑을 주섬주섬 들고 일어서려는 은설을 현준이 도로 앉혔다.
“아니야. 배고파 나. 너 마시던 차만 다 마시고 밥 먹으러 가자. 아, 저녁은 남편하고 먹어야 하나?”
“아니야, 나······”
은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급하게 대답을 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뭐야, 이은설. 없어 보이게.’
어쨌든 뱉어 둔 말은 마무리를 해야 했다.
“남편은 오늘 야근이라 밥을 먹고 온댔어. 잘 됐다 나도 밥 혼자 먹어야 했는데. 먹고 들어가면 되겠네, 뭐. 나가자. 나 차 다 마셨어. 더 마시면 배불러서 밥 못 먹을 거 같아.”
‘별일 아닌 듯이 가볍게. 옛날돈가스나 한 접시 먹고 가잔 듯이. 오케이. 쿨한 말투 괜찮았어.’
현준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자. 내가 맛있는 것 살게.”
현준의 차는 문벅스가 있는 건물 지하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은설이 부담스럽다는 듯 한마디를 했다.
“근처에서 먹지, 이 근방도 다 번화가라 먹을 데 많은데.”
“맛있는 거 사준댔잖아. 오늘은 내가 아는 곳으로 가자. 이 근처 맛집은 다음에 니가 살 때 가.”
“다, 다음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현준이 재빠르게 먼저 나가 주차장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열었다.
“고마워.”
살짝 미소 지으며 현준에게 인사하면서 은설은 최근에 준수도 이렇게 문을 열어 준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난 뒤, 문은 그냥 짐을 덜 들고 있는 사람이 여는 것이 된 지 오래였다. 별것 아니어서 평소 의식조차 못 했었던 것이 새삼 섭섭한 마음이 들어, 은설은 웃음이 났다.
“중학교 때도 학교 밖에선 문은 항상 내가 열어줬는데, 생각 나?”
은설의 웃음에 현준이 가벼운 오해를 했다.
“아, 응.”
솔직할 필요가 없어 은설이 짧게 거짓말을 했다.
‘아마 그랬을 거야. 그때도 여자애들 사이에선 썩 매너가 좋은 남자애로 통했으니까.’
띠딕.
현준이 운전석 옆자리의 문을 열고 은설을 기다렸다.
“우와, 포르셰네. 너 진짜 성공했구나!”
호들갑스럽게 감탄을 해놓고 나니 은설은 살짝 민망했다.
“아, 차종이 반가워서. 우리 남편도 이 차를 좋아하거든. 자기도 나중에 이 차 살 거래.”
평범한 회사원인 준수와 의사인 현준을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절대로 그러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셰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은설은 ‘나의 남편도 나중에는 이 차를 살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준수를 감쌌다. 가시가 돋으려 하는 은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준수를 지켜야 했다.
은설의 이야기에 현준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 이야기를 해서 기분이 언짢았나? 기분이 팍 상한 표정은 아닌 거 같은데. 준수 씨는 못 산 차를 자기는 갖고 있어서 기분이 으쓱해진 건가? 아니, 유부녀가 남편 이야기 좀 할 수도 있는 건데 왜 내가 류현준 눈치를 살피는 거지?’
“안 타?”
“응? 아, 타야지.”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새로운 경험 앞에서 은설의 입이 호들갑을 멈추지 못했다.
“와, 좌석 두 개만 있는 차 나 처음 타 봐. 의자 되게 낮다. 여름엔 오픈카로 타고 다니고 그래?”
‘아, 없어 보여. 그만해라, 이은설.’
하고 생각은 했지만, 입이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다른 말을 하자. 다른 말... 다른 말...'
“배고프다. 우리 뭐 먹으러 가?”
은설은 갑작스레 요동치는 허기가 반가웠다.
현준도 맞장구치기 난감한 화제에서 빠져나온 것이 반가운 눈치였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현준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니가 좋아하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