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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현준의 스포츠카가 시원스레 워커힐 언덕길을 올랐다.

“우리 지금 호텔 가니?”

“왜? 내키지 않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모에(萌え)’는 역시나 가격이 몹시 비쌌다.

1인 가격이 준수가 성공하면 꼭 가고야 말겠노라며 몇 년째 벼르고 있는 동네 고급 일식집보다 정확히 20만 원이 더 비쌌다. 아니 부가세와 봉사료를 합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보태야 했다.

“너 생선 좋아했잖아. 그게 생각이 났어.”

“정확히는 우리 엄마가 볶아준 참치캔 반찬을 좋아했던 거였어.”

“아. 그렇네. 그럼 회는? 안 좋아해?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함께 밥을 먹었던 적이 중1 때라 우리가 회를 같이 먹어 본 적은 없었네.”

당황한 듯 목소리에 풀이 살짝 죽은 현준에게 은설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해. 좋아하는데, 이렇게 비싸고 좋은 재페니즈 레스토랑은 처음이라 설레고 긴장되고 그러네.”

은설은 그제야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앉아 있는 현준의 모습이 이 호텔 일식당과 같은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다정함은 좋아했던 예전 모습 그대로이지만, 포르셰를 몰고 고급스러운 호텔 레스토랑을 다니는 의사 류현준은 낯설고 어색했다.



“평소 다니던 곳보다 조금 더 맛있고. 조금 더 조용하고. 그게 다 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좀 멋져 보일 수 있는 곳에서 사주고 싶었어. 20년 만에 함께 먹는 저녁이잖아.”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현준의 얼굴 밑바탕 즈음에서 은설이 알고 있는 14살 수줍은 소년의 얼굴이 슬쩍 배어 나왔다.

아는 모습이었다. 은설도 현준을 따라 피식 웃었다.

"실은 나도 여기 몇 년 전에 한 번 와봤어. 인테리어가 좀 바뀌었나?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랑 좀 다르네."

이곳을 낯설어하는 은설 앞에서 현준도 어색함과 호기심을 감추지 않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은설이 더없이 솔직하고 털털한 톤으로 현준에게 말했다.

“다음에 나는 이렇게 좋은 건 못 사줘.”

“다음엔 나루중학교 앞으로 가자. 거기 ‘또와떡볶이’가 아직 있어.”

“정말? 근데 거기 가면 오늘 하고 너무 비교되잖아.”

“그럼 그다음에도 니가 사. 병원 근처에도 맛집 많다며. 난 그 동네 아직 적응 전이라 문벅스 말고는 아는 데가 없어.”

현준이 장난스레 계속 다음과 그다음을 말했다.

“오늘 이거 먹고, 먹은 거 다 갚으려면 병원 그만 다니게 될 때까지 내가 니 저녁밥 다 사야 하는 거 아냐? ”

“그걸 노리고 있는 거지. 너랑 계속 이렇게 밥 먹는 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현준의 말에 은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농담일 거야. 농담이겠지.’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척 은설도 맞불을 놓았다.

“앞으로 진료는 무조건 아침에 받아야겠다. 밥값 아끼려면.”

“정의롭던 이은설이 왜 이렇게 변했나? 나한테 밥 사기가 아까운 거야?”

“니가 떠 안긴 빚이 너무 커서 그러는 거잖아. 이렇게 비싼 일식······ 어멋! 플레이팅 너무 이쁘다.”



비싼 만큼 맛있는 음식들이 코스에 따라 연이어 나왔다.

가급적이면 호들갑스럽지 않으려 애쓰며 은설은 간만의 사치를 즐겼다.

조리장이 엄선한 계절 생선회가 나왔을 때는 준수 생각이 났다.

준수가 은설보다 훨씬 더 많이 회를 좋아했다.

“무슨 생각해?”

“응? 아니, 눈으로 좀 즐기고 있었어. 비싼 건데 이렇게도 먹고, 저렇게도 먹고 그래야지. 눈으로도 먹고, 코로도 먹고, 입으로도 먹고.”

“어릴 때 보다 더 발랄해진 거 같아, 이은설은.”

현준의 눈이 그립고 애틋한 것을 다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설은 현준의 눈동자 안에 그려져 있는 오래전 자신의 모습을 느꼈다. 은설조차도 낯설게 느끼는 과거의 소녀에게 붙잡혀 있는 듯 현준이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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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은 현준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며 애를 썼다.

“아줌마 거의 다 되어서 그런 거야. 넉살이 늘었어."

"내 눈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보여, 너."

"똑같긴. 그때 내가 얼마나 까칠했는데."

"별로 그랬던 것 같지 않은데."

"왜 그 도시락 반찬 빼앗아 먹던 메뚜기들. 그 애들하고 막 바락바락 싸우고 그랬잖아. 기억나지?"

"하하, 기억나. 니가 내 반찬 지켜줬잖아.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는데, 참."

현준이 감추고 싶은 흑역사가 드러나버린 사람처럼 무안한 얼굴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이었으면 그냥 그 애들한테 반찬 내어주고 말았을 거야. 대신 그 녀석들의 간식을 빼앗아 먹는 걸로 복수를 하는 거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혼내주는 건 똑같네. 방법이 좀 바뀌긴 했지만."

"사회생활 시작한 지 10년도 넘었잖아. 적당한 선을 찾은 거지. 결혼하고 나서는 가리는 것도 많이 없어진 거 같고.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 하고나 잘 놀고.”

“나도 아무인 건 아니지?”

현준의 질문에 은설은 심장 한쪽 끝이 뜨끔했다.

‘아무’가 아니었다. 현준은.




“너야 20년 전부터 ······. 우리 맨날 같이 붙어 다녔잖아. 생각 안 나?”

“왜 안 나겠어. 매일같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시간들인데. 근데 그때의 이은설이 지금 이은설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웠던 거 같아.”

“지금은 안 어른스러워?”

“아니, 뭐랄까. 예전엔 좀 차분한 면이 더 많았는데, 지금은 표현도 더 솔직하게 하는 것 같고, 엄살도 심한 거 같고. 아까도 진료 보면서······.”

“야, 진료 때 얘기는 하지 마. 창피하단 말이야.”

뾰로통한 말투로 투덜거리는 은설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미안. 실수.”

“아까는 정말로 아팠단 말이야. 첫 진료 때는 잘하더니, 오늘은 왜 그렇게 아프게 했어?”

“내가 아프게 한 게 아니라, 니가 불필요한 힘을 과하게 준······.”

“니가 아프게 하니까 힘을 준 거지.”

“이미 시작할 때부터 니가 힘을 주고 있었······.”

“아니라니까!”

“이런 클레임을 이은설한테서 듣게 될 줄이야.”

현준이 스트레스성 두통이 왔다는 듯 머리 한쪽을 짚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더러 너한테 꼭 진료 보라고 했을 때는 이런 상황도 감안을 했었어야지.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아까 니가 내 무릎 너무 꾹 눌러서 아직도 약간 욱신거린다고.”

“몇 년 만이야, 이런 클레임은. 보통은 내 진료에 대해서 아주 만족스러워한다고.”

“나도 첫날엔 그랬어.”

“너무 의식하지 마. 의사가 나라는 거.”

아주 잠깐 둘 사이에 침묵이 지나갔다.




“치, 누가 의식했다 그래?”

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은설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심리적인 영향이 가장 크다고. 당황하거나 긴장해서 진료받는 환자의 근육이 움츠려 들면 초음파검사 자체가 제대로 되기 힘들어. 억지로 하려다가 다칠 수도 있고. 뭐 드문 경우지만 말이야.”

“그건 알고 있지만. ‘당황’이 조절이 되면 그게 ‘당황’이 아니지, 휴.”

은설이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현준은 그런 은설의 모습이 귀여웠다. 자신보다 한참은 더 성숙하고 어른스러웠던 은설이 지금은 마냥 14살 소녀처럼 보였다.

이토록 귀여운 은설에게 오늘 밤 남편과 아기를 만들어보라는 숙제를 내주었던 것을 현준은 후회했다.


‘닷새 뒤쯤이라고 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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