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 지금이라도 해?(1)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10시가 넘었지만 은설과 준수의 집 거실 창가는 여전히 캄캄했다.

“괜히 조마조마했네.”

은설은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내려주겠단 현준을 애써 말려가며 단지 앞에서 헤어지면서도 혹시나 준수와 마주치진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해졌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을 때 보인 마루 풍경은 아침에 벌여 놓은 난장판 그대로였다. 은설은 준수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쯤 와?]

[아직 한참 일하는 중... 2시 안으로 집에 도착하는 게 목표임]

[오늘 숙제해야 하는 거 잊으면 안 돼]

[걱정 말고 먼저 자고 있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괴롭힐 거니깡~]

야근이 바쁘면서도 지루한 모양이었다.

준수의 답신이 제깍제깍 돌아왔다.

[힘내요. 으쌰으쌰 파이팅~!]



“힘내야지. 그래야 와서 숙제를 하지.”

준수가 집으로 돌아오려면 4시간이나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 은설이 그제야 소파 위에 몸을 널브러뜨렸다.

“걘 도대체 얼마를 쓴 거야, 오늘. 딸기주스 한잔에 3만 원이라니!”

아까 못 마신 차를 마셔야겠다며 현준은 호텔 라운지로 은설을 끌고 갔었다. 창문 프레임에 그림처럼 담긴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주스 두 잔과 케이크 두 조각을 먹는 값이 꽤나 비쌌다.

“아, 우리 집 한 달 식비를 하룻 저녁에 다 먹어치웠구나. 근사하네. 근사하고 좀 아깝네.”

은설은 퍼뜩 준수의 야식 생각이 났다. 야근을 마치고 2시에 집에 오면 뭐라도 좀 먹어야 준수가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면, 참치, 스팸······. 이런 몸에 안 좋은 비상식량 말고 뭐 맛난 거 없나? 장을 좀 봐 놓을 걸.”

거뭇해진 양배추, 노랗게 싹이 올라오고 있는 당근, 그래도 달걀은 엊그제 퇴근길에 사 온 것이라 신선했다. 지나치게 좋은 것을 먹고 온 후라 그런지 은설은 초라한 식재료뿐인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며 준수에게 조금 미안했다.

“맞다, 냉장고에 얼려둔 식빵이 있었던 거 같은데.”




새벽 2시.

은설은 설탕을 티스푼에 담아 올린 채 마지막 고민을 하고 있었다. 티스푼 아래에는 가늘게 채 썬 채소들을 잔뜩 넣고 부친 계란이 버터를 발라 구운 빵 위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준수가 좋아하는 길거리 토스트. 흉내내기는 했지만 설탕까지는 선뜻 뿌릴 수가 없었다.

“살찌는데.”

조금 망설이다가 은설은 결국 토스트 위에 노란 설탕을 흩뿌렸다.

“뭐, 야근하고 오면 피곤할 테니까.”

약속한 시간에 맞춰 토스트를 완성했지만, 정작 시간을 못박았던 준수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어디야?]

[언제 와?]

[전화 왜 안 받아?]

[약속 잊은 거야?]



준수는 결국 5시를 넘기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차갑게 식은 토스트와 캔콜라, 휴대전화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은설은 담요를 둘둘 말고 소파 위에 쪼그려 누워있었다.

“이제 들어오면 어떡해?”

살금 거리며 거실을 가로지르던 준수가 조용한 가운데 불쑥 들려온 은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안 잤어? 나 들어오는 소리에 깬 거야?”

“2시까진 들어온다더니 이게 무슨 짓이야. 숙제날짜 받은 날이라고 내가 분명히 얘기했잖아.”

은설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냉랭할 수밖에 없다는 이해는 했지만 준수도 목소리에 짜증을 실어 대꾸했다.

“놀다 들어온 거 아니잖아. 여태 야근하다 이제 겨우 집에 들어온 사람한테 너무 한 거 아냐?”

“최소한 연락은 했어야지. 메시지도 씹고, 전화도 안 받고선 어쩌라는 거야?”

은설의 말에 준수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야간방해금지모드 켜놨었어. 일 때문에 자꾸 개인폰번호로 전화 거는 인간이 많아서. 은설 씨 연락 안 받으려고 그런 건 아냐.”

“약속을 했잖아, 나랑. 그럼 최소한 나한테 2시에는 연락을 했어야 할 거 아냐.”

“솔직히 바빠서 그땐 까먹고 있었어 생각났을 땐 은설 씨 자고 있을 거 같아서 안 했고.”

“최소한 메시지는 남겼어야지!”

탁.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은설이 테이블 위의 토스트를 집어 준수 쪽 바닥에 메다꽂았다.

“뭐 하는 짓이야!”

“연락이 안 됐잖아!. 새벽에. 사무실인지, 차 안인지, 집에 오는 길인지, 오다 길바닥에 쓰러진 건 아닌지,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안 해도 될 걱정까지 하게 만들었잖아, 자기가!!”

울부짖는 은설의 목소리가 거실에 쩌렁하게 울렸다. 내 지르고 나선 제정신을 좀 차린 은설도, 전에 없던 불같은 화를 내는 은설을 처음으로 겪은 준수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직 새벽 5시였다. 앞집 현관 앞에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주인 할아버지가 곧바로 현관문을 열어 신문을 줍는 소리도 들려왔다.


19-1.png


“그만하자. 피곤해. 좀 자고 10시까지 다시 회사 나가봐야 돼.”

“준수 씨는 뭐가 더 중요해? 회사가 더 중요해, 아니면···”

은설은 더 말을 잊지 않았다. 구차했다. 회사일과 아기 만드는 일의 중요도를 저울질해보라며 따지려 들고 있는 자신이.

준수의 입에서 나올 대답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아기가 급한 것은 은설뿐이었다. 지금 당장 아기가 생긴다 해도 출산 즈음엔 노산, 그건 은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하나를 낳을지 둘을 낳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둘째를 낳는다면 최소한 마흔 전에는 마무리를 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엄마가 되어야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더 좋다는 주변의 말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준수는 급할 것이 없어 보였다. 아기를 만들기 위해서 난임클리닉을 다니겠다는 은설의 계획도 처음에는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자연스럽지 않은 임신에 반감이 있는 듯한 이야기도 흘리듯이 몇 번은 은설에게 말했지만, 실은 ‘내 집 마련이 되었든 사업이 되었든 자리를 좀 더 확실히 다잡은 후에 아기를 가져도 늦지 않다’는 것이 준수의 입장이었다.




은설은 준수가 난임클리닉에 다니겠다는 자신을 마지막으로 만류하던 날을 떠올렸다.

“꼭 그렇게 인위적인 방법까지 써가면서 아기를 만들어야겠어? 그리고 어차피 시술을 할 거라면 나중에 우리 집도 사고, 내가 사업 시작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다음에 하는 게 더 낫지 않아?”

“자기 인생 계획만 인생 계획이야? 나도 몇 살 즈음에 아기를 낳고, 몇 년 정도까지 내가 끼고 키우다가, 내가 몇 살이 될 때쯤에 다시 복직을 해야겠다는 인생 계획이 있다고.”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 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아기 키우는 일은 유예하고 싶은 자기 마음은 알겠어. 그렇지만 그게 언제 완료가 될지를 알고 마냥 기다리겠어. 아직 회사에 사직서를 내는 단계도 시작 안 했잖아.”

“사직서 내기 전에 아기 생기면 아예 못 내게 될까 봐 그러지.”

“그리고 말이야. 더 나이 들어도 몇 번이고 시술하면 끝내는 아기를 낳을 수야 있겠지만, 노산이 되면 아기한테도 아기 낳은 산모들 한테도 얼마나 위험요소가 많아지는 좀 찾아오고 그런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검색 나보다 잘하잖아, 자기가.”

“에이, 요즘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런 걸 걱정해. 우리 회사에도 와이프 마흔 넘어 둘째, 셋째 본 사람들 많아.”

“말했잖아. 낳을 수는 있다고. 그렇지만, 그런 위험부담을 왜 나보고 사서 감당하라고 하느냐고. 지금 아기를 만들면 충분히 건강한 상태에서 낳을 수 있는데. 나한테 너무 큰 희생을 바라는 거잖아, 그건.”

“······.”

할 말이 좀 더 있는 듯했지만 준수가 말을 아꼈다.

며칠 뒤 그렇게 원한다면 뜻한 대로 난임클리닉에 다녀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준수는 덜컥 애부터 낳아 버리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평생 능력 없는 부모로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 애초부터 열심히 아기를 만들어 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뭘 바라겠어.’

은설도 한두 시간은 잠을 자야 출근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들어 가.”

“지금이라도 해?”

“지금 뭘 해? 이런 분위기로 뭘 해? 준수 씨는 할 수 있어?”

“······.”

“쓸데없는 소리 말고 들어가 잠이나 자. 나도 자야 해.”

은설이 먼저 소파 위 담요더미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등을 돌린 채 소파 구석으로 얼굴을 파묻어버린 은설을 뒤로하고 준수도 방으로 들어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8.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