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라서 사춘기(四春期)입니다>
똑같다.
책상 앞에 앉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소위 말하는 '쓸데없는 짓'만 하다가 ' 그 짓마저도 지루해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책을 펴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똑같다.
학교 가는 아이들과 아이들보다 조금 더 느지막이 출근하는 남편을 모두 배웅하고, 넘치는 의욕을 눈으로 보여주겠다는 듯이 팔을 휘휘 휘두르며 기지개를 한껏 편 다음, 내 손은 유튜브 숏츠를 넘겼다.
이놈의 숏츠, 남는 것 하나 없이 내 시간만 앗아가지만 어쩐지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 집의 유일한 스마트폰 증독자는 다름 아닌 '나'다.
'스마트폰 중독'에 대하여 내 입에서 나올 변명 역시 요즘 여느 집 사춘기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배경이 좀 다를 뿐이랄까..
쌍둥이 독박육아를 하던 시절, 나에게 세상 소식을 물어다 주고, 기저귀와 분유 주문을 도와주고, '먹고 싶은 간식이 있으면 사라 네 것 하나쯤은 슬쩍 끼워 넣어도 괜찮다'며 초코빵이 든 장바구니를 슬쩍 모르는 척해주던 친구가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처절하게 힘들고 바쁘면서도 한편으론 무료하게 지나가는 일상을 함께 해주던 친구.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옹알이하고만 대화할 수 세상에서 내게 언제라도 어른의 말소리를 들려주던 친구...
'그래. 내가 너를 어떻게 끊겠니.'
하다가도 나쁜 친구와의 인연을 놓지 못해, 세상에 부적응하고 마는 자신을 하릴없이 방관하는 열다섯 살처럼 마음이 또 혼란스럽다.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한 사람이었나.'
하며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알고리즘을 타고 온 영상들이 나를 위로한다.
'완전하지 않은 사람의 완벽주의, 과도한 불안, 현실도피... 아.. 얘가 나를 이렇게 또 잘 알아주네.'
'이러니 숏츠를 끊을 수가 없지. 얘가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적절한 타이밍에 이렇게 나를 일깨우는데!'
그렇지만 쇼츠가 내게 준 가르침에 호응을 하고자 용기를 내본다.
고맙지만 미운, 그런데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그렇다고 마냥 가까이 둘 수만은 없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이제는 멀어져야 하는!
양아치 같은 내 친구 스마트폰을 가둬두기로!
스마트폰 감옥의 열쇠는 두 개다.
열쇠 하나는 쌍둥이 딸들이 보관을 한다. 엄마의 스마트폰 중독을 반드시 끊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코로나 종식 이후 할 잃을 잃은 마스크 걸이에 손바닥만 한 키링을 달아 걸어 놓고는 내가 만지는지 안 만지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한다.
다른 하나는 '엄마 서랍' 안에 있다. 아이들이 내 스마트폰을 감옥 안에 가둬 놓고는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온 적이 있었다. 이때 살면서 몇 번 겪어보지 않았던 수준의 분노가 치밀어 올라 스스로도 너무 놀란 이후로 내린 조치이다.
물론 아이들 눈치를 보느라 평소에는 두 번째 열쇠를 건드리지 않지만.
어른의 사춘기는 가끔 너무 위험하다. 가정 안에서 힘과 권력을 가진 내가 위력을 행사하고자 하면 아이들은 영락없이 당하고 말아야 한다. 과도하게 내는 화도, 지나치게 부리는 게으름도, 나락이 어디인 줄 모르고 떨어지는 기분도 아이들에게는 모두 폭력이 된다.
'그래, 이건 일종의 안전장치야.'
라며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를 꿍쳐두는 애연가처럼, 열쇠를 '엄마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스마트폰 감옥을 들인 이후 아이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처럼 느끼는 듯했다. 엄마의 스마트폰 사용을 완벽하게 차단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엄마 이제 스마트폰 감옥에 넣어야지요!' 하면 엄마가 순순히 스마트폰을 내어준다.
가끔씩 '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올 거다', '너희 친구 엄마들과 주말에 공원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는 중이다'하며 온갖 핑계를 대고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는 엄마가 영 꼴보기 싫은 기색이지만, 곧 찾아올 자신들의 사춘기(思春期)를 위해 과도한 노여움은 눌러 두는 것 같다. 앞으로 그때가 오면 엄마도 우리처럼 이렇게 하라는 듯이.
휴대폰 중독의 당사자인 내게 휴대폰 감옥은 '풍선 효과'의 주범이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이후부터 잠들 때까지, 아이들과 남편이 모두 집을 나선 이후 오전 내내...
나는 전보다 더 과도하게 스마트폰에 빠져든다.
'공부를 그렇게 했어 봐라, 서울대를 가지.'
를 패러디하여 나 스스로 나를 질타할 때까지.
'돈벌이를 이렇게 했어 봐라. 서울에 아파트를 사고도 남았지.'
가슴이 아리다. 자괴감이 나를 때린다. 그제야 스마트폰의 화면을 검게 만들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어도 잠시 잠깐 이렇게 정신이 들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과감히!
스마트폰을 끄고!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로는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잖아."
허공 중에 날리는 혼잣말이 헛소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쓴다.
이 글은 소리 없는 아우성!
휴대폰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40대에 찾아온 네 번째 혼돈을 앓고 있는 나의 아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