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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미주(1) -현준의 서사

by 이소정

“지금쯤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이겠군.”

어쩌면 사랑을 나누는 중일 수도 있었다.

현준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아기를 만들기 위해 이루어지는 재미없는 숙제이길 바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한테 진료를 받으라고 우기지 않았을 텐데.”

은설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에 내린 섣부른 결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남의 아내일 뿐인 서투른 시절의 첫사랑이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자신이 지정해 준 은설의 합방일을.

현준은 진하게 내린 커피를 들고 서재 창가에 붙어 섰다. 거대한 액자 프레임 같은 통창으로 한강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사이를 검게 지나고 있는 어둠의 흐름이 있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대교가 그 어둠을 향해 수십 개의 빛기둥을 드리우고 있었다.

현준은 그 빛기둥들이 은설처럼 느껴졌다.


띠링.

메시지도착을 알리는 음이었다. 짧은 기대를 하며 열어보았지만 은설은 아니었다.


[한국 도착. 연수 마치고 귀국했어요. 다다음주 월요일부터 병원 복귀. 그전에 한번 봐요.]


“미주······.”

6개월 만의 연락이었다.



이혼 후, 곧바로 병원을 그만둔 현준은 짧은 은둔기를 가진 뒤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왔던 지금의 병원으로 이직을 했다. 미주는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었다.

“부럽다. 병원 그만둘 수 있어서. 난 잠깐 도망가 있는 걸로 만족해야 할 듯 해.”

짐을 모두 정리하여 집을 나오던 날, 미주는 현준에게 ‘부럽다’는 말로 작별인사를 했다. 마치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를 꺼내어 창밖으로 날려 보내는 귀족아가씨처럼. 미주는 아버지의 병원을 물려받아야 했다. 병원을 그만두거나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지방 병원으로 발령을 내어 달라는 미주의 요청은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미주의 아버지는 휴가를 겸하여 짧은 연수를 긴 기간 다녀올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딸을 달래었다.



아마도 그 기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현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미주에게 전화했다.

“선배? 전화할 줄은 몰랐는데. 좀 놀랬어, 나 지금.”

“귀국했다니, 안부는 물어야 할 거 같아서.”

“아직도 의무감에 시달리나 봐. 이제 모시고 살던 부인도 아닌데 그러지 않아도 돼요. 기분이 썩 좋지도 않단 말이야. 숙제하듯 묻는 안부는.”

“잘 지내다 온 건지 궁금했어. 그래서 안부전화 한 거야.”

의무감까지는 아니었지만 현준은 전처럼 미주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쓰고 있는 것이 맞았다. 반면에 미주는 전처럼 현준의 진심을 집요하게 따져 묻지 않았다.

“그럭저럭. 적당히. 나쁘지도 좋지도 않고. 그냥. 이런 말들이 어울리게 지내다 왔어요. 이혼녀 꼬리표 단 기념으로 다녀온 건데 너무 잘 지내다 오는 건 어울리지 않지.”

미주가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간의 안부를 전했다. 현준은 미안한 마음만 앞설 뿐 미주에게 해줄 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먼저 이혼을 요구한 것이 현준이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옮긴 병원은 어때요?”

“괜찮아. 할 만 해.”

“다행이네. 여유 좀 있는 날 알려줘요. 내가 선배 병원 근처로 갈게요.”

“아, 아니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 근처에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어.”

현준은 은설을 떠올렸다. 병원 근처는 은설의 생활반경 안이었고, 미주와 함께 있는 모습은 우연찮게라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찮겠어요? 여기저기 알아보는 시선들 많을 텐데.”

“어딜 가든 그거야 같지.”

“하긴. 그건 그래요.”

“수요일.”

“좋아요. 그럼 한남동 오피스텔로 와줘요.”

“거기서 지내기로 했어?”

“응. 본가로 들어가긴 싫어서.”

“7시까지 데리러 갈게.”



통화를 마치고, 논문에 활용할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현준은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6개월 사이 많은 것을 정리한 듯 편안히 누그러진 미주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먼저 이혼을 요구했던 현준도 일상의 루틴을 회복하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이혼녀가 되어버린 미주가 겪었을 혼란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현준에게 이혼을 당해야 할 만큼 나쁜 여자가 아니었다.

미주는.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긴 생머리 여자.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홈피를 뒤져서, 끝내는 알아내고야 말았던 이름은 ‘은설’이 아닌 ‘미주’였다. 쌍꺼풀이 없어도 커다란 눈매를 가진 미주는 어릴 적 은설의 모습과 꽤나 많이 닮았었다. 두 학번 아래 같은 과 후배인데 왜 이제야 알게 된 것인지 현준은 의아했다. 하지만 은설이 아니었으므로 현준은 학교생활 중에 굳이 미주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미주와 제대로 된 교류가 시작된 것은 미주가 인턴으로 현준과 함께 잠시 일을 할 때였다. 몸이 녹아나듯 힘든 인턴생활 중에도 미주는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의국 여기저기에 손만 뻗으면 잡히는 인스턴트에는 일절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살이 잘 붙는 스타일이라서요. 몸이 무거워지면 견디기가 더 힘들어요.”

하며 현준이 건네는 컵라면을 단호히 거절했던 미주는 함께 근무하는 한 달이 끝나갈 무렵 딱 한번 현준의 과자를 받아 맛있게 오물거렸다. 현준과 꽤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미주는 첫인상과는 다른 털털한 말투로 실은 대학 1년 동안 무려 20kg이나 감량했단 이야길 했다.

“그래서 신입생 때 널 발견 못했던 거구나.”

“네?”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 마.”

현준의 요청과는 반대로 미주는 현준의 말을 내내 신경 썼다. 인턴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미주는 함께 과자 먹던 날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현준에게 ‘발견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무척 설레었다고 했다. 과를 옮겨가며 인턴생활을 하는 내내 미주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현준을 찾았다.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미주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현준도 미주를 애써 뿌리치지는 않았다. 미주를 만나면 마치 은설을 다시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런 의미에서 미주가 찾아오는 것이 현준 역시 반가웠다.



한동안은 이렇게 뒤늦게 친해진 선후배 사이로 현준과 미주는 서로를 챙겼다. 유대가 제법 끈끈해진 후에는 주변에서 ‘서로 사귀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부추기기도 했다. 집안에서 강권하여 결국 ‘심장내과’로 전공을 정했지만, 현준처럼 ‘산부인과’를 택하려 마지막까지 아버지와 실랑이를 했을 정도로 그 무렵의 미주는 현준을 무척이나 따랐다. 미주의 집안에서 현준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부터였다.



병원은 한창 확장 중이었고, 난임센터 운영도 그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의사이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세를 가진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아닌 현준은 구미에 당기는 사윗감이었다. 더구나 병원 이사장의 딸인 미주가 좋아한다 하니 미주의 집안에서는 더 고민할 것이 없었다. 미주의 레지던트 3년 차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까지 둘 사이에 별다른 진척이 없자, 미주의 집안에서 먼저 현준의 부모에게 사람을 보내었다. 정식으로 선자리를 마련하자는 요청이었고,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의 선이었으므로 현준의 부모는 대번에 의도를 알아차렸다.



“어쩌고 싶니? 솔직히 부모입장으로선 탐나는 자리긴 해. 우리 아들이 큰 병원 센터장이 된다는데.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엄마는 너를 소처럼 팔아넘기고 싶지는 않아.”

“선택은 전적으로 네 몫이다. 그 아이에 대해선 우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네가 선택하는 것이 옳다.”

“미주가 꽤나 괜찮은 사람인 건 맞아요. 하지만...”

“하지만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니?”

“그 애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부모와의 오랜 상의 끝에 현준은 미주 집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는 허상이나 다름없어진 은설을 찾는 일 때문에 찾아온 기회를 뿌리치겠다는 말을 차마 부모님에겐 할 수 없기도 했지만,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설을 많이 닮은 미주가 어쩌면 은설처럼 자신과 썩 잘 맞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현준의 결정에 한몫을 했다.

현준의 결심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집안에서 선을 보라던 남자가 현준이라는 사실을 알고 미주는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현준과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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