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소설
“늦게 사춘기가 왔던 거지. 좋아하는 오빠 따라 전공을 정하려 하다니. 이번에는 진짜 쉬려고 작정하며 떠난 건데 완전 망했어. 건성으로 들으려던 학회에서 연구주제 정하고 왔다니까요. 나 진짜 천생 심장내과 의사 맞는 거 같아.”
다녀온 학회 이야기를 하며 미주가 스테이크를 크게 한 입 썰어 물었다.
“그러게. 잘 지내다 온 거 같네.”
“아니라니까요. 적당히. 그럭저럭 지내다가 들어온 거라니까. 오! 여기 스테이크는 항상 맛있어.”
잘 지내다 온 것은 아니라면서도 미주의 목소리는 맑고 낭랑했다.
전처럼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미주의 노력이 눈에 보여 현준은 미주가 더욱 안쓰러웠다.
“새 직장은 어때요? 적응 잘했어요?”
“그럭저럭. 다들 친절해. 경계하는 사람도 없고. 아직까진. 근데 여기서도 별명은 빙봇이야.”
“엥? 정말?”
“바닥이 좁은 사회잖아.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들인데 소문이 난 거겠지. 신경은 안 써.”
“또 빙봇이라니. 아, 왜 웃음이 나려고 하지. 내가 이렇게 나쁜 사람이었나?”
미주가 너스레를 떨며 현준을 놀렸다.
진심으로 재밌어하는 미주의 표정을 보고 현준도 미안한 마음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별명 빼곤 일단은 다 만족해. 원장님이 좀 괴팍한 면이 있긴 하지만 뭐 아직은 괜찮아.”
“고집이 좀 남다르시죠. 그래도 수남아찌가 나쁜 분은 아니에요.”
“아찌?”
“몰랐어요? 거기 원장님이 아버지 어릴 적 친구분이에요.”
미주의 이야기에 현준의 미간이 수축했다. 대형 프랜차이즈병원의 이사장인 옛 장인의 인맥을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정말 많이 아까워하셨어요, 선배 능력. 사람은 미워해도 그 사람이 가진 의술은 미워하지 않는 게 아버지 철칙이니까.”
현준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려 했지만, 이내 들었던 포크를 다시 접시 위로 떨구었다. 현준의 반응에 다소 놀란 미주가 자세를 조금 더 바르게 고쳐 앉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혼 때문에 선배 손발 묶이는 거 원치 않으셨어요. 당장 개원은 힘들고 어디든 페이닥터로 들어갈 텐데 다들 우리 아버지 눈치 볼게 뻔하니까. 마침 진수남 원장님이 난임전문의 구하는 중이셨고, 그저 훌륭한 인재인 건 맞으니 본인 눈치 보지 말고 원한다면 스카우트하라고 한마디 하신 것뿐이에요.”
“어쩐지 지나치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했어. 좀 더 의심해 볼 걸 그랬네.”
“설마 당장 병원 그만두려는 건 아니죠?”
그럴 수는 없었다. 현준은 은설의 진료를 보아야 했다.
“그럴만한 위인은 못 되는 거 알잖아.”
병원을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현준의 말에 안심한 미주가 뾰루퉁히 대답했다.
“이혼도 했으면서 뭘.”
삐친 모습이 달랐다. 은설과 미주는.
은설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지만, 미주는 눈을 흘겼다. 은설과 닮은 면이 분명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주가 은설인 건 아니었다. 현준은 결혼식을 끝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을 미주에게 온전히 다 주기는 어렵다는 것을.
남편으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미주는 외로워했다. 자신을 품어 안은 현준의 손길에 온기가 없다는 것을 괴로워했고, 자신이 싸워 이겨야 하는 대상이 허상에 가까운 현준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알고는 분노하고 또 절망했다. 그리고 어서 빨리 현준이 과거가 아닌 현재로 돌아와 자신에게 온 마음을 쏟아주길 바랐다.
그러는 와중에 현준에 대한 처가의 기대는 날로 높아갔다. 장인은 술만 마시면 현준에게 향후 난임센터의 건립 시기와 발전 방향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불편한 기대들 속에서 현준은 더 버티기가 어려웠다. 신혼생활이 채 석 달을 채우기도 전에 현준은 공중보건의가 되어 집을 떠났다.
이후의 3년 2개월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어차피 보내야 할 기간이었기에 장인은 난임센터 개원 전 현준이 일찌감치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차라리 낫다며 복귀 후의 탄탄대로를 호언장담했다. 미주를 만나는 일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미주 역시 바쁜 레지던트 3, 4년 차를 보내었고 전문의 시험준비로 쉴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몇 달에 한 번 겨우 시간을 내어 현준을 만나러 올까 말까 한 바쁜 스케줄의 연속이었고, 현준은 시골 공중보건의로 무료한 날들을 보내다가 만나는 미주가 반가웠다. 그렇게 회복되어가는가 싶던 관계가 틀어진 것은 공중보건의 근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류교수 오늘 저녁시간 비워두게.”
“네, 아버님. 근데 무슨 일로···.”
“채병원 채진영 원장 하고, 하나제약 김전무, 온주대 박주상교수하고 식사자리 마련했네.”
“그런 자리에 제가 왜······.”
“이 사람, 비금도에 빼두고 온 넋을 아직도 안 챙겨 왔나 보구먼. 평생 난임센터만 맡고 말 거야? 미주 혼자 이사장 자리 어찌 감당하나?”
“네?”
“저 녀석 천생 의사라 평생 필드에서 뛸 생각인 모양이더구먼. 저 녀석이 못하면 자네라도 대신 맡아야 하지 않는가 말이야.”
현준도 예상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미주의 집안에서 한미하기 짝이 없는 의사집안의 아들을 두말 않고 사위 삼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미주의 대용’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려 하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건 아니다’라는 말이 솟구쳐 올라왔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현준의 마음에 불을 놓은 것은 미주였다.
결혼 4주년을 기념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미주는 뜬금없이 시험관시술 이야기를 꺼내었다.
“우리도 시험관 할까?”
“뭐?”
“시험관 시술.”
“무슨 뜻이야?”
“아버지가 손주 원하셔. 결혼한 지 만 4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아기 소식이 없냐시네.”
“그거랑 시험관이랑 무슨 상관인데? 난임도 아닌데 무슨···.”
“쌍둥이를 낳고 싶어. 외동은 외로워서 싫은데 한 명씩 낳으면 내가 너무 오랜 기간을 출산과 육아에 할애해야 하니까. 낳을 거라면, 기왕이면 한 번에 둘 이상을 만들 수 있는 시험관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현준의 생각과 감정이 극명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미주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현준의 머릿속에는 단 한 문장만이 못에 박힌 듯 떠오를 뿐이었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현준은 미주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기가 생긴다면 가시 돋친 동굴 같은 이곳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앞설 뿐이었다.
“같은 의사이면서 왜 그런 소릴 해. 시험관용 호르몬제가 얼마나 고용량인지 몰라서 그래? 자연임신이 가능한 상태에서 불필요하게 호르몬제를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엄중한 목소리로 미주를 다그쳤지만 현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한 가지 외침만이 맴을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