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그냥 이렇게 올라가도 되는 거예요?”
준수는 본가를 나서기 직전까지 동생과 말을 하지 않았다. 형이 왜 화가 났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시동생도 뾰루퉁해진 상태였다. 자신들의 임신 소식을 들은 후부터 축하의 말은커녕, 내내 부어있는 형에게 마음이 상해서 시동생은 더 이상 형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렇게 서울 올라가 버리면 또 몇 달은 있어야 내려와 볼 텐데. 그때까지 동생이랑 이렇게 부어 지낼 거예요? 많지도 않은 형제지간에 그러지 말지.”
“형제지간이 뭐가 대단한 거고. 지금도 일 년에 두세 번 보는 게 다인데. 살면서 몇 번이나 더 그 자식을 보겠어. 신경 쓰지 마요. 없는 셈 치고 살 거야.”
“뭐야. 내 탓하는 거 같잖아.”
“내가 언제? 그런 생각하지 마, 은설 씨. 아무도 은설 씨한테 뭐라 안 하는데 왜 혼자서만 쓸데없이 그런 생각을 해.”
“······.”
“피곤하다. 담부턴 이렇게 주말에 1박 2일로 내려왔다 올라가는 거 하지 말자. 명절에나 오면 되지, 뭐.”
“······.”
‘쓸데없는’이라는 말에 마음이 상한 은설은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준수는 내내 잠만 잤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은설이었다.
“잠깐만. 나 화장실 좀.”
“왜? 배 아파?”
급한 내색이 역력한 은설에게 준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잠깐 엉덩이 좀 떼 봐요. 내 가방 손잡이 깔고 앉았어, 준수 씨가.”
“가방은 왜 가져가?”
“필요하니까 가져가지.”
계속되는 준수의 물음에 짜증이 난 은설이 앙칼진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제야 은설의 상황을 눈치챈 준수가 재빠르게 일어나 은설이 수월하게 기차간의 복도로 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켰다.
“뭐야. 아직 한참 남았는데. 왜 벌써 터지고 난리야.”
혹시나 착각이기를 바랐지만, 영락없는 생리였다. 이제 막 시작했는지 속옷에는 새빨간 핏방울이 두세 점 떨어져 있었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그런가? 참나, 기대도 안 했었으면서 뭘.”
물론 일말의 기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낱같은 희망도 희망은 희망이었고, 사실 지난 이틀간은 '혹시라도 모를 기적'을 간절히 바랐었다. 자격지심으로 괴로웠던 이틀을 보내고 난 후여서인지, 은설은 이번 달도 기어이 생리혈을 쏟아내고만 자신의 자궁이 미워지려 했다.
“XX······.”
아무도 엿듣지 않는 기차간의 화장실 안에서 은설은 나지막이 욕한 마디를 읊조렸다.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길을 나선 은설은 운전대를 꺾어 학교가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 진료받으신 지 얼마 안 되지 않으셨어요? 혹시 임신?”
은설을 알아본 간호사가 때에 맞지 않게 온 은설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진료 볼 일이 좀 있어서.”
간호사에겐 대충 얼버무리고 은설이 간호사보다 앞서, 쳐들어가듯 현준의 진료실 문을 열어젖혔다.
“선생님!”
갑작스러운 은설의 방문에 놀란 현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은설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직 올 때 아니지 않나요?”
“선생님. 난임검사 해주세요.”
“네?”
“자연임신 시도 하는 거, 그거 몇 번이나 더 시켜보실 생각이신지 모르겠지만 건너뛰고 싶습니다, 선생님.”
“아직은 자연임신을 시도해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주세요!”
“······.”
“난임검사.”
너무도 단호한 은설의 요청을 현준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날렵하게 빠진 안경테를 고쳐 올리며 현준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럽시다. 합시다. 난임검사.”
현준이 책상 한편에 세워 둔 달력에 눈길을 두고 은설에게 말했다.
“무작정 할 수 있는 검사는 아니고······.”
“어제 시작했어요.”
‘어제’라는 말에 현준이 조금 의아하단 표정을 하며 은설을 캐물었다.
“어제라고요? 무슨 일 있었어요?”
“네?”
“스트레스 심하게 받은 일 있었냐고요.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일주일 가까이 주기가 틀어질 정도면 꽤 힘들었었단 얘긴데.”
“항상 있어요, 그런 일은.”
은설은 대답을 대충 얼버무렸다.
‘기범이가 사고 쳐서 신경 썼던 게 문제가 되었나? 아니면 동서 임신 때문에 준수 씨랑 난리부르스 한판 벌인 거. 그것 때문에 그런 건가?’
짧은 순간 깊게 빠져든 딴생각에 은설의 동공이 순식간에 멍청히 풀렸다.
똑똑.
“이은설 씨”
현준이 책상을 살짝 두드려 은설을 깨웠다.
“네?”
“피검사해야 한다고요.”
“아, 피검사요.”
“온 김에 뽑고 가세요. 마침 둘째 날이라니까.”
“둘째 날이라서 온 거예요.”
“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환자 별로 없죠.”
“피 뽑고 다시 와야 하나요?”
“아뇨. 간호사 하고 나팔관조영술 일정 잡고 가시면 돼요. 출근해야죠.”
“아. 네.”
현준의 말마따나 시간이 지각을 면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임박한 상태였다.
“그리고 남편도 데리고 오세요.”
“아, 남편은······”
“남편은, 뭐요?”
“나중에 받아도 될까요?”
“난임시술받는 거에 대해서 남편하고 합의가 안 된 거예요?”
“아, 네. 뭐, 아직. 조금 덜······.”
현준의 표정이 의사답게 굳었다.
“그럼 일단은 이은설 씨부터 난임검사 진행하도록 하죠. 검사 결과 나오기 전까지 남편 설득 마쳐서 병원 데리고 오세요. 알고 있겠지만 전체 난임 중 40%는 남성 쪽에 원인이 있는 경우예요. 은설 씨 남편에게 원인이 있는 거면 이렇게 혼자 백 날 진료받아봐야 아무 소용없다고요.”
“알고 있어요, 그건.”
좀 전의 흥분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은설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서울에 올라온 뒤 뒤늦게 끓어오른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현준의 진료실로 쳐들어온 것을 은설은 후회했다.
진료실을 나오는 은설의 어깨가 들어갈 때보다 한 뼘은 더 늘어져 있었다.
‘아, 준수 씨한테 어떻게 말하지?'
난임검사를 서둘러 받으면 그만큼 남편에게 현준을 소개해야 하는 순간도 당겨지게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교에선 준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일해야 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공문 이외의 모든 일을 미뤄놓고도 은설은 종종걸음을 쳤다. 열흘 뒤 나팔관 조영술을 받기 위해 연가를 하루 쓰기로 했고, 그날 5시간의 수업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교사별 전체시간표를 공강시간 내내 뜯어보아야만 했다.
“은설샘,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되게 피로해 보여요. 이것 좀 드시고 쉬면서 하세요.”
옆자리 행정실무사가 책상에 코를 박고 있는 은설에게 과자 한 봉을 내밀었다. 은설은 반가운 얼굴로 과자봉지를 받았다. 받자마자 비닐을 주욱 뜯어 한입 가득 과자를 밀어 넣으면서 은설이 웅얼거렸다.
“일 하는 게 아니라 실은······.”
말똥거리는 눈으로 은설을 바라보고 있는 실무사는 이제 겨우 20대 중반인 아가씨였다. 그녀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으려다가 은설은 그냥 말을 삼켰다. 난임검사이니, 나팔관조영술 따위에 대해 아직은 알 필요가 없는 나이였다.
“10일 후에 하루 연가를 써야 해서 시간표 바꾸느라 그래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냥 검사 좀 받아야 해서.”
“아, 혹시 난임병원?”
“맞아요.”
“힘내세요, 샘.”
행정실무사의 ‘힘내세요’라는 말에는 근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교무실에 오며 가며 친해진 고3에게 초콜릿 하나를 건네며 ‘수능 잘 봐’라고 할 때도 지금과 비슷한 톤의 목소리였다고 은설은 생각했다. ‘난임’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별로 관심도 없는 그녀의 가벼운 위로가 은설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깃털처럼 가벼운 위로 때문인지 지금 자신이 머리가 터질 듯 이고 지고 있는 근심과 고민들이 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잠시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