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정색하는 은설의 태도에 준수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은설 씨가 폭주할 차례인 건가. 그러지 마요. 나도 참았잖아.”
“그게 참은 거라고?”
“90% 이상 참았지. 참느라 내 머리통이 터져버릴 뻔했지.”
은설은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준수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은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준수의 이성이 확실히 돌아온 상태인 것을 확인한 은설은 그와 나란히 누워 아까의 상황을 찬찬히 복기했다.
“준수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물어봐도 돼?”
“뭔데···?”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난 거야? 아까 나보다 더 많이 화를 냈잖아. 나는 마인드컨트롤이 안 될 만큼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은설 씨는 화가 별로 안 났어?”
“안 났다기보다, 화의 화살이 어머니나 동서보다는 나한테로 더 많이 꽂히더라고요."
"왜?"
"굳이 안 봐도 될 눈치를 봐서 나를 심통 많은 석녀로 만든 어머니나 동서도 미웠지만,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게 결국은 내가 뜻대로 임신을 하지 못해서라는 생각이 드니까.”
“쓸데없는 자책을 하고 그래, 왜······.”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어. 준수 씨도 결국 내 입장을 완전히 이해는 못하는 거야, 지금. "
"······."
"근데 사실 나도 준수 씨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정말 어머니 말씀처럼 동생이 먼저 애기 생겨서 그런 거야? 이쪽 지역이 순서 지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단 얘기는 들어본 것 같지만."
"왜 나를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취급을 하고 그래요."
"미안요."
"19세기도 아니고 설마 내가 그것 때문에 그랬겠어?”
"그치? 그건 아니지?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준수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근데 말이에요. 설사 동생이 뭔가 잘못을 한 거라 해도 준수 씨가 형이니까 좀 이해해 주고 좋은 말로 잘 얘기하면 되는 거였잖아. 그렇게 노발대발하지 않고 말이야.”
“누가 들으면 내가 영수 귓방망이라도 한대 날린 줄 알겠네."
"동생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화가 났던 거예요?"
“사실 지난달에 동생하고 얘기를 했어. 동생이 아기는 미루지 않고 바로 가질 거라 그러더라고. 나는 은설 씨가 병원도 다니면서 노력 중이라는 얘기 했고. 그 새끼, 우리 이런 사정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한테 지네 애기 생겼단 얘기를 안 했잖아.”
“아······.”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았어야지. 그래야 내가 은설 씨한테 미리 얘기해 주고, 마음도 다독여주고, 응? 은설 씨도 마음 추스를 시간 갖고. 그러고 왔었어야 하는 거잖아. 그게 맞는 거잖아.”
은설은 그제야 준수의 화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은설 씨는 엄마랑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제수씨는 방에서 낮잠 자고 있고. 아버지는 깨우지 말라하고. 그런 황당한 상황으로 은설 씨가 영수네 아기 생긴 거 알아채게 만든 게, 그게 화가 났어. 그 새끼가 나를 무시해서 내 마누라가 그런 상황을 겪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나 미칠 거 같았어.”
“미안해서 말 못 했다잖아.”
“미안하면 더 미리 말을 했었어야지.”
“도련님이 아직 어른스러운 처신에 서툴러서 그랬겠지.”
“은설 씨랑 동갑이야. 그 새끼.”
“알아. 남자라서 그렇겠지.”
“대신 변명해 주고 그러지 마. 고마워하지도 않는데.”
“······. 듣고 보니 밉네. 준수 씨 화낼 만 해.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는 화내고 그러지 마요. 우리 어차피 내일 올라갈 건데. 마음 편하게 올라가고 싶어. 참으라고만 해서 미안해.”
준수가 몸을 반바퀴 굴려 은설을 끌어안았다.
“나한테까지 미안하다 소리를 하게 해서 내가 더 미안해요.”
마음이 여린 준수가 결국은 또 눈물을 훌쩍였다. 은설도 준수의 등에 팔을 감고 그를 도닥였다. 한편으론 모든 상황의 원인은 자신이 임신을 제 때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책이 더 깊게 은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울지 마요. 좀 있으면 숙부님네도 오시고 고모님네도 오신다는데 눈 팅팅 부어서 어른들 맞으면 어떡해.”
위로의 의미가 더 큰 은설의 채근에 준수는 더 깊이 은설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나 이제 나가봐야 돼. 제사상 차릴 시간이야.”
“얼마나 쉬었다고.”
“원래 쉴 수 있는 여유가 한 삼십 분 정도밖에 없었어. 어머니는 벌써 나오신 거 같은데?”
방문 밖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고, 행님. 오랜만입니다.”
“오빠야, 내도 왔데이.”
“우째 같이 들어오노?”
“주차장에서 만났다.”
제사나 명절이 아니면 만날 일이 잘 없는 터라 그런지 현관에서부터 인사가 요란벅적했다.
“벌써 다 차린 겁니꺼?”
9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왔으면서도 숙모는 진즉에 일을 마친 시어머니가의 손이 너무 빨라서 자신이 늘 죄인이 된다며 시답잖은 타박을 해댔다. 으레 그래왔는지 시어머니는 숙모의 말을 그냥 웃어넘겼다.
“그래도 마, 이제 메느리가 둘이나 있으니 든든하겠십니더”
숙모는 자연스럽게 자기 몫의 짐을 조카며느리들에게 넘겼다. 양복으로 갈아입느라 뒤늦게 거실로 나온 준수가 남자들 무리에 합류했고, 은설은 시어머니가 내어준 식혜를 잔뜩 쟁반에 담아 들고 부엌을 나왔다.
“느그는 좋은 소식 없나? 결혼한 지 몇 년 됐제? 와 아직 아 소식이 없노?”
눈치 없는 숙부가 식혜잔을 건네는 은설의 면전에 직격탄을 날렸다. 숙부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은설은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잘 참아왔던 분노와 울분이 하필이면 이 순간에 터져 나오려 했다.
‘참자. 참자. 참자······.’
눈물이 그렁해지려는 눈에 애써 힘을 주어서 은설은 기어이 눈물을 도로 밀어 넣었다. 대신 한껏 오버된 톤과 성량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좋은 소식은 이쪽에. 도련님네서 마련했어요. 어머 내가 선수 쳐서 말해버렸네. 미안요, 도련님.”
이야기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시동생과 동서에게로 넘어갔다.
“아이고. 축하한데이. 내가 다 고맙다.”
집안의 첫 아이 소식이어선지 고모가 동서의 손을 부여잡고 울먹이는 소리를 섞어가며 호들갑스럽게 축하를 전했다. 통이 큰 고모부는 그 자리에서 지갑을 뒤져 수표 몇 장을 꺼내 동서에게 건네었다.
“그럼 순서가 바뀐 거가?”
눈치 없는 숙부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숙모가 얼른 숙부의 옆구리를 찔러 주의를 주었다. 은설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빈 쟁반을 들고 도로 부엌으로 들어온 은설과 교차하여 시어머니가 과일 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이레 일찍 생길 줄은 몰랐다 안 카나. 미안해서 형님한테 말도 몬하고 그랬다 아이가.”
어른들의 타박을 들을까 염려한 듯 시어머니가 둘째 아들을 감쌌다. 머쓱해진 준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9시 지났네. 얼른 절 올리자, 마.”
준수의 심기를 눈치챈 시아버지가 제사를 채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