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은설은 부엌으로 가 저녁 반찬 이것저것을 꺼내어 덜어놓고 있는 시어머니에게 직접 묻는 방법을 택했다.
“아, 아니이, 미안해서 느그 아 안 들어서서 고생하고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서어.”
시어머니는 당황하면 말을 늘어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말끝에서 시어머니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진작 말씀해 주셨으면 아까 동서 들어올 때 바로 축하해 줬을 텐데요. 축하할 일에 마땅히 축하를 받아야지요. 왜 저한테 미안해해요, 어머니도 참. 하하.”
은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려 애썼다. 어머니는 은설의 심기를 살피려 애썼다. 마루에선 모든 상황을 지켜본 준수가 폭발하려는 화를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모두가 애쓰고 있는 상황이 은설을 비참하게 했다. 끝내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준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동생을 찾아 재꼈다.
“영수 좀 나와 봐라 그래라. 영수! “
한 대거리하려는 듯한 준수의 손을 은설이 달려가 잡아채어 방으로 끌었다.
“아, 놔 봐라. 쫌.”
“방에 들어가서 나랑 먼저 얘기해. 응?”
흥분한 준수를 가라앉히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는 은설의 뒤에서 시어머니가 군소리를 붙였다.
“미안해서 안 그러나. 형보다 먼저 아가 생겨가 미안해서 말을 못 하겠단다. 안 생길 줄 알았는데 실수로 생겼다 안카나.”
“아 누가 지금 영수가 먼저 아 가졌다고 이럽니까, 지금?”
“그럼 뭐고?”
“준수 씨! 들어가. 일단 들어가라고 방에!”
준수를 억지로 방에 밀어 넣자마자 은설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만 좀 해, 준수 씨.”
“아, 왜? 왜 말리는데? 영수 저 새끼가 지금 형을 우스운 꼴을 만들고······.”
“준수 씨는 지금 나 우스운 꼴 만들고 있잖아. 몰라?”
“내가 뭘!”
“동생네 임신했다는 얘기 듣고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건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준수 씨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는 줄 몰라서 그래? 준수 씨가 이러면 진짜 나 애하나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면서 남의 임신 배 아파 꼬장 부리는 병신꼴 되는 거라고. 몰라?”
“······.”
“그러니까, 제발! 그냥! 좀! 가만히 있으라고!”
분노에 가득 차 온몸을 바들거리면서도 은설은 목소리를 낮추고 새새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쳤다.
“나 병신 만들지 말라고. 진짜······.”
은설의 절규를 본 준수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어디에도 풀 데 없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뻑. 뻑. 뻑.
“뭐 하는 짓이야!”
머리통을 더 내리 치려는 준수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며 은설이 준수를 말렸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은설을 노려보다가 준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시댁 안.
준수의 방이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해가며 벌인 다툼은 각자 흘리는 눈물바람으로 짧고 굵게 끝이 났다. 은설은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히 제사를 마치기를 원했고, 준수는 은설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상황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폭풍 같은 분노가 지나고 난 뒤, 은설보다 한참을 더 방 안에 있다가 뒤늦게 거실로 나온 준수는 그제야 은설의 눈치를 살폈다. 은설은 태연히 어머니와 함께 저녁상을 마저 차리고, 별것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엄마도 방문 밖에 귀를 붙이고 서서 분명히 다 엿들었을 텐데.’
밖의 소란을 눈치챘는지 준수보다도 더 늦게 거실로 나온 동생과 제수씨는 멀뚱히 TV만 응시했고, 아버지는 더 읽을거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신문을 뒤적였다. 준수에겐 아무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준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노여운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모두가 불편해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준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좀 더 먹지.”
“먹을 만큼 먹으따.”
“그래도 좀 더 먹지. 잡채만 좀 더 먹어 봐라.”
“됐다, 마. 안 먹겠다는데 자꾸 그러지 마라. 아 귀찮구로.”
아들내미를 붙잡고 늘어지는 시어머니를 시아버지가 말렸다. 은설과 내내 둘이 하고 있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극하기’에 준수까지도 참여시키려던 어머니의 계획은 그 쯤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저녁 상을 물리고 제사상을 차리기 전까지 잠깐의 휴식시간이 찾아왔지만,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준수를 대신하여 은설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평소 보지 않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시아버지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문득 시어머니도, 시동생도, 동서도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모두 방으로 들어가고 자신만 남아 시아버지의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은설은 쓸쓸했다. 여기에 준수도 나와 있어야 했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저렇게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치고도 편히 쉬지 못하고 있는 은설을 대신하여 자기 아버지의 말상대가 되어 주는 것이 맞았다.
‘더구나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 날에는 나와서 나 좀 구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낀 은설이 결국은 스스로 용기를 냈다.
“아버님, 저 방에 들어가 잠깐만 좀 졸다가 나올게요.”
“니도 좀 쉬어라, 그래. 느그 아부지 혼자서도 잘 논다. 하하.”
“네 부장님. 어머! 네, 아버님! 아버님, 죄송해요. 학교에 아버님 하고 닮은 부장님이 계신데 그 부장님 하고 아버님 하고 많이 닮았다는 생각 하다가 그만 말실수했어요.”
아주 잠깐 휘둥그레한 눈을 떴던 시아버지가 곧 표정을 풀고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아따, 마. 우리 큰며느리 덕에 오래간만에 잠깐 직장 생활했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쉬라.”
사실 딱히 특정한 한 사람의 부장을 떠올렸던 것은 아니었다. 문득, 은설은 시아버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정년퇴임을 앞둔 나이 지긋한 부장님들을 대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어려운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마냥 편한 것도 아닌. 자꾸만 신경을 써드려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자아내는 사람. 은설의 마음 안에선 시아버지도 그 언저리에 있었다. 하지만 추슬러야 할 감정이 너무 많은 지금, 말동무 역할까지 신경 쓰며 시아버지를 수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시아버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온 은설이 준수의 옆에 대자로 뻗고 누웠다.
“그냥 들어와 쉬지. 뭐 하러 아버지가 하는 시답잖은 수다를 다 받아주고 와요.”
툴툴거리는 말투이긴 했지만 한층 풀어진 목소리였다.
“이제 좀 기분이 풀렸나 보네, 준수 씨.”
“아닌데.”
“아니어도 더 내색 말아요. 지금 내가 더 힘들어 아님 준수 씨가 더 힘들어?”
“어깨 주물러 줄까?”
“됐어. 것도 귀찮아.”
“그럼 등 비벼줘야겠다. 슥삭슥삭슥삭.”
“아이씨, 그러지 말라니까.”
목덜미 뒤로 들어오려는 준수의 손을 은설이 맵게 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