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살짝 구부정히 수그린 자세로 은설은 시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첫차 타고 가면 9시 반쯤 도착할 거예요. 어머님, 미리 다 해놓지 마시고요. 장은 내일 미리 봐두신다고요? 목요일인데요? 아, 그렇구나. 네. 그럼 장만 봐두세요, 어머니. 본격적인 일은 저랑 같이 해요. 그럼 토요일에 봬요.”
통화가 끊긴 소리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은설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후련하게 내려 충전기 위에 꼽았다.
“하, 참.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어머님 아버님하고 통화를 하면 꼭 손이 무슨 술잔 올리듯 공손해진단 말이야. 준수 씨도 우리 엄마 아빠하고 통화할 때 그래?”
“아니. 통화할 때 두 손을 쓰는 건 비효율적이잖아. 굳이 왜?”
“누가 일부러 두 손으로 받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지.”
“그래? 그럼 나는 버릇이 없는 사위인 걸로. 근데 우리 토요일에 연산동 가?”
“뭐야. 저번에 기차표 예약했던 거 생각 안 나? 돌아가시는 날까지 큰 손주만 무진장 이뻐하시던 할머니 제삿날이잖아. 어떻게 할머니 제삿날을 잊어, 큰 손주씨?”
“우리 할머니 제사구나, 참. 깜박했어. 약속 잡았음 큰일 날 뻔했군.”
“할머니 섭섭하시겠네.”
“저녁까지만 도착하면 되지, 왜 아침에 가? 일찍 가봐야 일만 할 텐데. 늦게 가자. 제사음식은 엄마가 다 해 놓겠지.”
“제사가 토요일인데 팽팽 놀다가 제사 지내기 직전에 가는 게 이 한국 사회에서 용인이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원래 제사음식은 엄마가 다 했으니까 그러는 거지. 엄마 혼자서 다 할 수 있어. 가뜩이나 요새 야근 많아 힘든데 좀 쉬자.”
“어차피 기차에서 자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자고 그럴 거면서. 아들내미 낳아봐야 소용없다더니.”
“절을 올리잖아. 아주 소용이 없는 건 아냐.”
“바꾸자.”
“뭘?”
“어머님이랑 내가 절하고, 아버님이랑 준수 씨가 제사음식 하는 걸로 말이야. 할머님 생전에 받았던 사랑에 비례하게 일도 더 많이 하는 게 옳지 않겠어?”
“하늘나라에서는 은설 씨를 더 이뻐하고 계실 거야.”
“말 더 하지 마. 미워질 거 같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뭐 그런 거야?”
“알면 합죽이를 하라고요. 이 사람아.”
“합.”
은설에게 더 혼이 나기 전에 준수는 입을 닫기로 했다. 준수의 눈에는 자신의 부모에게 은설이 느끼는 부담이 과해 보였다. 몇 년 만의 주말 제사이니 이번엔 제사 때맞춰 본가에 내려갔다 오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은설이었다. 준수는 자신이 장인과 장모를 불편해하지 않는 것처럼 은설도 시부모에게 그러하기를 바랐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때 은설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준수를 나무랐다.
“며느리가 딸도 아닌데 어떻게 그래. 딸처럼 해봐? 어머님, 아버님 아마 기함하실걸.”
“딸처럼 하면은 뭐, 왜?”
“준수 씨가 어머님, 아버님께 하는 행동을 내가 똑같이 한다고 생각해 봐.”
“아, 아들이나 딸이나 별로 안 다른가?”
준수는 누나나 여동생이 없었다.
“똑같진 않지만 크게 다를 것도 없어. 살갑게 말을 안 듣느냐, 무뚝뚝하게 말을 안 듣느냐 차이 정도?”
“나는 장모님이나 장인어른 별로 안 불편한데.”
“왜 그런 줄 알아? 우리 엄마 아빠가 준수 씨를 불편하게 생각해서 그래.”
“나를? 왜?”
“사위니까.”
“아들처럼 편하게 생각하셔도 되는데.”
“그럼 우리 엄마랑 아빠가 어머님, 아버님처럼 준수 씨 하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훈수 두셔도 괜찮겠어? 잔소리가 4배가 될 텐데 견딜 자신 있는 거야?”
준수는 대답 대신 의문을 던졌다.
“왜 나랑 우리 엄마, 아빠만 장인, 장모님과 은설 씨한테 불편한 존재인 거야?”
“나도 의문이야. 왜 그런 갑을관계가 뼛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처럼 나랑 우리 엄마, 아빠한테 체득되어 있는지.”
토요일 이른 아침, 거부할 수 없는 ‘을’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은설은 준수와 함께 준수의 연산동 본가에 들어섰다. 미리 장을 봐 둔 시어머니가 이미 절반 정도는 제사 음식을 해 둔 상태였다. 현관 중문 옆에 가방을 던져두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한 은설이 일거리가 잔뜩 벌여져 있는 식탁과 조리대를 보며 어머니에게 한소리를 했다.
“어머니, 벌써 이만큼이나 해두신 거예요? 놔뒀다가 저 오면 같이 하시죠.”
“으응~ 내내 일하고 주말 밖에 못 쉬는 아를 와 일부러 고생시키노. 제사라고 와 준 것만도 고맙데이. 엄마는 손이 빨라서 퍼뜩퍼뜩 금방 한다.”
은설의 시어머니는 ‘좋은 시어머니’가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본인이 고생스러운 시집살이를 겪어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은설은 ‘좋은 시어머니, 나쁜 시어머니, 요즘 시어머니, 막장 시어머니, 세련된 시어머니, 21세기형 시어머니’ 따위의 주제를 다루는 토크쇼들이 은연중에 시어머니의 마음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른바 ‘낀세대’의 완벽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아 은설은 시어머니가 조금 안쓰러웠다.
“나물은 아직 안 하셨죠? 다듬을 것들 주세요.”
“옷이나 갈아입고 해라. 급하게 안 그래도 된다.”
“어머. 네, 어머니. 그럼 저 옷만 얼른 갈아입고 올게요. 나물거리 다듬을 거 꺼내주세요. 품 많이 드는 단순노동은 제가 할게요. 어머니는 중요한 거 하셔요.”
제사 음식 재료를 다듬는 일은 점심을 먹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시아버지가 시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쯤 본가에 도착하는 지를 묻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결혼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된 시동생은 시집에서 15분 거리에 신혼집을 마련하여 살고 있었다.
“은제 온답니까?”
“즘심 묵고 셰 시쯤 온단다.”
“올 수는 있답니까?”
“즈그들이 알아서 하긋지.”
대화의 톤이 야릇했다. 은설은 자신이 아직 전해 듣지 못한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시동생과 동서는 4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왔다.이미 일이 거의 마무리된 부엌을 보고 동서가 미안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과일이나 먹고 좀 쉬라며 시어머니가 제사상에 올리지 않을 사과와 배 몇 개를 꺼내었고, 동서가 냉큼 받아 거실로 총총히 들고 갔다. 동서가 깎아놓은 사과 한쪽을 포크로 찍어 시아버지에게 건네며 은설이 물었다.
“아버님, 제사는 몇 시쯤 지내실 거예요?”
“너무 늦으면 피곤 타. 9시쯤 지낼 거다. 느그 숙부랑 고모도 그때쯤 오기로 했다.”
“그럼 일찌감치 저녁 먹고 제사 지낼 준비 하면 되겠어요, 어머니.”
“그래 마, 간단한 거 퍼뜩 먹고 쪼꼼 쉬다 하믄 된다.”
사과 몇 쪽을 먹은 것이 부대낀다며 시동생과 함께 방으로 들어간 동서는 6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부엌으로 나오질 않았다.
“야는 아직도 자는 거가?”
시아버지의 물음에 잡채를 볶던 은설이 냉큼 마루로 나갔다.
“동서 깨울까요, 아버님?”
“마, 그냥 둬라.”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시할머니 제삿날 이제 갓 결혼한 지 2달 째인 며느리가 제사음식 마련에서도 저녁식사 준비에서도 열외가 될 수 있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