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어머, 손님이 벌써 오셨네. 죄송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인상 좋고 친절한 약사가 양해를 구했다.
“아녜요. 제가 너무 일찍 왔는걸요.”
“출근 시간 괜찮으세요?”
“네, 아직 여유 있어요.”
은설도 웃으며 대답했다.
은설처럼 출근 전에 병원과 약국을 들르는 여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약사는 평소의 루틴인 듯 냉장고에서 비타민음료 한 병을 꺼내어 은설에게 건넸다.
“피곤하죠. 출근 전부터 병원 다니는 거 쉽지 않을 텐데. 고생이 많아요.”
너무 많이 봐온 모습일 터였다. 입에 베인 습관 같은 멘트였지만, 약사의 눈빛엔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어 보였다. 카드결제용 단말기가 켜지는 속도에 맞추는지, 약사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약을 찾고 복용법을 꼼꼼히 메모했다.
“배란유도제고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드시는 게 중요해요. 하루 한 번에 한 알이고요. 복용하시는 동안 구토나 오심 같은 부작용 있을 수 있고요, 부작용이 좀 심하다 싶으면 꼭 의사 선생님과 상의하시고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요.”
약사에겐 하루에도 수십 번은 입에 올릴 응원이었겠지만, 은설에겐 본격적인 난임치료가 시작된 이후 받는 첫 응원이었다. 오늘 처음 본 친절한 약사의 입버릇 같은 응원이었지만, 은설은 왠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준수 씨 일어나 봐요.”
“응? 아훅, 아직 깜깜한데."
준수가 휴대전화의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일어나요. 채취할 시간이에요.”
“아아흐윽. 내일 하면 안 돼요?”
게으르기 짝이 없게 들리는 준수의 기지개 켜는 소리에 은설이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나 호르몬제 복용 중이라 엄청 예민할 거 알아요, 몰라요? 평소 생리증후군 곱하기 10이라니까.”
‘적당한 오버’를 처방해 준 김 선생의 조언대로 은설은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주어가며 으름장을 놓았다. 속이 좀 불편한 느낌은 있었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기도 했다.
“내가 도와줄까?”
은설이 작전을 바꿔 잔뜩 교태를 섞은 목소리를 내며 준수의 아랫도리를 파고들었다. 은설의 간지럼에 깔깔거리며 몸을 비틀다가 준수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왠지 창피해. 그냥 나 혼자 방에서 할래.”
“마누라 두고 뭐 하러요.”
“아니야.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새벽부터 야동을 보도록 하겠어. 마누라에게 하는 복수예요.”
장난인 줄은 알았지만 ‘복수’라는 단어에 은설은 기분이 상했다.
“정액검사가 마누라한테 복수까지 해야 할 일이야?”
정색하는 은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준수가 한 번 더 도발을 했다.
“베에.”
애처럼 메롱을 날리며 준수가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쫓아가 한마디 하려던 은설이 멈춰 섰다.
"에이, 그냥 두자. 창피하다는데."
이런 것 저런 것을 떠나서, 지금은 준수의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순간이었다.
은설이 따뜻하게 차를 한 잔 내려 마시는 동안 컴퓨터 방에서는 음탕한 소리가 살짝살짝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은설은 컴퓨터방 문고리를 살짝 돌렸다.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준수 씨이이.”
화면에 열중인 준수는 대꾸가 없었다.
“나 들어가도 돼?”
여전히 없는 대꾸를 대답으로 여기고 은설이 준수에게 다가가 책상에 놓인 채취용 컵을 들었다.
“마누라 두고 혼자 하느니 그냥 병원에서 하지. 줘봐요. 내가 도와 줄게요.”
은설이 방으로 들어가고 5분 후. 둘 사이에는 어색하고 난감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젠장."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준수의 정액량이 간호사가 그어 놓은 눈금에 도달하지 못했다. 준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분위기가 엄청 중요한 거라니까. 은설 씨도 알지? 나 평소엔 안 이런 거.”
“······.”
“내가 혈압도 이렇잖아. 평소에 혼자 젤 때는 괜찮은데 의사 앞에만 가면 고혈압 나오고.”
“······.”
은설은 준수에게 할 말을 생각해 내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위로를 해야 할지 합리적으로 들릴만 한 설명을 무어라도 지어서 해줘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검사용이니까 원래보다 좀 많이 넉넉하게 최대한 나올 수 있는 정도를 표시해 준 거겠지. 피검사도 그렇잖아요. 검사 자세히 할 때 막 4 통도 뽑고 5 통도 뽑고 그러잖아.”
은설의 ‘피검사’ 타령에 준수가 조금씩 진정이 되어갔다.
출근 전, 채취용 컵을 접수데스크 간호사에게 무사히 전달한 은설의 표정이 의기양양했다. 은설은 마치 중차대한 프로젝트를 마친 듯한 기분이었다. 간호사가 은설의 표정 따위엔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결과를 전달받게 될 루트에 대해 설명했다.
“결과는 7일 안에 남편분께 전화로 전달될 거예요. 개인의료정보라서요. 아내분은 남편 통해 전달받으셔야 해요.”
“아! 그렇겠네요.”
매뉴얼대로 읊어주는 간호사의 설명에 수긍은 할 수 있었지만, 은설은 이것이 부부사이에 비밀로 할 일인가 싶어 왠지 섭섭했다. 한편으론 가십거리를 다루는 TV프로그램에서나 볼 법한 ‘동의 없이 전달된 의료정보 때문에 부부 사이에 난리가 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약 먹는 건 좀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지나는 길에 은설을 발견한 현준이 말을 걸어왔다.
“어머, 선생님!”
진료를 받지 않는 날인데도 현준을 볼 수 있어 은설은 반갑고 좋았다.
“아직은 괜찮은 거 같아요. 첫날 좀 울렁하고 오한이 들긴 했는데 다음 날부터 괜찮았어요.”
“그 정도면 뭐 양호하네요. 혹시라도 심한 부작용 의심되면 이야기하시고요.”
현준이 쿨하게 웃으며 진료실로 들어가자 간호사가 은설에게 속삭이듯 이야기를 했다.
“다른 환자분한텐 안 그런데 이은설 씨한테 유독 친절하시다니까요. 선생님들마다 애착 갖는 환자가 가끔씩 있긴 한데 그럼 환자분한테 되게 좋아요. 대부분 좋은 결과 있으시더라고요.”
간호사의 덕담에 은설이 멋쩍게 웃으며 모르는 척 화답을 했다.
“그러면야 저한테는 좋은 일이죠. 선생님한테 감사인사라도 드려야겠어요.”
인사처럼 주고받은 ‘부작용 나면 연락하라’는 말을 은설이 다시 진지하게 떠올린 건 이날 밤이었다.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시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준수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현준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은설은 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류현준 선생님?”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뭐, 심각한 건 아니고. 손가락이 40개로 보여서. 가로등 불빛이 포도송이처럼 여러 개로 보이고······.”
“어디야?”
“도로.”
“운전 중이야?”
“갓길에 정차했어.”
“위치 알려줘 내가 그리로 갈게.”
“아, 남편한테······.”
뚝.
“준수 씨한테 와 달라고 해도 되는데.”
은설에게 오려고 서두르는 중인지 은설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현준은 받지 않았다.
[남편더러 데리러 오라고 해도 돼.]
메시지도 읽지 않아 은설은 그냥 현준을 기다렸다.
“준수 씨는 바쁘니까······.”
운전석 등받이에 상체를 깊숙이 누이고 은설은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사방팔방으로 산란된 불빛들이 은설의 시야에 아름답게 들어왔다.
“이게 복시인가? 부작용이······. 되게······. 신기하고 예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