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공강인 거, 자기 시어머니한텐 비밀로 해줄게.”
“아유, 감사해라.”
맞은편에 앉은 김 선생이 건네는 농담을 은설이 유쾌하게 받아주었다.
“병원 다니는지 체크하시는구나?”
“체크까진 아니고. 마음이 좀 급해지셔서 궁금한 거 못 참으신 거죠, 뭐. 동서 임신했거든요.”
“에유. 안 봐도 비디오네. 내 그 맘 알지.”
은설보다 8살이 더 많은 김 선생도 첫째를 어렵게 가졌던 사람이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러다 애기 생겨서 낳고 나면 어느 순간 '나한테 그러던 시절이 있었나?' 싶게 까마득히 먼 일 되어있을 테니까.”
“그런 날이 저에게도 올까요?”
“올 수 있는 확률이 크지.”
수학선생스러운 답변이었다.
“병원은 또 언제 가?”
“내일 아침에 들렀다 오려고요.”
“배란유도제 받겠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왜 모르겠어. 병원 바꿔가며 장장 3년을 기를 써서 애를 만들었는데. 근데 둘째는 당연히 안 생길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지냈더니 생각지도 않게 들어서더라고.”
“진짜요?”
“응. 사람 몸이란 게 참 알 수가 없어. 누구는 첫째 잘 낳고 나서 둘째 안 생겨 고민하는데, 나는 완전 그 반대였다니까. 자기 원인불명이랬지?”
“네. 일단 저는요.”
“자기네도 신랑이가 검사 안 받겠대? 산부인과에서 받는 게 싫은 걸 수도 있어. 우린 첨에 신랑 꺼 받아다가 병원 가져가서 검사했는데.”
“정말요?”
“그런 방법도 있어. 한번 알아봐 봐.”
솔깃한 이야기였다. 은설은 공강 시간 내내 휴대전화를 붙잡고 한참이나 멘트를 고민한 끝에 현준과 준수에게 차례로 메시지를 보냈다.
[남편 난임검사 말이야. 혹시 집에서 채취해서 병원에 가져가 검사받아도 되니?]
현준에게서 짧은 답신이 돌아왔다.
[응.]
“뭐야. 그래도 되는 거면 진작 알려주지.”
[정액검사 말이에요. 집에서 채취해서 병원에 가져다줘도 된대요. 해볼래요?]
현준의 답신을 기다릴 때보다 훨씬 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은설의 난임검사 결과가 원인불명으로 밝혀진 이후 준수는 오히려 난임시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거 꼭 받아야 됨? 은설 씨 아무 문제없다며. 그럼 기다리면 언젠가는 생기겠지. 뭘 굳이 나까지. 이상 없다니 병원도 그만 다녀도 되는 거 아닌가?]
준수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은설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답신을 적는 은설의 손가락이 액정을 부술 듯이 휴대전화 화면을 찍어 눌렀다.
공강시간이 같은 김 선생이 은설 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책상 위로 빼어 은설이 쓰고 있는 메시지를 흘끔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남편한테 보내는 거였고만. 말 이쁘게 쓸 생각 말고 충격요법을 좀 써봐.”
은설이 메시지를 쓰다 말고 김 선생을 쳐다봤다.
“길게 쓸 거 없어. ‘니탓타령’ 짧게 써서 보내.”
김 선생의 조언에 의욕이 치솟은 은설이 써두었던 메시지를 모두 지우고 새로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럼 부모님껜 난 괜찮으니 당신 아들한테 문제가 좀 있는 거 같다고 얘기하겠음. 억울하면 정액검사받고 확실한 증거 만들어서 누명 벗으시던가]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준수에게서 예상보다 심플한 답신이 왔다.
[쳇. 억울해서라도 받고 만다]
"오, 선생님 짱! 니탓작전이 먹혔어요!!!"
은설의 환호와 탄성에 김 선생이 머릿발 끝을 한번 튕기며 장난스레 잘난 체를 해댔다.
"이게 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라니까."
은설이 한 손으론 연신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우며 재빠르게 [0K]를 눌렀다.
“선생니임. 첫 진료가 선생님 최애 환자 이은설 씨예요. 오늘 기분 좋게 시작하시겠어요”
정간호사가 악의 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했다. 뜨끔 한 현준은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환자가 다 똑같죠. 최애가 따로 있나. 진료 시작 합시다.”
은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들어섰다.
“선생님! 받는대요, 정액검사. 집에서 채취하면요.”
“합의가 됐나 보네요?”
“협박했어요. 나는 원인불명이니 이제 모두 당신 탓이라고. 억울하면 검사받고 오해를 풀라고요.”
“산부인과 검사에 거부감 있는 남편들은 대개 처음에 그렇게들 검사를 받아요. 잘했어요. 은설 씨는 이번부터 클로미핀을 먹어볼 거예요. 배란유도제.”
“아, 드디어···”
“약효가 발현되는 정도에 따라 한 알에서 세 알까지 처방할 수 있어요. 이번 달은 한 알. 약효를 적절하게 받으면 난포가 한 번에 3~4개 정도 자랄 거예요.”
“그럼 쌍둥이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드물지만 자연임신보다는 확률이 조금 높아요.”
“아아.”
은설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현준이 걱정을 담은 이야기를 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쌍둥이 별로 안 좋아해요. 산모부담이 너무 크거든요. 태아도 단태아보다는 환경적인 부담을 안고 자라는 거고요. 사람은 한 배에 한 명만 임신하는 게 정상인 거예요.”
“그런가요? 근데 기왕이면 한 방에 둘 낳고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현준은 수많은 난임여성들이 쌍둥이를 바라는 모습을 지켜봐 왔었다. 의학적 소견으로 보았을 때 쌍둥이를 바라는 모습이 어리석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쌍둥이를 바라는 미주와 은설의 모습에선 마음이 좀 아렸다.
“배란유도제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요. 개인 차가 크긴 하지만 평소 겪던 생리증후군이 더 심해질 수 있어요. 배란통을 심하게 겪는 경우도 있고, 구토나 어지럼증, 경우에 따라선 복시도 생길 수 있고.”
“부작용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해요?”
“담당의와 상의요.”
“아. 네.”
현준의 무미건조하고도 명료한 답변에, 은설은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본 것 같아 머쓱해졌다.
“5일 간 같은 시간에 복용하시고, 12일째 되는 날 진료 다시 받읍시다. 출근 잘하세요.”
은설이 진료실 밖을 나가자 정간호사가 현준에게 쐐기가 될만한 한마디를 뱉었다.
“선생님 지금 ‘출근 잘하세요’라고 인사도 하셨잖아요. 다른 환자한텐 안 그러신다니까요. 최애환자 맞아요. 호호.”
“아, 그······.”
현준은 무어라 변명을 하려다가 그 모습이 더 객쩍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간호사님, 이은설 씨 남편 정액검사 들어갈 거예요. 안내해 주세요.”
은설을 뒤따라 나오며 진료실 문을 닫으려는 담당간호사를 현준이 불러 무어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설이 뒤돌아 다시 진료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데, 간호하사 쏜살같이 튀어나와 은설의 팔을 잡아끌었다.
“수납 먼저 하시고 채취용 컵 받으시면 돼요.”
“아, 네.”
“이건 오늘 진료비고요 그리고 이건 정액검사비용이고요.”
은설의 수납이 진행되는 동안 간호사가 데스크 안쪽 간호사실에서 정액검사에 쓰일 채취용 컵을 들고 나왔다.
“금욕기간 2~3일 가지신 후에 채취해 주시면 되고요. 여기 선 있는 부분까지 받아오시는 게 좋아요.”
미세하게 보이는 눈금 위에 간호사가 유성펜으로 한번 더 금을 그었다.
“집에서 채취를 하시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오세요. 2시간 안에 병원에 전달이 되어야 해요.”
“네.”
정간호사가 시계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옆건물 약국들은 지금 문 열었을 거예요.”
간호사의 말 대로 옆 건물의 약국 두 곳이 이제 막 문을 열 채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