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택시인가?”
갓길에 세워진 은설의 차 앞으로 택시 한 대가 섰다. 급하게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현준이었다. 은설은 그제야 안전벨트를 풀고 도어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막 차문을 열려하는데 현준이 먼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인사도 없이, 현준은 다짜고짜 은설을 운전석에서 끌어내었다. 급한 손놀림으로 휴대전화의 플래시 켜고, 현준이 은설의 아랫눈꺼풀을 뒤집어가며 구석구석 살폈다.
“나 지금 길 한복판에서 진료받는 거니?”
“응."
"친구가 의사니까 길에서 공짜 진료도 받고. 좋네."
"밥 사. 나중에. 복시 말고 다른 증상은? 불편한 곳 없어?”
“그냥 어질어질한 거. 그거 말고는 없어. 엊그제처럼 울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은설의 이야기를 차분차분 듣던 현준이 혼잣말처럼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현준의 시선이 제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은설은 알 수 있었다.
“컨디션이 아주 나빠 보이진 않아. 어지럼증이나 울렁거림은 복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수 있어. 차에 타. 운전은 내가 할게. 위험해.”
단호한 현준의 지시에 은설이 순순히 따랐다.
“응.”
현준이 은설의 팔을 끌며 조수석 쪽으로 갔다.
딸깍.
“타.”
“땡큐.”
현준이 말없이 운전을 시작했다.
은설은 현준이 고마웠다. 한편으론 카리스마 넘치게 상황을 리드해 주고 있는 현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새롭고 어색하기도 했다. 어쩐지 그런 현준의 옆에 있는 것이 멋쩍어진 은설은 어지러워 안전벨트 위에 머리를 살짝 기댄 채이면서도 실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퇴근길에 누가 대신 운전해 주니 엄청 편하고 좋네. 근데 내 차 경차라서 운전할 때 좀 답답하겠다. 지금 일부러 안전 운전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면 액셀을 좀 더 세게 밟아야 차가 좀 더 앞으로 잘 나갈 거야.”
현준이 그제야 부릉거리며 차에 속도를 붙였다.
“내 차가 나랑 많이 비슷해. 푸시를 많이 해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생이야.”
농담처럼 던졌지만 은설의 서글픔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꼭 난임문제만이 아닐 것이었다. 현준은 자신이 보지 못한 채로 지났던 은설의 시간들이 있음을 떠올렸다. 아마도 쉬이 지나가진 않았을.
현준이 흘끔 고개를 돌려 은설을 바라보았다. 걱정과는 달리, 방금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은 사람처럼 은설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래도 위로를 하고 싶었지만, 은설의 서글픔을 덮어줄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앞으로 잘만 나가네, 뭐. 액셀 밟아야 앞으로 나가는 건 자동차가 다 똑같지.”
현준은 이제껏 공부를 하는 데에만 몰두하느라 누구를 위로하고 공감해 주는 데에는 젬병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자책했다. 퉁명스레 던지는 현준의 위로에 그래도 은설은 웃음이 났다.
“그건 그래. 맞아. 다 똑같다. 위로가 되네. 고마워, 현준아.”
은설이 배실배실 웃으며 현준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근데 의사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
“어떤 거?”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났는데 약 어떡해? 내일까지 먹는 건데. 그만 먹어야 하나?”
“마저 먹어.”
“응?”
“복시가 당황스러운 부작용이긴 하지만 치명적인 건 아니니까.”
“메스꺼움 같이 참아 넘길 부작용이구나, 이것도.”
“미안.”
“니가 왜?”
“그냥. 미안.”
“의사가 환자한테 이렇게 쉽게 미안하단 소리 해도 되는 거야?”
“······.”
“니가 이 약 만든 것도 아니면서, 뭘. 어느 의사한테 진료를 받아도 먹었을 약인데. 그래도 누가 그렇게 말해주니 덜 서글프다.”
은설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차창을 지나는 모든 것들의 잔상이 남아서 강물이 흐르듯 시야의 오른편으로 빠졌다. 여덟 개의 분신으로 나뉜 가로등 불빛들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보였다.
현준의 운전은 길지 않았다. 은설이 사는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며 현준이 은설에게 물었다.
“복시 상태로 얼마나 운전한 거야?”
“출발할 때만 해도 눈이 좀 침침한 느낌이었어. 넓은 도로 나오고 길이 좀 밝아지니까 복시현상이 확연하게 생기더라고. 거의 바로 차 세우고 너한테 연락해 본 거였어.”
주차까지 완료한 현준이 은설에게 키를 건네며 작별인사 겸 당부를 건넸다.
“증상 사라지기 전까지는 운전하지 마. 혹시 운전하지 않으면 출근 어려운 거야? 내일 데려다줄까?”
“아서라. 내일 아침 진료는 어쩌고? 너를 만나려고 첫새벽부터 병원으로 달려오는 여인네들이 얼마나 많은데. 걱정하지 마. 택시 타고 가면 돼. 오래 걸려서 그렇지 버스랑 지하철도 환승 힘들지 않고.”
“혹시라도 복통이 생기면 그땐 만사 제쳐두고 병원으로 오고. 알았지?”
“응. 알았어. 걱정 그만하고 이제 가 봐. 지금 가도 12시 넘겠다, 너. 좀 쉬어야 내일 아침 진료 볼 거 아니야.”
마지못해 돌아서는 사람처럼 현준이 몇 번쯤 뒤를 돌아 은설을 바라보았다. 은설은 현준의 그림자까지 아파트 단지 안을 빠져나가고서야 집으로 올라왔다.
거실에선 준수가 게임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집에 있었던 거야? 오늘 야근 안 했어?”
“응. 오래간만에.”
“에이 그럼 준수 씨한테 전화할 걸 그랬네.”
“왜? 뭔 일 있었어?”
“나 복시가 왔어요.”
“복시?”
“응. 나 먹는 배란유도제 부작용요. 손가락이 40개로 보이고 막 그랬어.”
“에이, 그럼······.”
은설의 표정이 굳었다.
“운전하는 중간에 시작됐어요.”
“뭐야, 근데 어떻게 왔어?”
“······. 그냥 그냥 대충 운전해서 왔어.”
준수의 입에선 원하던 말이 아닌 것이 계속 나왔다.
“위험하게. 하긴 차를 길바닥에 버리고 올 순 없지. 그 약 먹지 마요, 은설 씨. 문제없다면서 왜 먹어? 몸에 좋지도 않은 거 같구만.”
준수는 은설이 복용하는 배란유도제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은설은 준수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좀 전에 현준에게서 받았던 위로마저도 모두 달아나버릴 것만 같았다. 은설이 퉁명스럽게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준수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은설을 있는 힘껏 위로하기엔 준수의 마음도 못지않게 복잡하던 차였다.
“정액검사 결과는 5~7일 후에 준수 씨 전화로 전해준대요.”
라는 은설의 설명을 들은 후로, 준수는 무엇에도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오늘도 야근을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