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무정자증입니다.”
“내가 원인이었다니!”
은설은 매정한 편이 아니니 이런 제안을 할 수도 있었다.
부모님께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불임이랩니다.”
“내 아들이 그럴 리 읎따. 솔직히 말해봐라. 은설이 쟈가 니 탓으로 하자드나?”
“아이다. 내가 맞다.”
“자슥아, 속일 걸 속여라. 우리가 너를 모르나?”
“내 맞대도. 와 내 말을 안 믿노? 내라고! 내!”
“아이고, 진짠갑네. 이를 우야면 좋노.”
생각은 하면서도 부모님이 정말 이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애써 본인의 속을 달래느라 게임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차에 은설이 집에 와 부작용 이야기를 한 것이다. 멀쩡해 보이는 은설의 부작용 이야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외려 정액검사를 강행시킨 은설이 야속하고 미워 준수는 몇 번이고 속으로 외쳤다.
그렇다 하더라도 은설에게 약을 먹지 말라느니, 병원엔 왜 가느냐느니 했던 것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데도 병원에 매달리는 것은 그만큼 아이를 갖는 일이 은설에겐 간절한 문제라는 뜻일 터였다.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모르는 척을 했던 자신의 좁은 속내가 짜증스러워 준수는 자기 머리통을 한 대 툭 쥐어박았다.
“정신 차리라, 마.”
준수와 은설의 마음과 몸이 안정을 찾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은설의 복시는 다행히 약복용을 마친 다다음날쯤 완전히 회복되었다. 준수의 정액검사 결과를 알리는 전화도 5일째가 되는 날 아침에 정확히 걸려 왔다.
“ 네. 본인 맞는데요. 아 결과요. 네. 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개교기념일이라 오래간만에 준수의 평일 아침을 챙겨주던 은설도 준수가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것을 보았다.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결과 통보 전화를 받던 준수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손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뭐래? 병원에서 뭐 안 좋대?”
“짜잔! 정자 밀도 2000만으로 정상! 정자운동성 45%로 정상범주 확인! 정자 생김새도 정상! 정액량이 살짝 부족한데 그거야 내가 그날 평소랑 너무 다르게 조금이었던 거 아니까. 뭐 상관없고.”
“축하해요!!"
은설은 이미 정상수치와 평균수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준수의 결과가 정상수치 이상이기는 하나 평균수치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기뻐하는 준수의 기분을 초치고 싶지 않아 말을 삼켰다.
“그래도 운동 열심히 하고 몸 관리 잘해요. 남자들은 컨디션 따라서 수치변동이 심하대.”
“스트레스를 이렇게 바가지로 받는데도 정상인데, 뭔 걱정?”
“좀 더 노력해 보자는 거지. 아, 이제 우리 진짜 원인불명 맞네.”
기운 빠진 은설의 목소리에 준수도 기분을 가라앉혔다.
“원인 될 만한 게 없으니, 맘 편하게 가져요. 그냥 아직 우리가 애기를 키울 때가 아니라서 안 생기는 걸 거야.”
“원인 불명이 원인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 무슨 이유든 이유가 있긴 있겠지. 다만, 더 힘들고 자세한 검사를 비싼 돈 들여서 해봐야 결론은 어차피 인공수정 아니면 시험관이니까. 그래서 더 안 밝히는 거래요.”
“어쨌든 이제 우리 둘 중 누구의 탓도 아닌 건 맞잖아요.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 보자고요. 난임치료도 좀 편한 마음으로 은설 씨 하고 싶은 만큼 다 해보고."
"정말? 하고 싶은 만큼 다 해도 돼?"
"기왕 하는 거 미련 안 남을 정도로는 해야지. 에휴, 우리 마누라 그동안 이런저런 검사받으면서 마음고생 한 거 진짜 애썼어요. 몰라줘서 미안.”
"선생님 유독 이은설 환자한테 친절하시다니까요. 호호.”
현준의 머릿속에 종일 정간호사의 말이 뱅뱅 돌았다. 거의 비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냉장고 안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며 현준이 중얼거렸다.
“티가 나는 건가?”
“티가 나니까 말을 하겠지.”
오래간만에 현준의 집으로 놀러 온 형석이 소파에 널브러져 편의점 비닐봉지 안의 간단한 안줏거리들을 게으르게 꺼내었다.
“너는 마, 명색이 심리상담사라는 놈이 얘기 듣는 자세가 그게 뭐냐.”
“상담받고 싶음 상담료를 내, 인마. 맥주랑 마른안주 먹이고 들을 수 있는 건 우정 어린 조언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형석은 널부러 뜨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형석이 조미오징어와 싸구려 종합안주세트를 뜯어 세팅하는 동안, 현준이 핫도그며 컵라면, 만두 같은 즉석식품들을 데워 맥주와 함께 들고 왔다. 배가 고팠었는지 형석이 흥분을 하며 게걸스럽게 핫도그와 컵라면을 먹어댔다.
“야, 이것도 오랜만에 먹어본다. 중학교 때 공부한답시고 너 따라 상윤이랑 도서관 가면 공부는 안 하고 맨날 편의점 가서 점심 뭐 사 먹을까 궁리만 했었는데. 오랜만에 먹으니 그때 그 맛이 나네. 희한하게 대학생 때는 그렇게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워도 이 맛이 안 났단 말이야.”
“내가 만두를 기가 막히게 잘 데워서 그래.”
“나 지금 핫도그랑 컵라면만 먹고 있는데.”
“······.”
“그때 니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공부한 게 이은설 만날라고 그랬던 거였다곤 진짜 꿈에도 몰랐다. 다시 만나니까 별로지?”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원래 첫사랑은 안 만나는 게 정답이야. 다시 만나봐야 옛날의 감동이 없어.”
“있던데.”
라면을 입에 밀어 넣다 말고 형석이 현준을 빤히 쳐다봤다.
“이 자식. 미련이 아주 중증이네.”
“그렇겠지. 20년을 기다리다 만난 건데.”
젓가락 위에서 붇고 있는 라면을 재빠르게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형석은 별 것 아닌 감정이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볼짱 다 못 본 첫사랑이라 그래. 니가 걔를 스무 살 때 사귀기만 했어도 지금 이러진 않을 거다. 아휴, 새끼. 중1 때 첫사랑이 무슨 첫사랑이라고, 참. 너 걔 손은 잡아봤냐? 뽀뽀는 했었어? 하기사 뭐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남의 마누라 된 여잔데.”
‘뽀뽀’라는 말에 현준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걔 진료 맡기 전에 나한테 미리 좀 얘길 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내가 뜯어말려 줬을 텐데.”
“막상 보면 너도 못 그럴걸. 너도 은설이 좋아했었잖아.”
느닷없는 현준의 말에 형석이 정색을 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근데 왜 내가 도서관 갈 때마다 기를 쓰고 쫓아왔냐? 너 편의점에서 은설이한테 간식도 자주 사주고 그랬잖아.”
“나는 수지 좋아했어.”
“······. 아! 아아, 수지이!”
“수지 사줄라고 은설이도 사준 거야. 결국은 이 여자 저 여자 간식만 왕창 사주고 중학교 졸업했지만. 불특정 다수의 여자들한테 인기는 올라갔어. 매너 좋다고 ”
현준은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