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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친절이 필요한 순간(1)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좋은 아침이에요.”

“어머~ 선생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래 보여요? 아, 이거 빵. 아침에 빵냄새가 기가 막히게 풍겨서 못 참고 사 왔어요. 나눠 드세요.”

“어머, 선생니임. 자상하셔라.”

현준이 머쓱하게 웃으며 진료실로 들어가고 나서 간호사들 사이에선 한차례 난리가 났다. 누군가는 현준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냐고 했고, 어느 누구는 이제야 병원에 좀 적응을 하고 편해진 것이라고 했다. 가장 다수였던 의견은 그저 의사들이 부리는 변덕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사람 변하지 않는다며 현준의 변화가 오래가지 못할 게 뻔하다고 했다. 정간호사는 환자들에게도 간혹 아주 친절할 때가 있다며, 지난번 병원에서의 소문이 과장일 거라면서 현준의 편을 드는 말을 했다.




간호사들 사이의 중론과는 달리 현준의 변화는 꾸준했다. '모두에게'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한 공간 안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에게만큼은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오늘 얼굴이 밝네요. 뭐 좋은 일 있어요?”

“정간호사 어디 안 좋아요? 피곤해 보이네요.”

“머리에 뭐 했어요? 오늘 뭔가 좀 달라 보이는데?”

“아 그래요? 화사해 보여요. 전보다 더 좋네요.”

“아유, 딸사진이에요? 엄마 아빠 이쁜 부분만 골라 닮았나 봐요.”

“김밥 좀 드실 분? 내 것만 사긴 너무 맛있는 집이라서요.”

연습해서 던지는 멘트라는 티가 좀 났지만 현준의 변화를 간호사들은 반가워했다. 덩달아 현준의 까다로움도, 예민함도 훨씬 더 둥글어졌고, 진료와 연관되지 않은 자그마한 실수라면 너그럽게 웃어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 2.2cm 넘게 자란 난포 세 개 보이시죠? 난포 터지는 주사 처방해 드릴게요 오늘 하고 이틀 뒤. 숙제하시고요. 이번 달에 이쁜 아기 만나실 수 있게 해달라고 저도 기원하겠습니다. 스트레스 너무 받지 마시고 즐거운 일 많이 하시면서 보내세요. 다음번 진료 때 봐요.”

“어머, 선생님임. 우리 남편도 선생님처럼만 말했으면 좋겠어요.”

환자의 인사에 현준이 싱긋 웃으며 화답을 했다. 사뿐한 발걸음으로 환자가 진료실을 완전히 나갈 때까지 현준은 미소를 잊지 않았다.




“다음 환자는 점심시간 이후예요.”

“그래요? 잘 됐네요. 안 그래도 좀 피곤했는데.”

“그렇게 친절하게 하시니까 피곤하죠.”

“하하. 친절하게 말 한마디 더 붙인다고 피곤해질 거 같으면 의사 그만둬야죠.”

“그게 아니라요. 선생님 지난주부터 신규환자가 엄청 늘었어요. 원래 진료 보던 환자분이 친구 손잡고 온 경우를 세 건 넘게 봤다니까요.”

“아, 그래요? 환자가 좀 늘었나 싶긴 했는데.”

“오전 진료 환자만 1.5배 이상이요. 제가 인터넷에 올라오는 우리 병원 포스팅이며 카페글들 모니터링을 좀 하는 편인데요. 아무래도 선생님 입소문 타신 거 같아요.”

“치료 결과가 좋다고?”

“아니요. 병원 다닐 맛 난다고요. 키 크고 잘생긴 젊은 남자선생님인데 매너 좋고 친절하기까지 하다고요. 난임시술 결과는 덤이래요.”

“아······.”

“선생님 별명부터 바꿔야겠어요. 이제 빙봇 안 어울려요.”

정간호사가 씽끗 웃으며 총총한 걸음으로 진료실을 나갔다.

“이러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현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티 나지 않고 싶어? 그럼 모두에게 똑같이 행동해.]

편의점 야식으로 얻어낸 형식의 조언 덕에 ‘은설에게만 유독하다.’는 정간호사의 농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학창 시절 형석이 주로 써먹었다던 이 ‘불특정다수를 향한 친절’이 엉뚱한 효과까지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준의 인기는 환자들 사이에서만이 아니었다. 간호사들 사이에선 어느 순간 같이 일하기 가장 괜찮은 의사라는 소문이 돌았다.

“‘빙봇’ 아니네. 누가 빙봇이래?”

“빙봇이 그 빙봇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안 하는 빙구 같은 로봇'이란 뜻이었대요. 지난번 병원이 전부인 아버지가 하는 거였대잖아요. 데릴사위처럼 데려왔는데 로봇 노릇을 거부했다나 뭐라나.”

“그래? 그럼 이제 뭐 빙봇 아니네.”

“정간호사 요새 살 붙은 거 봐. 전에 샘이 원장하고 한판 크게 붙고 나갔을 때 온갖 뒤치다꺼리 떠안고 마음고생 드글드글 얼마나 심했니. 뼈하고 가죽밖에 안 남을 것처럼 마르던 사람이 요새 아주 얼굴에 꽃이 폈다고.”

“거의 매일 간식 사다가 안기나 봐요. 그쪽 데스크 몽땅 살쪘어요.”

“그건 좀 그렇다. 난 그리로 가면 안 되겠네.”

“아유. 짜증만 안내도 그게 어디야. 우리가 지네 북도 아닌데. 난 살쪄도 괜찮아. 불러주면 그리로 갈래.”

하하 호호.




로비를 빠져나오며 자기들끼리의 뒷담이 한창인 간호사들 무리를 지나치던 미주가 고개를 돌려 뒤를 한번 더 힐끔였다.

“선배 얘기를 하는 거 같은데?”

듣기 거북한 이야기는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미주가 기분 좋게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테이크아웃이에요”

로비 한편의 조그마한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미주는 현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로비예요. 커피 사고 있어요. 차에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정리하고 내려와요.]

[데리러 온 거야?]

[아쉬운 사람이 서비스해야죠. 요즘 차 놓고 출근한다면서요.]


미주는 지난번 식사자리에서 현준과 나눈 이야기를 세심히 기억해두고 있었다. 트레이에 담긴 커피를 받아 들고 미주는 병원 로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옆 LED모니터에는 아직도 난임센터에 새로 부임한 현준을 소개하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사진이 너무 못생기게 나왔네. 실물이 훠얼씬 더 나은데.”

아직도 그립고 아까운 사람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주변을 맴돌며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자신을 받아줄 정도로 이해심도 아량도 넓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참고 견디기 어려웠기에 자신을 버리고 떠났는지 미주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 녀석이 고지식해서 그래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준이 모르게 형석을 찾아갔을 때, 형석은 그의 고지식함 때문이라는 말 하나로 상황을 정리해 주었었다.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라고 미주는 한번 더 생각했다. 미주가 차로 돌아와 아메리카노를 반쯤 마셨을 때, 현준이 미주의 앞 좌석 창문을 두드렸다.

“어머! 빨리 내려왔네요?”

미주가 반갑게 미소 지으면서 입모양을 크게 크게 하여 인사부터 건넸다.

“트렁크 좀.”

“왜요? 어머 그게 다 뭐예요?”

현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공구함이었다.

“필요할지도 몰라서.”

“그거 들고 출근한 거예요? 대중교통 타고?”

“오늘 차 가지고 왔었어.”

“아, 그럼 따로 이동할까?”

“병원에 두고 가면 돼.”

공구함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넣어두고 현준이 트렁크 문을 닫으며 말했다.

“가자.”

“미안. 미리 물어보고 나서 데리러 올 걸.”

현준이 대답 대신 큰오빠 같은 미소를 지었다.




“불 켜봐.”

현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주가 재빨리 거실 메인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켜졌어요! 와하!”

좋아서 폴짝이는 미주를 보며 현준도 뿌듯하게 웃었다.

“다른 데 뭐 더 손 볼 곳은 없어?”

“있어요!”

현준이 자잘하게 손 볼 곳들을 몇 군데 더 고치는 동안 미주가 미리 사두었던 샌드위치와 과일을 꺼내어 식탁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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