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와인 괜찮죠? 차 없으니까. 나 이거 따요.”
미주가 혼잣말처럼 현준의 의사를 물었다.
“어? 아, 나는······.”
“왜요? 마시면 안 돼요? 어떻게 하지? 벌써 코르크 뽑았는데.”
“아냐. 한 잔 마시지 뭐.”
“어디 안 좋아요? 선배가 와인을 다 마다하네. 아님 혹시 뭐, 내가 선배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미주가 짓궂게 웃으며 현준이 오버하고 있는 것이라는 듯 몰아붙였다.
“보는 눈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지금은 나보다도 미주가 더 구설에 올라 좋을 것이 없는 입장이잖아.”
“뭐야 창피하게. 나 재혼시장에 벌써 매물로 나온 거 알고 있었던 거예요?”
“서류 정리되자마자 줄 서는 데가 많을 거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거니까.”
“구설수에 오르면 나야 좋지. 당분간은 생각 없어요. 이제 겨우 혼자 지내는 게 좋아지려고 하는데. 나 독립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째라고요.”
“신이 날 때긴 하네.”
“신은 나는데, 본가 도움 없이 살아보려니 미처 생각 못했던 어려움도 많아요.”
“무슨 어려움?”
“뭐긴요. 선배가 해준 것들 말이에요.”
“?”
"본가 박차고 나와서 어떻게든 도움 안 받으려고 김기사아저씨한테 조차 연락 안 했거든요. 근데 막상 혼자 있는 집에 모르는 사람 들여서 이것저것 고치려니까 괜히 무서운 거 있죠. 벽에 액자 하나 거는 것도 혼자선 잘 못하니까 너무 막막하긴 했어요.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독립한 건 아니니까.”
미주는 정말 정말 어쩔 수 없이 현준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듯했다. 현준은 별다른 코멘트 없이 미주의 말을 들어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외국에 나가서도 메이드 없이 생활한 적이 없었더라고요. 부모님 덕에 곱게 살았던 거 부정할 수는 없는데, 근데 이제와 조금 속상하더라고요. 나 진짜 공부 빼곤 전부 젬병인 거 있죠.”
“처음 독립하면 다들 비슷해. 혼자 살다 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차츰 늘어. 혼자만 그런 거 아니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지금 나 힘내라고 위로해 주는 거예요?”
“속상해하는 사람 위로해 주는 게 뭐 이상한가?”
“정말이네.”
“뭐가?”
“아까 로비에서 간호사들이 한 말요. 류현준 소문보다 훨씬 괜찮은 의사라고.”
“간호사들이? 그래?”
“같이 일하고 싶대요.”
“요새 인기가 좀 올라갔나 보네.”
“변했어.”
“응?”
“변했다고요, 선배. 이전의 류현준이었으면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다른 사람 듣기 거북한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다.’ 송곳 같은 독설로 내 입 막았을 텐데. 아니에요?”
“내가 예전엔 그랬었어?”
“응. 그랬었어. 자기 아내한테까지도 그랬던 사람이었어.”
예전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르는지 미주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따뜻하게 건네려던 한 마디가 외려 미주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나도록 만든 꼴이 되어버려 현준은 당황했다.
“왜 변하고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기라도 한 거예요?”
“미주야.”
“왜 변하고 난리예요, 사람이······.”
“······.”
“어머! 새앰~! 진짜 축하해요!”
은설이 평소보다 두세 배 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박 선생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고마워요.”
“몇 주?”
“이제 8주요.”
“한창 조심해야 될 때네.”
“네. 아직 안정기가 아니라 다른 분들한텐 아직 비밀이고, 우리 부장님 하고 선생님한테만 먼저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알겠어요.”
싱긋.
은설은 더없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장과 은설에게만 귀띔을 한다는 박 선생의 말에는 ‘어쩔 수 없이’가 묵음처리 되어 있었다. 안정기 이전에 주변에 임신 사실을 떠벌리는 것이 금기 아닌 금기라는 것은 요즘 세상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장과 은설에게만큼은 반드시 임신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샘, 저 죄송한데요. 이번 텀 특별반 보충수업이요. 샘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 선생은 동일교과에 같은 학년을 맡고 있었고, 교과와 관련된 대부분의 업무가 은설과 공유되어 있었다.
“웬만하면 제가 하려고 했는데, 입덧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니 출퇴근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이 들어서요. 조퇴도 벌써 몇 번이나 하고, 조산끼도 좀 있대서.”
“그럴게요. 입덧 심한가 보네, 샘. 에구, 힘들어서 어떡해요. 병가라도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 더 버텨보고요. 정 못 견디겠으면 병가도 쓸까 생각 중이에요.”
“조산끼 얘기까지 들었으면 너무 고민하지 말고 여차하면 병가 써요, 샘.”
“샘도 요즘 병원 다니느라 힘들 텐데, 이런 부탁드려서 미안해요, 은설샘.”
“아유, 뭘. 한창 힘들 땐데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지. 어머, 종 치네. 쉬어요, 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을 핑계로 은설이 여교사휴게실을 서둘러 나왔다.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말지 그랬니. 후-.’
박 선생의 말에 조롱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은설의 귀에선 마치
‘넌 못해서 절절매고 있는 걸 나는 맘먹은 대로 척척 해낸다. 부럽니? 그럼 너도 임신하든가. 못하지, 참. 그럼 허드렛일이나 도맡아 하는 걸로 네 존재의 의미를 찾아!’
라며 비웃고 무시하는 것처럼 꼬아져 들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얼마 전 시댁에서의 일을 거쳐 결국 이유 없이 임신이 되지 않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귀결되었다.
하나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생각들이 아무리 찍어 누르려해도 자꾸만 튀어올라와 은설을 괴롭게 했다. 교무부에선 간만의 회식 날짜를 잡느라 바빴다.
“은설샘 왔다. 샘, 담주 목요일 저녁 어때?”
“아, 저 목요일은 특별반 보충수업 있는데요.”
“특별반 보충 박샘 아녔어?”
“바꿨어요. 이번 텀을 제가 하는 걸로.”
“왜?”
“돈 많이 벌라고요.”
“벌어 뭐 하게?”
“병원비 댈라고요. 돈 엄청 들어요.”
“그건 그렇지. 에이, 진짜 이유 따로 뭐 있지?”
“그냥, 한 학기씩 전담하는 게 더 효율적일 거 같아서요. 더 이상은 노코멘트.”
“노코멘트? 오호. 느낌은 오지만 더 묻지 않겠어. 암튼 목요일은 안 되는 거네?”
김 선생에게조차 노코멘트를 선언한 은설의 노력이 무색하게, 박 선생의 임신 소식이 전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지는 데에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젤 꼴찌로 안 사람은 교장선생님이시지. 그다음이 교감, 그다음이 나.”
회식자리에서 교무부장은 아마도 자신이 끝에서 세 번째로 박 선생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사람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그나저나 당장 월요일부터 박 선생님이 병가를 일주일 쓴다고 하니 이걸 어떡해. 강사모집공고도 급하게 내고, 아는 기간제 선생님들한테 전화도 해보긴 했는데 사람 구하기는 어렵겠는데.”
“동 교과 선생님들한테 말씀은 드렸어요. 여차하면 보강 부탁드린다고. 부장님, 보강으로 처리해도 되죠? 수업교환으로 해놔도 박 선생님 돌아와서 그 수업들 다 소화 못할 거 같아요.”
은설이 제 식구를 챙긴다는 투로 부장의 걱정을 받아 대답했다.
“그치. 일주일 치 수업 몽땅 교환하면 한 달은 죽어나지.”
“맞아요. 학기 중에 신혼여행 갔다 온 거 진짜 후회했다니까요.”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는 이야기들을 한 마디씩 해주었다.
“그래요. 이선생님이 동교과에 같은 과목이니까 과에서 보강 돌리는 거를 잘 짜봐요. 교감, 교장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은설샘, 바쁜데 일거리 하나 더 추가됐네.”
“에이, 뭐 수업교환도 아니고 보강계획이야. 어려운 일도 아닌데 힘들 때 돕고 살아야죠. 다음 학기 즈음엔 박샘도 안정기 들어갈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