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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너는(4)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은설의 예상이 적중했다.

아파트 공동현관 옆 화단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아이스크림 튜브 끝을 있는 힘껏 밀어내며 먹고 있는 준수의 모습 보였다.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은설을 발견한 준수가 벌떡 일어나 은설 쪽으로 성큼성큼 뜀뛰기를 하듯 걸어왔다.

“껌껌해질 때까지 뭐 했어, 밖에서.”

나무라듯 은설을 다그치면서도 준수의 손은 기껏 입구 쪽으로 밀어낸 아이스크림 튜브를 은설의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산책”

은설이 준수가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순순히 받아먹으며 말했다.

“웬일이야. 초코맛인데 눈곱만치만 먹네.”

“너무 차서. 신랑의 성의를 생각해서 맛만 봤어, 맛만.”

“치.”

준수가 튜브를 입에 물고 손에 남은 물기를 티셔츠에 슥슥 닦아내었다. 그리고 슬쩍 은설의 오른쪽에 나란히 붙어 서서 손을 잡았다.

“집에 들어 가자”

“아악.”

“왜 그래? 또 배 아퍼? 많이 아퍼?”

“응. 갑자기 급해. 얼른 올라가자.”

은설이 준수의 손을 뿌리치고 공동현관을 뛰쳐 들어갔다. 몇 발 차이로 은설과 사이가 벌어진 준수가 다음번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왔을 때 은설은 이미 화장실 안에 있었다.

“시원해요?”

“응. 아, 며칠 만에 일 보는 건지 생각도 안 나네. 요새 신경 쓸 일이 많았어서 그런가 변비가 좀 심했어요.”

“즐똥.”

“즐겁진 않아요. 힘들게 일 보는 중이야.”

은설이 빼꼼하게 틈이 열려 있던 화장실 문을 아주 닫았다. TV를 보면서 쉬는 동안에도, 잠을 자러 침대 안으로 들어온 후에도 은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은설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 준수가 은설에게 물었다.

“아직도 배 아파? 표정이 계속 안 좋아.”

“아니. 안 아파. 안 아파서 그러는 거야, 지금.”

아까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 콕콕 거리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안 아픈데 왜?”

“내일 말해줄게. 잘 자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은설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한 줄. 단호박 한. 줄.

한 시간을 들여다 보아도 이번엔 초매직의 마술이 보이지 않았다.

“엇?”

몸은 정확했다. 또르륵 하고 무언가 아랫배 안쪽을 굴러내려오는 듯 한 느낌이 났다. 은설은 급하게 변기에 주저앉아 휴지로 닦아내 보았다. 이것은 영락없는 생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것. 며칠 늦게 시작한 탓인지 탁하고 검은 빛깔의 생리혈이 더 많았다. 은설은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화학적 유산인 것보다는 그냥 생리인 게 낫지.”

생리대를 대고 침대 이불 안으로 다시 들어온 은설을 준수가 따뜻하게 품어 안았다.

“어제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

“생리 시작했어?”

“응”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은설 씨랑 나한테 세 쌍둥이는 무리니까 하늘이 알아서 이번 기회는 패스한 걸 거야.”

“나는 정말 내가 임신한 줄 알았어.”

“그래서 어제 그렇게 속상해했구나. 뱃속에 있는 애를 멀리 보내라는 줄 알고.”

“응”

“에구우.”

준수가 은설을 꼬옥 끌어안았다.

“어제 준수 씨하고 열내면서 이야기하고 나서, 배 쓰다듬으면서 사과도 했어. 스트레스 줘서 미안하다고.”

“그랬었어?”

“응. 그렇게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내 똥을 사랑해 주었었네, 내가.”

“큭. 큭.”

“웃긴 거 이해하는데, 그래도 웃지 마. 나는 지금 좀 슬프다고 이 사람아.”

“큭.”

“내 똥한테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철 넘치게 우러나는 사랑을 주느라 어제 내가 그렇게 준수 씨한테 성질을 내면서 다퉜어요. 미안.”

“나도 미안. 대출 얘기가 나오면서 내가 잠깐 밴댕이 속이 됐었어요. 괜히 심통이 나가지고 은설 씨가 아기 좋아하는 거 다 알면서 애를 부산에 맡기네 마네 소리를 했어.”

“알아요. 나도 대출 얘기하고 나서 좀 찔렸어. 처음 만난 날 기념으로 레스토랑까지 데려가 줬는데 준수 씨가 민감하게 스트레스받는 부분을 건드렸더라고. 그건 내가 미안요. 애기 키우는 문제는 일단 만들기부터 하고 나서 생각하는 걸로 해요. 약속!”

“약속. 이제 그 문제로 더 이상 속상해하거나 싸우는 일 없기. 우울해하지도 않기. 탕탕탕!”

“하아. 그치만 나는, 딱 오늘 하루만 더 우울해할게요.”




"선생님 친구분 이시라고?”

진료실로 안내하는 정간호사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은설에게 아는 척을 했다.

“네? 네. 선생님이 이야기하셨어요?”

“네. 근데 전부터 그럴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두 분 원래 서로 친분이 있는 거 같다. 선생님이 유난히 더 친절하셨거든요.”

“원래 다른 환자들한텐 안 친절한가요?”

“요즘은 안 그러세요. 첨에는 좀 쌀쌀맞은 선생님 쪽이었는데 병원에 적응 마치신 뒤로는 간호사들 한테도 잘해주시고, 환자분들한테도 다정하셔서 인기 엄청 많으세요.”

정간호사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설도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간호사에게 화답했다.

“오늘 첫 환자분도 이은설씨세요.”

정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열며 현준에게 은근히 아는 체를 했다. 현준이 조금 어색하다는 듯 멋쩍은 웃음 지으며 은설을 맞았다.

“생리 시작 했어?”

“네. 어제. 이제 존댓말 안 하시네요?”

“정간호사도 알고 있는데, 뭐. 편하게 하자.”

“그래.”

“이틀 째지? 불편한 건 없어? 생리통은?”

“조금. 너 알고 있었지? 임신 아닌 거.”

“응.”

“그럴 거라 생각했어. 어떻게 알았어?”

“촉진했을 때. 변비가 심한 거 같더라고”

“창피하게 그런 거 까지 다 알아내고 그러냐.”

“그런 경우가 종종 있어. 임신을 예상하고 있으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화장실을 잘 못 가. 아무 상관없다는 거 머리로는 이해하고 인지해도, 혹시 힘주다가 큰 일 날까 봐 무서워서 일을 못 봐.”

“나도 나중에 깨달았어. 언제 마지막으로 큰 일 보러 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화장실을 안 갔더라고.”

“속상했겠네.”

은설이 도리질을 했다.

“담담했어. 아닐 수도 있단 거 은연중에 알고 있었으니까.”

“임테기 해봤지?”

“응. 두 번. 다 아녔어. 첫 번째로 해 본 건 한나절 정도 지나고 나서 아주 흐리게 두 줄 나왔지만. 그건 정확한 게 아니니까.”

현준은 은설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약물에 대한 반응이 나쁘진 않지만 부작용이 좀 나타나서 이번엔 페마린으로 바꿔볼 거야.”

“아. 그 거 알아. 부작용이 덜 한데 왜 처음부터 그걸로 처방 안 했어?”

“오프라벨 처방이라 약이 좀 비싸.”

“그래서 차선인 거였군.”

“복용 방법은 같아.”

“응”

현준이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 하곤?”

“응? 아! 화해했어.”

은설이 민망해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현준도 은설을 따라 어딘지 허전해 보이는 웃음을 싱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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